매혹의 초상, 채시라
채시라와 꼬박 10시간을 함께했다. 카메라 앞에서 그녀의 몸이 만들어내는 그림 같은 움직임을 보았고,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그녀의 정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채시라와 함께한 시간을 마무리하며 내린 결론은 배우의 이름값이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배우가 큰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며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와서 어린 스태프에게 다가와 악수를 건네는 일은 드물다. 데뷔 30년 차의, 그 이름만으로 오라가 느껴지는 채시라와의 첫 만남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뤄질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여배우의 면면은 촬영과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먼저 들었고,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손을 잡으며 서로의 온도를 나누려 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소하게 넘어갈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했다. 아무도 자신으로 인해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도록 마음을 쓰고 행동으로 도왔다. <여명의 눈동자>의 윤여옥, <서울의 달>의 영숙, <왕과 비>의 인수대비, <해신>의 자미 부인, <천추태후>의 천추태후와 다시 <인수대비>의 인수대비까지 채시라는 지난 30년간 시대와 공간을 오가며 수많은 여인의 삶을 대신 살아냈다. 그러는 동안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40대 여배우로서의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 진실된 사람, 정직하고 건강한 사람, 누구에게나 갖다 붙일 수 있는 말이지만 온전한 의미로 누군가를 수식하기에 가장 힘들기도 한 이 언어들이 채시라라는 한 여인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인수대비>가 끝나고 2주 만에 <다섯 손가락> 촬영에 들어갔어요. 뭐가 그리 급했나요?
<천추태후>가 끝나고 <인수대비>를 했어요. 연이어 사극을 하면서 현대물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왕과 비>에서 맡았던 인수대비 역이 다시 들어온 거예요. 운명이라 생각하고 또 사극을 하게 되었죠. <인수대비>가 끝나고 좀 쉬고 싶었는데 곧바로 마음에 드는 작품이 들어왔어요. 감독님이 저를 적극적으로 원했고 무엇보다 작품이 좋으니까 마음이 열리더라고요. 힘들어도 이것까지 하고 쉬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이번 드라마 <다섯 손가락>에서 아들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채영랑 역을 맡았어요. 채영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남편이 데리고 온 아이와 내가 낳은 아이가 있어요. 둘 다 피아노를 치는데 남편이 데려온 아이는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로서의 소질을 보이죠. 어느 날 불이 나서 무작정 뛰어들어가 아이를 구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자식이 아니라 남편이 데려온 아이예요. 자신 때문에 화상을 입은 아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엄마가 되죠. 그녀의 행동에는 ‘내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이 있어요. 작가님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채영랑을 그리고 있고 저 역시 그런 부분을 표현하려고 해요.
‘채시라가 주말 저녁을 책임질 것’이라 한 최영훈 감독의 말을 내세운 기사들이 쏟아졌어요. 작품도 작품이지만 채시라라는 배우에 대한 관심이 무엇보다 뜨거워요.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감사하게 생각해요. 촬영 현장 분위기도 정말 좋아요. 게다가 조명 감독님은 <여명의 눈동자> 할 때 함께했던 분이에요.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며 반가워하셨죠. 정성스럽게 다져가며 만들고 있어요. 완성도 있는 작품이 나올 것 같아서 저 역시 기대가 되요.
재벌가의 며느리인 만큼 채시라가 어떻게 보여질지에 대한 기대도 상당해요. 그간 한복에 너무 가려져 있었잖아요.
작품을 선정할 때 늘 캐릭터가 중심이었어요.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죠. 원숙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40대에 보이는 부분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그런 생각에 부합하는 역할이 들어왔어요. 맘껏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화보 촬영을 하는 동안 당신의 몸과 움직임을 보며 감탄했어요.
잡지모델로 데뷔하기도 했고 카메라 앞에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일은 자신도 있고 재미도 있어요. 몸매를 유지하는 데에는 엄마의 영향이 컸어요. 어릴 때 엄마는 제가 아침밥을 안 먹으면 학교에 보내지 않았어요. 어느 책에서 봤는데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한 다이어트라 하더군요. 아침은 물론 세 끼를 제때 챙겨 먹는 게 습관이 되었어요. 제일 안 좋은 게 폭식이라는데 때마다 잘 챙겨 먹으면 폭식할 일이 없어요.
인터뷰를 앞두고 다시 <힐링캠프>를 봤어요. 이렇게 진정성 있는 당신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고요.
사실은 시간에 쫓겨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촬영에 들어갔어요. 그게 바로 제 단점이에요. 아니다 싶으면 엎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못해요. 어떻게든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하게 되었는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시간이었어요. 올 초에 JTBC에서 방송하는 <신동엽, 김병만의 개구쟁이>라는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는데 그 방송을 보신 분들은 굉장히 재미있었다고 하더라고요. 10여 년 만에 나간 토크쇼였는데 완성도도 높았고 저 역시 즐겁게 녹화를 했어요.
