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투영하는 드라마. 그래서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 4편에서 삶의 지혜를 찾았다. 이 얼마나 쉬운 배움의 길인가!

1. [넝쿨째 굴러온 당신]
줄거리 시집살이를 호되게 당했던 엄마처럼 살지 않을 것이라며 평소 능력 있는 고아를 이상형으로 꼽아온 방송국 PD 차윤희 (김남주)는 소원대로 천애 고아인 외과의사 방귀남(유준상)과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남편 방귀남이 친부모를 찾게 된 것. 시어머니(윤여정)는 기본, 시할머니(강부자), 시아버지, 시삼촌과 시이모들, 그리고 세 명의 시누이까지! 설날종합선물세트처럼 꽉 찬 패키지가 ‘넝쿨째’ 굴러들어 오고야 말았다.

교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하 ‘넝쿨당’)]은 그간 드라마에서 보여줬던 평면적인 고부 갈등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납득할 만한 갈등을 보여준다. 윤희는 보는 사람이 화병 날 것 같던 순종적인 며느리가 아니며, 시댁인 장수빌라 사람들 역시 마냥 가학적인, 상식 없는 이들은 아니다. 무엇보다 윤희에게는 언제나 그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든든한 남편, 귀남이 있다. [넝쿨당]은 대한민국 며느리들의 ‘시’자 공포증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지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시댁의 오지랖의 형태를 띤 횡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며느리의 재치 있는 대처와 남편의 철벽 커버뿐이라는 사실도! 괜히 [넝쿨당]을 가리켜 ‘시월드 교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명대사 귀남 “아내인 윤희가 동생들에게 존댓말을 하니 저도 처남에게 존댓말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띠 동갑 시누이 방말숙(오연서)이 존댓말 문제로 윤희를 괴롭히자, 윤희의 남동생 세광과 함께한 가족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방귀남의 현명한 한마디. 역시 역지사지 정신과 현장 사살만큼 확실한 건 없다.

2. [빅]
줄거리 총기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한국에 온 고등학생 경준(신). 하지만 교통사고로 30대 소아과 의사 윤재(공유)와 영혼이 바뀌고야 만다. 자신의 육체는 의식불명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윤재의 삶을 연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경준. 하지만 느닷없이 생긴 약혼녀, 미래의 장인장모, 직장 생활 등 30대 남자의 환경은 소년이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윤재의 약혼녀이자 경준이 전학 온 학교의 교사인 길다란(이민정)이 유일하다.

교훈 [빅]이 성장드라마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10대와 30대의 삶과 사랑이 공공연하게 비교되기 때문이다. 길다란과 약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료 의사인 세영(장희진)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윤재, 진짜 윤재와 윤재의 몸에 들어간 경준의 사이에서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점점 혼란스러워하며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다란. 어른들의 사랑은 경준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을 감추지 않는 ‘경준바라기’ 마리(수지)와, 다란에게 “이 성능 좋은 머리로 머릿속을 채워 돌아와서 청혼하겠다”고 말하는 경준의 사랑과 확실한 대비를 이룬다. 초반에는 “어린 게 그러는 거 아니야”와 “어른이 뭐 이래”라며 옥신각신하던 다란과 경준은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의지하고 보듬게 된다. [빅]을 보며 깨닫게 되는 사실은 누군가를 위로할 줄 아는 마음과 교감의 능력은 꼭 물리적 성숙함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명대사 경준 “미끼는 강경준이야, 덥썩 물어. 이 세상에서 날 제대로 아는 건 길다란 하나야. 여러 고기들 중에 하나를 낚는 신나는 낚시질이 아니야. 딱 하나 밖에 없는 고기한테 매달리는 아주 슬픈 낚시질이라고.” 윤재의 몸속에 들어간 경준이 유일하게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은 다란 앞에서뿐이다. 경준이 처한 상황의 절박함과 애절함이 폭발했던 장면으로 철없고 귀여운 10대 소년을 연기하던 공유의 남자다운 눈빛을 오랜만에 볼 수 있어 더욱 설레기도 했다.

