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樣年華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고 했나. 치열하고 혹독한 청춘을 견디고 지금 만개한 배우들이 있다. 눈은 깊고, 세상을 아는 자의 여유는 충만하며, 그들에게서 번지는 기품은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낸 자들의 전리품과 같다. 나이가 조금 많은, 아니 그 나이 때문에 더 멋진 이들을 우리는 아저씨라고 부른다.

슈트는 아뜰리에 러브(Atlier Love), 셔츠는 웅가로(Ungaro). 스타일리스트 | 김소영헤어&메이크업 | 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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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트는 꽃중년│조성하

조성하의 눈은 때로는 무서웠다. 또 다른 역할을 할 때면 의지가 깊고 다 정했다. 캐릭터에 따라 조성하의 눈은 빈번하게 달라졌고, 그 변화보다 모든 눈빛이 그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게 더 신기했다. 온전히 그 자신일때 그의 눈빛은 어느 쪽일까 궁금했다. 영화 <화차>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조성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스튜디오에 울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춤을 췄다. 조성하는, 알고 보면 유쾌한 남자다.

‘아저씨 배우’에게 공통적으로 궁금한 게 있어요. 바로 20대의 모습 이죠. 우리는 당신의 20대를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눈빛이 많이 달라졌어요. 20대 때는 맹수의 눈을 가지고 있었어요. 사람 들이 내 눈에서 살기가 느껴진다고 할 정도였어요. 수상한 구석이 있다고, 영화감독은 좋아했죠.

그러다 보니 한동안 맡은 역할은 조직 보스, 연쇄 살인마….
TV에서는 따뜻한 작품을 많이 했지만 영화에선 그랬죠. 그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게, 내가 배우로서 가진 좋은 조건이었던 것 같아요.

20대 때는 왜 그런 눈빛을 가졌다고 생각해요?
10대와 20대 때는 두려움이 많았어요.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지고 싶지 않았죠. 그 시절의 대세는 마초였거든요. ‘나도 절대 최민수 선배에게 지지 않는다’. 그때는 그런 마음도 있었죠. 연기의 선택폭이 그리 넓지 않은 때였어요. 멜로 작품의 주인공이 아니면 악당.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난 멜로가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악당이죠. 무조건 세게.

그랬던 당신이 지금은 ‘꽃중년’의 대표 주자가 되었죠. 수식어가 마음에 들어요?
아마 2008년부터였을 거예요. <대왕 세종>때부터 꽃중년이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좋아요. ‘중년’이라고만 하면 아저씨 같은데 꽃중년은 화사하니 오빠 느낌?

배우들은 다양한 나이대를 연기하죠. 배우 박해일도 지금 영화 <은교>에서 70대 노인 역할을 하고 있고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40대 배우를 위한 역할이 많아졌는데, 자신의 나이를 연기한다는 건 어때요?
나는 연극배우로 연기를 해온 사람이잖아요. 극단의 사람들로 모든 배역을 소화해야 하니까, 본의 아니게 노인 역을 많이 했죠. 그러면서 느낀 게 있어요. 연기를 아무리 테크닉적으로 잘하더라도 안 되는 게 딱 하나 있다. 바로 경륜. 내 또래를 연기할 수 있는 게 요즘 가장 좋은 일 중 하나예요.

테크닉과 경륜을 모두 가진 지금은, 두려울 것이 없겠는데요?
역할을 소화하는 능력을 숫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제는 내가 70~80%는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함께하는 작가와 감독, 그리고 스태프들과 채워나가는 거죠.

연쇄 살인마에서 지덕체를 갖춘 왕으로. 악역 전문 배우에서 인자하고 온화한 배우로 급선회하게 된 계기는 뭐였어요?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이 전환점이었어요. 부하 여직원 건드리고, 뒷 돈 챙기는 속물 역할인데 감독은 그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아저씨처럼 보였으면 했어요. 표면적으로는 온화하고 따뜻한 선배. 알고 보면 나쁜 놈. 영화를 본 김철규 감독은 내게 따뜻하고 온화한 느낌이 있다고 생각했고 <황진이>에 캐스팅했죠. 그러면서 배역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세종의 스승이 되기도 하고, <욕망의 불꽃>에서는 재벌,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정조였죠. 악역은 베테랑이지만 이쪽 캐릭터는 신인이나 다름없어요.

점점 존귀한(?) 역할을 맡게 되면서 현장이 편해지지 않았나요? 특히 왕을 연기할 땐 말이죠!
그렇죠. 위치에 따라서 모든 게 달라지죠. 현장은 말이죠, 무명 배우는 쉴 곳도 없어요.

