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느리게 매혹되다 1
푸른 초원 위에 통나무로 지은 집이 전부인 줄 알고 떠났던 스위스 여행에서 잔잔한 호수와 눈부신 하늘, 울창한 숲과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느끼고 돌아왔다.
어릴 때 읽었던 동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스위스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하늘과 맞닿은 언덕 위에 지은 통나무집, 밤이면 지붕에 난 창문 너머로 별이 쏟아지고,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면 푸른 초원과 꽃밭이 펼쳐지는 곳. 하지만 유럽 여행으로 스위스를 다녀온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융프라우와 인터라켄에 대한 것뿐이었다. 대부분 독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잠시 거쳐갔을 뿐, 스위스의 속살을 제대로 느끼고 돌아온 이들은 찾기 힘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융프라우와 인터라켄 대신 체르마트와 루체른을 택한 것은 누구나 아는 스위스가 아닌 숨겨진 매력을 찾고 싶어서였다. 물론 일주일이라는 시간도 한 지역을 제대로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되도록 깊이 보고 느끼려고 노력했다. 맑은 공기와 화창한 날씨, 도시를 숨쉬게 하는 울창한 가로수, 기차를 타고 잠시만 도심을 벗어나도 창밖으로 끝없이 스쳐 지나가는 너른 들판과 꽃들까지, 스위스는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그려온 환상을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는 곳이었다. 중세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구 시가지와 공장과 창고가 밀집한 산업지구에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떠오른 신 시가지가 조화를 이룬 취리히, 세계적인 명봉 마터호른을 품은 체르마트의 정겨운 산악 마을, 잔잔한 호수를 품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도시 루체른은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전통과 자연을 소중히 여기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불편함과 희생을 감수하는 스위스 사람들의 모습은 깊은 울림을 남겼다.
활기찬 도시와 평화로운 자연을 품은 취리히
두바이를 경유해 스위스 취리히 공항까지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취리히 공항에 내렸을 때 창밖으로 화사한 빛이 스며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보니 그제야 스위스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공항에서 취리히 중심가에 자리한 중앙역인 하우프반호프(Haufbahnhof)까지는 불과 10분 거리였다. 서울에서 미리 구입한 스위스 패스를 꺼냈다. 앞으로 6일간 나의 발이 되어줄 소중한 존재다. 플랫폼에 도착하자 레몬색과 다홍색, 남색의 페인트로 치장한 벽이 시선을 끌었다. 스위스를 여행하다 보면 화려하고 세련된 컬러 매치와 심플면서도 감각적인 디자인에 감탄하게 된다더니 정말 그랬다. 광장처럼 넓은 중앙역 홀에는 크고 작은 상점과 카페가 밀집해 있었다. 점심시간 무렵이라 캐리어를 끌거나 배낭을 멘 여행객들과 프레첼이나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는 현지인들로 붐비는 그곳에서 활기가 느껴졌다.
