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서 영감 받은 의상들의 각축전
야구 점퍼와 승마 부츠, 스키 팬츠, 수영모자 등 스포츠에서 영감을 받은 다채로운 의상이 각축전을 벌인 이번 시즌 런웨이. 새로운 관전 포인트는 테일러드 코트나 펜슬 스커트처럼 일상적인 겨울 의상과의 차분한 조합에 있다.
스포츠와 패션은 완벽한 파트너십을 자랑한다. 마치 셜록 홈스와 왓슨, 푸치니와 토스카니니의 관계처럼. 오랜 시간 돈독한 우정을 쌓은 덕에 스포츠는 패션에 기능성과 실용성을, 패션은 스포츠에 멋과 트렌드라는 소중한 요건을 선물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사이좋게 함께 성장하고 있다. 그 시작점은 1920년대였다. 그 시절의 스포츠 선수는 지금의 아이돌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는데, 특히 테니스 선수가 그랬다. 윔블던 챔피언이었던 수잔 랑글랑은 뛰어난 실력뿐만 아니라 장 파투가 디자인한 의상으로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머리에는 큼직한 헤어밴드를 두르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흰색 주름 원피스에 단추가 달린 민소매 스웨터를 걸쳤다. 스커트를 입고 한 마리의 새처럼 코트를 누비던 수잔 랑글랑의 모습은 움직임이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옷차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고, 사람들은 그녀의 옷차림을 열광적으로 모방했다. 당시의 스포츠 열풍은 수영복 디자인도 변화시켰다. 튜닉과 무릎까지 오는 넉넉한 팬츠인 니커보커즈로 이루어진 거추장스러운 수영복을 벗고 원피스 수영복을 입게 된 것도, 고무 소재의 수영모자가 처음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피카소가 프로그램을 디자인하고 샤넬이 의상을 담당한 1924년의 발레 공연 <푸른 기차>는 당시 스포츠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데, 발레 공연의 주제가 다름 아닌 테니스, 골프, 수영 등 스포츠에 관한 것이었다. 샤넬은 이 공연에서 저지 소재를 사용한 수영복뿐 아니라 대담한 프린트의 스웨터와 양말 패션을 선도한 윈저 공의 골프 웨어에서 영감 받은 의상도 선보여 멋과 실용성을 겸비한 스포츠웨어를 한발 앞서 소개했다. 스포츠웨어가 성장한 1920년대는 패션의 실용화, 현대화에 첫걸음을 내디딘 시기다. 스포츠라는 특급열차를 탄 덕분이었다.
지금이 그 시절을 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람객에 불과했다는 것과 스포츠가 부의 상징일 만큼 소수 계층만 누리는 특권이었다는 것.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라이프스타일에서 스포츠나 레저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세상이다. 관심과 참여가 높아진 만큼 스포츠의 파급력은 물론이고 스포츠를 즐길 때 더 멋진 의상을 입고 싶은 욕구도 커졌다. 이런 유행에 발맞춰 다채로운 변신을 꾀한 스포츠와 아웃도어 브랜드들은 지금 성장의 정점을 찍고 있다. 인체의 특성을 고려한 기능성에 스포츠와 일상에서 모두 입을 수 있는 실용성, 젊고 세련된 디자인까지, 매력적인 장비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리고 아이돌과 꽃미남 배우를 전면에 내세우며 브랜드의 세대 교체까지 꿈꾸고 있다. 아웃도어 브랜드의 놀라운 성장에 반격을 시작한 패션 브랜드 역시 본격적으로 스포츠 트렌드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스포츠웨어와 트렌드를 어떻게 매치할 것인지에 대한 열쇠는 이번 시즌, 아니 올 봄/여름 시즌 의상에도 고스란히 드러날 전망이다. 패션 디자이너들 또한 이러한 전 세계적인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간과할 리 없다. 그들은 좀 더 세련되게 정제된 방법으로 스포츠를 입혔는데, 패션 고수들답게 대놓고 스포츠 경기를 펼치지는 않았다. 이번 시즌 런웨이 위 모델들은 스키, 야구, 승마, 사냥, 캠핑, 수영 등 계절을 불문한 다양한 스포츠와 레저를 떠올리게는 했지만 결코 여성성과 우아함, 화려함 등 런웨이만의 근사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스포츠와 스타일의 파고를 적정선에 유지하는 것이 일상에까지 침투한 스포츠의 감성을 세련되게 즐기는 방법이라고 디자이너들은 설파한다.