활동을 하지 않을 때의 불안함 같은 건 없나요?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정말 행복해요. 무척 소중하고 가치 있는 시간이죠. 그래서 쉬는 중에 불안을 느끼거나 빨리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김태욱 씨가 일 좀 하라고 할 정도죠. 하지만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그때는 ‘하고 싶다,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요. 배우이니 좋은 작품에 대한 욕심은 어쩔 수 없죠.
혼자만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나요?
아이들이 학교 가고 유치원 가고 나면, 그때부터 오후 3~4시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죠. 팝송을 좋아해서 팝송을 틀어놓고 책이나 신문도 읽고, 혼자 춤추면서 청소도 하고, 여기저기 서랍장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서 정리도 하고 노래도 따라 부르고 그래요.
아이들은 TV에 나오는 엄마를 많이 이해해주나요?
제가 나오는 드라마를 다 챙겨 보려고 하고 재미있어 해요. 고문하거나 싸우는 장면이 나오면 못 보게 하고 그러면서 저는 모니터를 해야 하니까 좀 힘들긴 했어요. 사극이라 아이에게 역사 공부도 되더라고요. 왕 이름도 잘 알고 역사 이야기가 나오면 좋아해요. 제가 한복 입는 모습을 많이 봐서 그런지 한복을 그렇게 좋아해요.
얼마 전에 <도둑들>을 봤는데 채국희 씨가 나오더라고요. 스크린에 나오는 동생을 보며 흐뭇해할 당신을 생각했어요.
동생의 첫 번째 영화 도전작이라 저도 긴장을 하고 봤어요.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잘해냈더라고요. 김태욱 씨가 굉장히 정확하게 모니터링하는 편인데 너무 좋았다면서 바로 동생한테 전화를 하더라고요. 마스크가 큰 화면에서 훨씬 잘 어울리고 연기도 멋있었다고 하면서요. 이번 역할을 통해서 배우로서의 자신의 매력이 잘 보여진 것 같아 기뻐요. 몰랐는데 김윤석 씨가 국희를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밥 한 끼 사드리고 싶어요.
당신을 스크린에서 만난다면 더없이 반가울 것 같은데 영화에 대한 욕심은 없나요?
꼭 한번 해보고 싶어요. 훌륭하고 탐나는 작품이 많아요. 최근 <도둑들>에서 김해숙 선배의 연기도 인상적이었어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멋있는 역할을 해내고 있잖아요. 그걸 보면서 나는 좋은 시대에 태어난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앞으로도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으니까요. 해외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는 것도 배우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이죠.
배우로서, 여자로서 본인의 삶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나요?
삶에 불만을 가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엄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건강한 아이들을 주셨고, 든든한 남편이 옆에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잖아요. 세상에 참 많은 직업이 있는데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이미 너무 많은 걸 지키고 있는 것 같지만, 배우를 시작한 날부터 마지막까지 이것 하나만큼은 꼭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요?
진심으로 연기하는 거예요. 연기를 잘한다는 건 그만큼 그 인물에게 가까이 들어갔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뜻일 거예요. 항상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어느 때는 리허설 때 그게 나오기도 하고 집에서 연습할 때 나오기도 해요. 액션이 떨어지고 나오면 더없이 감사한거고요. 항상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완벽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는 거죠. 그 한순간을 위해서 계속 달리는 거예요.
지난 시간들을 떠올려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그 순간에 후회 없이 사는 게 제 목표예요. 지금 이 순간 인터뷰를 하면 최선을 다해서 인터뷰를 하는 거고, 끝나고 집에 가면 최선을 다해서 밥을 먹을 거예요. 지난 시간도 열심히 살아온 것 같아요. 40대가 되고 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날 수가 없어요. 이제는 50대에 대한 막연한 설렘과 기대가 있죠. 나이가 드는 건 참 멋진 일이에요. 시간과 경험과 추억이 쌓여가는 일이니까요.
어쩌면 전성기는 지났겠죠. 하지만 채시라는 여전히 채시라예요. 그 이름만으로 느껴지는 오라가 있어요. 채시라의 무엇이 그 오라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걸까요?
성실함과 책임감인 것 같아요. 재미없는 대답이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밖에 없어요. 그게 결국 ‘나’인 거예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만들어진 습관이라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남들한테 실망을 시켜서는 안 돼, 후배들한테 귀감은 못 되어도 모범은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되죠. 말하자면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저 스스로 꼭 지켜야 하는 것 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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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조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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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일리스트 / 채한석, 헤어/강현진, 메이크업 | 공혜련(A.by B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