중세시대의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구시가지
중앙역을 나서자 타임머신을 탄 기분. 중세시대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뾰족하게 솟은 첨탑과 붉은 벽돌지붕을 얹은 집들이 언덕을 따라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도시 중심가에 서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공기도, 하늘도 청정 그 자체였다. 매연 냄새조차 나지 않을 만큼 청정한 공기를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현지 가이드는 도로를 지나는 전차를 가리켰다. 취리히 시민들은 버스 대신 탄소배출량이 현저히 적은 전차와 기차를 대중교통으로 이용하는데, 노선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 취리히의 웬만한 지역은 기차와 트램을 타고 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취리히는 중앙역인 하우프반호프를 기준으로 라텐 강을 끼고 있는 동부의 구시가지와 문화와 쇼핑, 예술단지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취리히 웨스트가 있는 서부의 신시가지로 나뉜다. 먼저 구시가지 쪽으로 향했다. 기차역 앞에서 탄 트램은 취리히의 쇼핑과 금융의 중심가인 반호프 거리(Bahnhof Strasse)를 통과해 반호프 다리(Bahnhof Brücke)를 건너 노천카페와 상점이 즐비한 니더도르프 거리(Niederdorf Strasse) 근처에 닿았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중세시대에 지은 건물이 길게 이어지는 니더도르프 거리는 레스토랑과 노천카페, 식료품점과 와인가게가 자리하고 있어 여행객과 현지인들로 활기가 넘쳤다. 주인의 개성이 느껴지는 감각적인 간판과 근사하게 꾸민 쇼윈도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거리 입구에서 아이슈타인이 수학했던 곳으로 유명한 취리히연방공과대학(ETH)으로 가는 전용 기차인 폴리반(Polybahn)을 탔다. 대학시절 강의시간을 목전에 두고 가파른 언덕을 헉헉대며 올랐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기차에서 내려 학생들이 모여 있는 도서관 앞 광장을 향해 걸었다. 광장 한가운데에 서자 구시가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벤치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낮잠을 즐기거나 야외 테이블에 앉아 간단히 점심을 즐기는 학생들의 모습에서 대학생의 여유와 풋풋함이 묻어났다. 구시가지를 둘러보고 취리히 웨스트로 가는 기차를 타러 스타델호펜(Stadelhofen) 역으로 가는 길에 분수대를 발견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자 저절로 손이 갔다. 스위스는 수돗물의 수질이 좋아 분수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은 물론 수돗물을 바로 마셔도 된다는 현지 가이드의 말에 용기를 얻어 양손을 모아 물을 받아 마셨다. 처음에는 수돗물을 마시는 게 왠지 꺼림칙했지만 나중에는 달콤한 물맛에 반해 즐겨 마시게 됐다. 식당에서 주문을 받을 때도 생수를 마실 건지, 수돗물을 마실 건지를 묻는 게 자연스러웠다. 호텔 객실 탁자에도 수돗물을 마셔도 좋다는 쪽지가 놓여 있을 정도였다.
공업지대에서 문화와 예술, 쇼핑의 중심지로 떠오른 취리히 웨스트
과거에 산업지구로 번성했던 취리히 웨스트는 1980년대에 들어 산업이 쇠퇴하면서 쓸모 없는 공간으로 방치되었다가 현재는 문화와 고메의 중심지로 새롭게 거듭나는 중이다. 2000년, 스위스 최대 유통업체인 미그로(Migros)가 양조장 창고로 쓰이던 건물에 현대 미술 전시회를 연 것을 계기로, 조선소였던 쉬프바우(Schiffbau)에 공연장과 재즈 클럽, 고급 레스토랑이 들어서면서 취리히 젊은 이들 사이에서 ‘핫 스팟’으로 떠올랐다. 붉게 녹이 슨 철골구조물이 그대로 드러난 공간에 고풍스러운 샹들리에가 드리워진 레스토랑은 너무나 근사했다. 버려진 군수공장을 예술단지로 개조한 베이징의 따산쯔와는 또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취리히 동부와 서부를 가르는 빕킹어(Wipkinger)와 레텐(Letten) 고가는 새로운 쇼핑 중심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다리 밑의 빈 공간을 따라 옷과 인테리어 소품, 식료품 등을 파는 가게와 레스토랑, 대형 마켓이 들어서 있었다. 시멘트로 만든 다리가 아니라 19세기에 돌을 하나하나 쌓아 아치형으로 만든 다리여서 가게 안에 들어가도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천장이 높고 돌의 울퉁불퉁한 면이 그대로 드러나 동굴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마켓홀(Market Hall)은 파머스마켓과 마찬가지로 인근 지역에서 들여온 신선한 채소와 치즈, 와인 등을 합리적인 가격에 판다. 지은 지 백 년이 넘었지만 빕킹어 다리 위로는 여전히 기차가 쌩쌩 달리고, 레텐 다리는 산책로와 자전거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다리 위로 연결되는 계단을 따라 오르자 레텐 다리 위에 하나의 길이 나타났다. 