많은 스포츠가 있지만 특히 골수 팬이 많은 야구는 이번 시즌 여러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야구선수들이 입는 동그랗고 짧은 형태의 점퍼가 가장 눈에 띄는데, 지방시 컬렉션에서 만난 변형된 디자인은 캐주얼하다기보다 우아했다. 새틴 소재에 이국적인 정글 프린트를 입힌 야구 점퍼에 시스루 소재의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매치하고, 야구모자에 뿔테 안경을 쓴 지방시의 모델은 귀여우면서도 관능적이었다. 입생로랑은 글렌 체크 야구 점퍼를 가느다란 시가렛 팬츠와 조합했다. 인상적인 건 같은 무늬의 코트나 재킷을 입은 모델보다 야구 점퍼를 입은 모델이 훨씬 어려 보였다는 것. 미우미우식 야구선수도 매력적이다. 1940년대 레이디라이크 룩에 삐딱하게 쓴 야구모자는 촌스러울 수 있는 빈티지 스타일을 젊고 세련되게 마무리하는 요소로 활용되었다. 이 모습은 얼핏 보면 럭비선수 같기도 하다. 칼라가 달린 어깨가 넓은 톱과 공처럼 말아 옆구리에 낀 가방 때문이다.
겨울 스포츠의 꽃인 스키는 다양한 스타일로 런웨이를 질주했다. 후드 티셔츠를 수영모자처럼 보이게 입고 위에는 니트 스웨터를, 아래에는 레깅스 팬츠를 매치한 질 샌더의 모델은 클래식한 스키선수 같았고, 패턴을 요리조리 이어 붙여 직선의 기하학적인 패턴을 만든 팬츠와 에스키모를 떠올리게 하는 모피 재킷을 걸친 랙앤본의 모델은 설원에서도 일상에서도 어디서나 근사할 것 같았다. 막스마라는 차분한 색감과 허리를 조인 날렵한 선으로 고급스러운 젯셋풍의 스키 룩을 런웨이에 올렸다. 알렉산더 왕은 스포츠 모티프를 잘 활용했는데, 템플에 모피를 장식한 선글라스와 판초 형태의 점퍼, 패딩을 장식한 테일러드 코트 등이 그 예다. 스키장에서 입어도 근사할 레이어드 연출법도 배울 수 있다. 눈에 젖을 염려만 없다면 가장 입어보고 싶은 스키 룩은 버버리 프로섬의 컬렉션에 있었다. 모피에 니트를 촘촘하게 엮어 실용성을 강조한 코트와 가늘고 긴 판탈롱 팬츠의 조합은 설원의 퀸으로 만들어줄 세련되고 간결한 옷차림을 제안한다.
승마와 사냥에서 영감 받은 에르메스 컬렉션의 감상 포인트는 가죽의 다양한 변주다. 튜닉 형태의 낙낙한 스웨이드 톱과 좁다랗게 떨어지는 가죽 팬츠, 자연스러운 주름이 잡히는 가죽 부츠, 목에 거는 가죽 패키지의 술병, 승마모자를 변형한 듯한 퀼팅 장식의 가죽 모자까지. 이런 옷을 입고 설원에서 사냥을 한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아마 날짐승의 마음까지도 앗아갈 거다. 영화 <콜드 마운틴>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색과 데님 소재 중심의 헌팅 룩을 선보인 디스퀘어드2의 의상도 멋졌다. 메시 장식과 절개 팬츠로 활동적인 느낌을 살린 발렌시아가, 날씬한 도트 룩에 스키 부츠를 닮은 페이턴트 가죽 부츠를 매치한 마크 제이콥스, 고글 형태의 선글라스로 활기를 부여한 샤넬과 펜디 컬렉션 등등 이번 시즌 런웨이에도 여전히 스포츠는 살아 있었다. 아름답기만 하다면 고통과 불편은 참을 수 있다고 외치는 패션 탐미 주의자들도 이번 시즌엔 생각이 바뀔 것 같다. 편안한 착용감, 자연스러운 멋, 똑똑한 기능을 자랑하는 옷이 우리의 의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있으니까. 어쨌건 지금은 탐미주의보다는 실용주의가 대세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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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박선영
- 포토그래퍼
- KIM WESTON ARNOLD, Park Jae Y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