3. [유령]
줄거리 경찰대학교를 다니다 자퇴를 하고 해커가 된 박기영(최다니엘), 그리고 경찰대를 졸업하고 사이버 수사대 팀장으로 활약 중인 김우현(소지섭). 정의에 대한 이 두 남자의 기준은 서로 다르지만, 팬텀이란 아이디로 현실과 가상세계에서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는 조현민(엄기준)의 음모와 그 배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은 같다. 하지만 팬텀에 의해 김우현이 목숨을 잃게 되고, 박기영은 성형수술을 통해 사이버 수사대 팀장이었던 자신의 친구, 김우현으로 페이스 오프하게 된다.

교훈 [세일러 문]의 변신만큼이나 황당한 페이스오프 설정만 뛰어넘으면 [유령]은 꽤 볼만한 스릴러물이다. 초반부터 여배우의 자살과 성접대 리스트, 디도스 공격 같은 현실을 연상시키는 사건을 배치하며 시청자들에게 ‘사이버 범죄’의 구체적 실체를 전달했던 [유령]은 최근에는 민간인 불법사찰 이슈까지 다루며 끊임없이 현실을 드라마에 직조한다. 그간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변주되어오던 해커와 국가요원의 전지전능함이 SF적 판타지가 아니라 사실에 가까우며, 누군가가 마음만 먹으면 내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할 수 있는 현실이 도래했다는 것이 [유령]이 선사하는 가장 큰 공포다. 오죽하면 출연자인 소지섭조차 “해킹이 너무 쉽게 되고 메일 하나만 클릭하면 컴퓨터를 조종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무서웠다”고 했을까. [유령]은 무심코 단 악플 하나, 클릭 한 번 잘못한 메일이 어떻 게 인생을 망쳐놓는지 보여준다.

명대사 우현 “남상원 대표도 사찰을 당하고 있었어요?” 거대 재벌 세광그룹에서 위협이 될 만한 민간인을 사찰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단서가 되는 노트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남상원 대표의 부인과 만난 자리에 우현이 한 말. 선을 넘는 권력의 남용이 이루어지는 지금의 현실과 연결되며 소름 끼쳤다.<유령>의 세계는 진짜다.

4. [신사의 품격]
줄거리 능력은 있지만 까칠한, 하지만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차도남 도진(장동건), 유쾌하고 남자다운 성격의 태산(김수로), 연상의 부인과 결혼했지만 여전히 철없는 정록(이종혁), 그리고 부인과 사별한 최윤(김민종). 화려한 40대를 살아가는 네 남자의 이야기.

교훈 40대 남자들의 [섹스 앤 더 시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신사의 품격]은 20대부터 40대에 걸친 다양한 커플의 모습을 비추며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가 됐다.[신사의 품격]의 사랑에는 유독 직구가많다. 극 초반에는 삐딱하게 굴던 도진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짝사랑을 감추지 않는다. 이수(김하늘)에게 일부러 문자를 잘못 보내는 도진처럼 누군가에게 연애를 걸 때나 초반에 연애 감정을 키워갈 때 써먹는 유치한 방법들은 나이와 상관없다는 보편적 진리를 증명한다. 자신을 자꾸 밀어내는 세라(윤세아)에게 손금을 보여주며 “내 손금의 한 줄은 너야. 내가 평생 쥐고 살…”이라고 고백하는 태산의 모습은 또 어떤가. 나이차이도, 과거도 상관없이 최윤에게 무대포에 가깝게 들이대는 것은 임메아리(윤진이)도 마찬가지다. 온몸으로 상대방의 마음에 부딪히는 임메아리의 모습은 끊임없이 밀당을 해야 하는 연애에 지친 현대인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청담마녀’라고 불리는 박민숙(김정난)도 정록 앞에서는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건 그런 거야, 뜨거운 게 아니라 따뜻한 거”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우리가 이 드라마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랑의 풍경이며, 나이에 상관없이 연애에 있어서 만큼은 솔직해도 좋다는 것이다.

명대사 도진 “서이수, 나랑 살자. 같이 살자. 행복할 거야, 약속할게.” 차에서 이수를 기다리던 도진은 이수의 얼굴을 보자마자 갑작스럽게 프러포즈를 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서 더 진심이 느껴졌던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