재킷은 아스페시(Aspesi). 셔츠는 세븐 오(7+h/0). 팬츠는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 안경은 알로(AlO). 장갑은 니나 리치(Ninna Ricci). 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스타일리스트 | 김하늘, 헤어 | 손민정(0809), 메이크업 | 정시현(0809)

재킷은 아스페시(Aspesi). 셔츠는 세븐 오(7+h/0). 팬츠는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 안경은 알로(AlO). 장갑은 니나 리치(Ninna Ricci). 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스타일리스트 | 김하늘, 헤어 | 손민정(0809), 메이크업 | 정시현(0809)

홈런의 순간│마동석

한때는 팔뚝 두께가 25인치에 달했다는 남자, 이종격투기 선수 마크 콜먼의 트레이너였던 이 남자를 귀엽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하지만 좋아하는 밴드 이름을 말하며 쑥스러워할 때의 마동석은, 분명히 귀여운 아저씨였다.

2012년은 시작이 좋네요. 영화 <퍼펙트게임>에서 연봉 3백만원의 2군 포수 박민수 역할로 깊은 인상을 남겼잖아요.
나한테는 정말 소중한 작품이에요. 그동안은 웃기거나, 아니면 진지한 의리파 위주로 연기했거든요. 관객들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역할을 맡았던 적이 없었는데 <퍼펙트게임>을 통해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죠.

원래 야구 선수가 꿈이었다면서요. 그때도 포수였나요?
아뇨. 나는 타자였어요. 아무래도 덩치가 있으니까 당연히 포수였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더라고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이 개봉했어요. 올 상반기 최대 화제작으로 꼽히는 작품에 출연한 소감은 어떤가요.
내가 맡은 역할은 태권도 도장 사범이에요.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름도 없어요. 그냥 ‘김서방’이에요. 나쁜 놈은 아닌데 점차 건달처럼 물이 들죠. ‘이래가지고 내 여동생 먹여 살리겠냐’고 삐딱한 길로 접어들도록 꼬이는 게 바로 최민식 선배가 연기한 최익헌이에요. 극중 내내 괄시받는 코믹한 캐릭터죠.

어떤 팬이 쓴 글을 봤는데 처가살이하면서 구박받는 귀여운 남편 역을 해도 어울릴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이번 작품에서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겠네요.
그런 글이 있어요? 2007년에 고현정, 하정우 씨와 촬영했던 드라마 <히트>에서도 거칠지만 나름 귀여운 면이 있는 형사 역을 한 적이 있어요. 화가 나면 책상을 엎어버릴 정도로 물불 안 가리는 캐릭터인데 평소에는 미키 티셔츠를 입고 미키 소품을 애용하는 설정이었죠. 극중 이름을 따서 ‘미키 성식’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어요.

덩치도 있고 굉장히 남자다운 인상인데 귀엽다는 말 들으면 어때요?
내가 귀엽다는 건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들었던 말 중에 기분 좋았던 말은 있어요. 얼굴에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말. 내가 살려내야 할 점이 있다면 그런 거겠죠.

멜로 연기가 하고 싶진 않아요?
하고 싶죠.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깊이 있고 정교한 설정이 있는 작품으로요. <복싱 헬레나(Boxing Helena)>라는 영화 아세요? 옆집에 사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요. 우연히 그 여자가 교통사고를 당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팔다리를 다쳐 움직일 수 없게 된 여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죠. 정신적으로 분명히 문제가 있는 남자지만 굉장히 헌신적이에요. 그런 극단적인 설정에서 오는 남자의 지고지순함이 좋았어요.

연애할 때는 어때요?
잘해주려고는 해요. 하지만 이벤트 같은 건 성격상 도저히 자주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전 만나면 서로 편안한 관계가 좋은데 여자분들은 또 너무 편하게만 생각하면 섭섭해하잖아요. 주변 배우들도 하나둘 결혼을 하니까 다들 이상형이 뭐냐, 왜 결혼 안 하냐고 하는데 이제는 이상형이란 것도 없어졌어요. 성격 좋은 것, 그게 가장 섹시한 것 같아요.

사귀면서 내가 했던 행동 중 가장 로맨틱했다고 생각되는 건 있어요?
사실 한창 연애해야 할 시절, 저는 연애를 일부러 안 했어요. 어차피 내가 누굴 좋아한다고 당장 결혼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게 내가고등학교 때예요. 이곳에서 뭔가를 이뤄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죠. 나이트클럽 가드부터 설거지, 트럭운전, 웨이터, 심지어 낚싯 바늘 만드는 공장도 다니고 어휴, 안 해본 게 없어요.

