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8인의 지독한 열정 2
패스트 패션의 질주 속에서도 진득하니 자신의 감성으로 옷을 짓는 디자이너 8인의 성정을 들여다봤다. 그들의 패션을 향한 지독한 열정, 이번 시즌 옷 입기에 관한 매력적인 팁, 그리고 우리가 패션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기록했다.
‘쿠바의 재발견’ 최지형
쟈니해잇재즈의 최지형은 성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쇼룸에 걸린 옷 중에 입고 싶지 않은 옷은 단 한 벌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옷에서도 느껴졌다. 디자이너 최지형이 심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졌음을.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올해로 디자이너 4년 차가 됐어요. 바쁘게 달려온 시간 동안 정말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서야 조금씩 제 컬렉션의 전체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너무 신났어요. 그 기분이 이번 컬렉션에 고스란히 담겼죠.” 이번 시즌 최지형은 로맨틱한 음악과 춤이 있는 나라, 동시에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차가운 면도 지닌 나라, 쿠바를 자기만의 감성으로 풀어냈다. 철조망과 수류탄 프린트가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은 애시드 컬러의 색감으로 로맨틱하게 풀어냈기 때문이고, 군더더기 없이 떨어지는 그녀 특유의 테일러링 실루엣을 잘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멋졌다. 이번 가을/겨울 시즌부터는 서울시의 지원으로 파리 진출도 시작한단다. 클래식과 컨템퍼러리, 그 사이에서 옷을 맛있게 요리할 줄 아는 최지형은 한국 패션계의 유망주임에 틀림없다.
최지형이 꼽은 세 가지 유행 아이템
1 네온 컬러
사람의 기분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네온 컬러는 이번 시즌 꼭 도전해보길. 옷이 부담스럽다면 벨트나 구두부터 시작해도 괜찮다.
2 맥시 드레스
티셔츠처럼 생긴 간결한 실루엣의 맥시 드레스. 프린트가 가미되어 있어도 멋스럽다. 꾸미지 않은 듯하지만 분명히 특별한 멋이 있다.
3 프린트 스카프
손목에 뱅글이나 시계와 함께 두르거나 가방의 체인 스트랩에 꼬아서 연출하는 등 새로운 방식의 스카프 연출법을 추천한다.
‘야누스의 얼굴’ 홍혜진
테일러링을 즐기는 디자이너 홍혜진은 늘 남자와 여자의 옷 사이를 오간다. 그게 재미있어 약 2년 전부터는 남성 컬렉션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시즌에도 남성복의 클래식한 디자인 요소를 여성복에 차용하는 방식으로 디자인을 풀어나갔다. 여성복과는 달리 남성복에는 어떤 공식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 점이 홍혜진을 자극했고, 그녀는 턱시도, 스리피스 슈트, 프록코트와 같은 클래식한 남성복이 여성화되면서 풍겨내는 중성적인 매력에 착안했다. 남성복 패턴을 해체해 라펠, 포켓, 소매, 칼라 등의 디자인 요소를 테일러링이 강조된 여성복에 입혔고 날렵한 허리와 미니 실루엣을 유지하는 것으로 여성성도 놓치지 않았다. 요즘은 진짜 남성복을 입는 여자도 많다. 또 남성복처럼 보이는 보이프렌드 룩은 하나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그래서 홍혜진의 야누스적인 컬렉션에는 탐나는 옷이 많다. 트렌드를 먼저 내다 본 선견지명 덕분에 요즘 홍혜진의 의상은 제대로 물을 만났다.
체형별 보이프렌드 룩 소화하기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은 분명 다르다. 그래서 보이프렌드 룩을 즐길 때에도 주의해야 한다. 남성복을 꿰뚫고 있는 홍혜진이 그 스타일링 팁을 체형별로 친절하게 알려준다.
키가 작다면 와이셔츠나 턱시도 재킷과 같은 남성 아이템을 상의에만 연출한다. 이때 하의는 가늘게 연출하는 것이 멋스럽다.
통통한 편이라면 허리 라인을 잡아주는 것은 필수다. 전체적으로 매니시한 실루엣을 유지하되, 허리만큼은 꼭 가늘게 연출하자. 또 팔목이나 목 등 살갗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야 날씬해 보인다.
