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행의 조각들-2
그림이 사진보다 아름다운 건, 상상으로 여백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재주 많은 손으로 남긴 여행의 기록. 일러스트 작가들이 기억 속을 더듬어, 가장 좋았던 여행의 한순간을 그렸다. 인생도 그림 같고, 여행도 그림 같다. 이 한 장에 다 있다.
State of Mind
1. 프로비던스
뉴잉글랜드 지방에 위치한 프로비던스는 미국에서 가장 작은 주의 수도다. 몇 개월간 지내는 동안 꼭 대도시에서 살아야 된다는 편견이 사라졌다. 집에서 30여분을 걸으면 동물원이 있었다. 지나는 길의 한적함과 가끔 만나는 창고세일은 일상에 새로움을 더해주었다. 특히 비 오는 날 약속이 없으면 어김없이 동물원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보는 동물 감옥과 달라 아무리 기다려도 코끼리 코빼기 한 번 볼 수 없을 때도 태반이었지만, 책을 읽거나 작업을 구상하며 그들을 기다리곤 했다. 녀석들, 지금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려나!
2. 뉴욕
이 세계에서 뉴욕만큼 자주 호명되는 도시가 또 있을까. 그런 도시에서 살았다는 건 내 인생에 있어 행운이자 행복이었다고, 지금도 추억해본다. 평화로움으로 충만한 시간인 오후 6시. 맨해튼의 거리를 걸으면 다양한 향기가 느껴졌다.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발산하는 각각의 묘한 매력 때문일까. 가로등에 불이 들어올 즈음 빌딩 숲 한가운데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한없는 풍요로움에 젖어들었다. 주황빛 저녁 노을과 부드러운 음악이 항상 겹쳐질 것 같은 도시 맨해튼. 그 마천루 숲의 저녁 하늘을 그리워한다.
글·그림 이장희
도시공학을 전공하고, 뉴욕에서 일러스트를 또 전공했다. <풍경과 함께한 스케치 여행-뉴욕>을 썼고, 서울 곳곳을 누비고 그려 가만히 앉아서 읽기엔 너무 황송한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를 냈다.
그림 편지
1. 산토리니
마음이 복잡해지면 모두 놓아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난다. 일 년에 반 정도는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것을 보면 나는 아마도 욕심이 많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늘 사람이 별로 없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을 선택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는 곳을 만나게 되면 꼭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그림으로 기록해두었다가 다시 삶이 힘들어질 때쯤 꺼내어 보곤 한다. 그리스의 산토리니는 내 인생이 어두컴컴했을 때 들렀던 곳이다.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흐르는 새파란 지중해 바다와 새하얀색 집 사이에 숨어 있으니 은신처처럼 평안했다.
2. 고아
인도 고아에서 힘든 하루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키가 매우 큰 야자나무가 우거진 길을 만났다. 야자나무 근처에서 불어오는 바닷 바람에 야자나무의 잎이 크게 흔들리며 쏴아 하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에 모든 걱정이 다 쓸려나갈 것 같았다. 그때 이 길의 끝에 천국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고아의 야자나무 길이었으면 좋겠다고.
글·그림 정아
여행의 환상을 그리는 사람, 정아는 여행에 대한 매혹적인 상상과 이미지를 담은 일러스트책 <당신의 빨간 고래는 안녕하세요?>를 썼고, 작가 명로진과 함께 최근 <연애에 말걸기>를 펴냈다.
정지된 시간
1. 시즈오카
일본의 작은 마을을 여행했다. 오마에곶 마을의 상징이기도 한 오마에자키 등대를 보러 시즈오카로 가는 길에 점심을 먹고, 잠시 걸었다.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간판에는 꿈의 아이스크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꿈의 아이스크림이라니, 과연 어떤 맛일까.
2. 프랑크푸르트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 일정을 마치고 독일에서의 마지막 오후를 보내기 위해 신호등 앞에 서 있던 때를 기억한다. 요란하게 울리던 사이렌 소리, 깜빡이던 신호등, 자동차 경적소리, 갑자기 모든 게 멈추며 횡단보도 너머의 세상이 이상한 나라로 변하기 시작했다.
글·그림 이지선
아트디렉터였다가 영국으로 일러스트 유학을 떠났고, 친구와 함께 <런던 일러스트 수업>을 썼다. 해외 유수의 상을 많이 탄 상복 많은 작가. <검은 사자>는 해외에도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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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허윤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