셔츠와 슈트는 에르메네질도 제냐. 스카프는 더 셔츠 스튜디오(The Shirts Studio). 행커치프는 니나 리치. 가죽 스트랩의 손목시계는 구찌(Gucci). 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스타일리스트 | 김하늘 헤어&메이크업 | 민경(파비엔H)

셔츠와 슈트는 에르메네질도 제냐. 스카프는 더 셔츠 스튜디오(The Shirts Studio). 행커치프는 니나 리치. 가죽 스트랩의 손목시계는 구찌(Gucci). 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스타일리스트 | 김하늘 헤어&메이크업 | 민경(파비엔H)

악당의 반전│박성웅

“와, 꽃을 들라고요? 내 평생 이런 일도 있네!” 박성웅은 국화 두 송이를 들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늘 사연 있는 역할 때문에 주름이 잡혀 있던 미간이 활짝 펴졌고, 그는 정말 천진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 웃음을 참지 못했다. 못되고 나쁜 역할을 도맡아온 이 남자의 진짜 얼굴이 그제야 보였다.

팔 길이가 무려 86cm라니, 20대 시절 당신을 만났다면 분명 모델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내 얼굴은 지금이 나은 것 같아요. 내가 외모로 잘나갔을 때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데,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다들 지금이 낫다고 해요.

외모로 가장 잘나갔을 때보다 지금이 더요?
요즘은 다양한 얼굴이 인정받지만, 내가 배우를 꿈꿀 땐 ‘멀쩡한 인물’은 장동건 같은 사람만 할 수 있었어요. 내가 너무 빨리 태어났나봐.

촬영할 때 꽃을 들고 너무 좋아하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정말 악역만 들어와요?
농담이죠. 하지만 나는 악역이 좋아요. 스트레스도 풀리고요. 평상시엔 그렇게 못하잖아요. 속 안에 있는 나쁜 것들이 걸러지는 것 같아요. 보는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고.

스티븐 킹도 그렇게 주장하죠. 끔찍하고 나쁜 캐릭터는 평온한 일상을 감사하게 만든다고요.
항상 이렇게 밝은 쪽으로만 의도된 것으로 가면 좋아요. 하지만 모방범죄 같은 건 좀….

법대를 그만두고 배우가 되었잖아요? 어떤 계기가 있었어요?
군대 갔다 와서 1년 지내고 나서 보니까, 법대 가서 사법고시 패스하고 사는 삶이 행복할 것 같지가 않았어요. 2학기 중간고사 때 1주일 내내 공부 하나도 안 하고 뭘 할까 하다가 찾은 답이, 내가 하고 싶은 건 배우라는 거였죠. 난 딱 부러지는 거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1997년 1월 1일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한 거예요. 이제 13년이 넘었네요.

소문대로 무서운 기억력이네요.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해도,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무작정 부딪혔죠. 방송국은 제일 무서운 경비 아저씨를 뚫을 수가 없으니까 못 가고 대신 <씨네2000> 같은 영화지 구인란에 ‘엑스트라 구합니다’만 보고 찾아갔죠. 키가 크니까 무조건 뒤에 가서 서 있으래요. 그렇게 대사 없는 엑스트라를 했죠.

처음으로 대사를 한 작품도 기억나요?
물론이죠. <넘버 3>예요. 그 영화가 3억 정도로 만든 영화거든요 그때 한석규 선배 1억 주고, 나머지로 다 찍었어요. 대사가 있는 역할도 캐스팅을 안 해서, 엑스트라를 다 방 안에 불러놓고 조감독이 쪽 대본을 주면서 읽어보라고 시켰죠. 그때 내가 즉석에서 캐스팅이 된 거예요. “난 말이야 체질적으로 쪽바리 새끼들이 싫어”라는 대사. 그 뒤에 박상면 선배가 다시 대사를 쳐서 사람들이 대사는 다 기억하는데 그게 난 줄은 모르죠.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그 대사를 하는데 가슴이 어찌나 쿵쾅쿵쾅 뛰는지. 그게 내 첫 촬영이었어요.

무작정 부딪혔으니 고생담이야 삼박 사일로도 모자랄 것 같아요.
계속 엑스트라를 전전하다 보니까 비전이 안 보이는 거예요. 나는 연기가 하고 싶어서 왔는데 다른 엑스트라는 그냥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뿐이에요. <스카이 닥터>라는 영화 현장이 그렇게 힘들었어요. 바닷바람은 정말 추웠고 바람만 간신히 피하면서 밤샘 촬영을 기다렸어요. 그때 생각했어요. ‘오늘을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 지금 난 완전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하는 거니까 더 이상 떨어질 곳은 없다’. 난 여기서 시작이니까 앞으로 올라갈 계단만 있다고. 그때의 다짐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어요. 그 다음에 액션 스쿨에 들어가서, 죽도록 연기를 배웠죠.

    에디터
    피처 에디터 / 허윤선, 피처 에디터 / 이마루
    포토그래퍼
    안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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