‘드레스 입혀주는 여자’ 강희숙
다른 여자를 아름답게 꾸며주는 건 강희숙의 가장 큰 몫이다. 내로라하는 톱 여배우들은 시상식 때마다 그녀의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을 밟는다. 레이스와 실크, 시폰, 시퀸 장식 등 화려한 디테일을 쓰지만 강희숙의 드레스에는 결코 과장된 멋이 없다. 대신 여자를 우아하고 고혹적인 향기로 물들인다. 이 점이 바로 디자이너 강희숙의 강점이다. 디자이너는 세월이 흐를수록 자신을 닮은 옷을 만든다. 살아온 환경, 정서, 감성 등이 섞여 자신만의 색깔을 지닌 옷으로 탄생하게 된다. 강희숙을 보면 이 말에 더없이 공감한다. 우아하고 고혹적인 향기는 그녀의 드레스에는 물론 강희숙 본인에게도 그대로 배어 있다. 그녀는 매일 한시간씩 운동을 하고, 양재동 디자인실과 청담동 사무실을 오가며 일을 하며, 일주일에 두세 번씩 그림을 그린다. 또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일부러 짬을 내어 여행을 떠난다. 주변엔 그녀를 따르는 친구가 많고, 그녀 역시 한번 맺은 인연은 오래도록 이어나간다. 이 건강한 삶이 디자인으로 옮겨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드레스를 좀 더 자유롭게 입었으면 좋겠어요. 꼭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드레스 입으면 기분 좋잖아요. 스스로 더 특별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 우리가 옷을 즐기는 건 그런 것 때문일 거예요.” 과거에 비하면 많이 변하긴 했지만 그녀는 여성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에 좀 더 용기를 내었음 했다. 그런 여성이 많아지면 드레스를 만드는 자신은 더없이 행복할 거라면서. 긴 드레스가 부담스럽다면 무릎 정도까지 오는 시폰 드레스에 턱시도 재킷을 걸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스럽다는 팁도 잊지 않았다. 자신을 가꿀 줄 아는 것이 나이와 상관없이 여자를 얼마나 근사하게 만드는 일인지, 강희숙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화이트 셔츠는 신비다’ 진태옥
가느다란 몸, 단아하게 모은 두 손,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부드러운 힘. 진태옥은 자신의 옷을 꼭 닮아 있다. 그녀가 만드는 화이트 셔츠는 더욱 그러하다. 20주년을 맞은 서울 SFAA컬렉션을 기념해 화이트 셔츠를 주제로 전야제 축하 쇼를 선보인 이번 시즌은 그녀에게도 특별했을 것 같았다. “6.25 전쟁 즈음 저는 고등학생이었어요. 그때는 입을 옷이 없어 오빠의 화이트 셔츠에 검은색 스커트를 입었죠. 아마 그때가 제일 처음으로 화이트 셔츠를 입었을 때일 거예요. 그런데 얼마 전 문득 거울을 봤는데 제가 화이트 셔츠에 검은색 스커트를 입고 있더군요. 그때 느꼈어요. 아, 내가 지금 이 모습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구나.” 진태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젊은 시절에는 최대한 많은 것을 흡수하려 노력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씩 버리는 노력을 하며 고통스러워 했는데, 깨끗한 화이트 셔츠 한 장을 걸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드디어 많은 걸 덜어냈구나 하는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화이트 셔츠의 멋은 그런 거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멋, 입는 사람이 품은 아름다움에 따라 달라지는 멋 말이다. 그래서 진태옥은 ‘화이트 셔츠는 신비다’라고 표현한다. 그러곤 나에게 권한다. 화이트 셔츠를 잠옷으로 한 번 입어보라고. 남자의 것처럼 큼직한 실루엣으로 된 면 화이트 셔츠를 입고 잠들면 스스로가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모른다고 했다. 잠자는 순간에도 자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진정한 패션이란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진태옥은 내가 만난 사람중 가장 열정적이다. 특히 패션에 있어서는 혈기왕성한 후배 디자이너들도 따라올 자가 없다. “나에게 있어 패션이란 호흡, 생명과도 같은 것이며 내 존재 자체를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영혼이 메마르기 전까지 디자인을 계속할 겁니다.” 나지막이 울린 그녀의 말에 소란하던 촬영 공간이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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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박선영
- 포토그래퍼
- 오중석
- 스탭
- 메이크업 /이준성, 헤어 / 예원상, 어시스턴트 / 정이나, 헤어&메이크업| 지선, 토미(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