다리 아래로 넓은 잔디밭과 울창한 숲이 우거진 공원이 내려다 보였다.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들의 모습이 마냥 행복해 보였다. 고가에서 내려와 역으로 향하는 길에 낡은 컨테이너박스를 쌓아 올린 독특한 건물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트럭을 덮는 천막과 안전벨트를 재활용해 패션 소품을 만드는 스위스 브랜드인 프라이탁(Freitag)의 매장이었다. 낡은 컨테이너박스 17개로 만든 매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브랜드의 정체성이 한번에 와 닿았다. 국내에는 가방 정도만 알려져 있는데 매장에 가보니 명함지갑부터 다이어리와 노트북 케이스 등 종류가 다양했다. 반호프 하르트 브뤼케(Bahnhof hard Brücke) 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스타델호펜 역에 내려 호텔이 있는 오페라하우스로 향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산책도 할 겸 라텐 강변을 따라 걸었다. 촉촉해진 밤공기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뿌옇게 번져 희미한 주황색 불빛이 밤거리를 가득 채웠다.
체험과 개발을 통해 자연을 보호하는 실발트 생태공원
다음 날, 아침 일찍 짐을 챙겨 기차역으로 향했다. 밤새 비가 내렸는지 가로수도, 길도 촉촉이 젖어 있었다. 기차역 로커에 짐을 맡기고 실발트(Sihlwald)로 가는 기차를 탔다. 20여분쯤 달렸을까, 기차는 나무로 지은 작은 역사 앞에 멈춰 섰다. 스위스의 첫 번째 네이처 파크인 실발트 네이처 디스커버리 파크(Zürich Sihlwald Nature Discovery Park)에 도착한 것이다. 스위스 정부는 보존가치가 높은 지역을 네이처 파크로 지정해 관리하는데 그 조건이 꽤 까다롭다. 대도시와 가까워야 하고 빼어난 자연풍광과 다양한 야생동물이 분포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총 23개의 네이처 파크 중 5개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자연유산에 일부 속해 있을 정도로 자연적인 가치가 높다고. 특히 이곳은 65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200년 이상 자란 고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자연의 숨결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역에서 걸어서 1분 거리인 공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수달의 서식지로 이동했다. 수달이 사는 강 지하에 수족관을 만들어 놓아 바로 눈앞에서 수달이 헤엄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생태학습에 많은 예산과 정성을 쏟는 이유를 묻자 생태교육담당자인 만다나 루츠파이커(Mandana Roozpeiker) 씨는 “야생을 체험함으로써 자연이 주는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보호해야될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답했다. 생태계 보전을 위해 개발 자체를 엄격히 제한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스위스는 ‘인간의 손길도 자연의 일부’라는 철학하에 생태계 보전과 지속 가능한 이용을 동시에 추구하는 ‘개발’을 지향한다. 자연을 가까이하고 경험해야 자연을 이해하고 그 소중함도 알게 된다는 생각에서다. 넓은 광장에서 장작을 피워 소시지를 굽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겨웠다. 공원 입구에서 30여분 정도 걸어가면 다양한 동물이 서식하는 생태공원에 닿는다. 곰, 비버, 멧돼지, 늑대, 삵 등 다양한 야생동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 동물원처럼 야생동물을 좁은 공간에 가두는 대신 광활한 면적의 서식지 주변에 울타리를 쳐서 최대한 자연에 가까운 조건을 조성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가문비나무와 너도밤나무 같은 활엽수가 빽빽이 들어선 숲길을 따라 걸으며 낮잠을 자거나 먹이를 먹는 자연스러운 모습의 동물도 관찰하고, 상쾌한 숲의 냄새를 맡으며 찬찬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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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뷰티 에디터 / 조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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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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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협조 | 스위스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