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의 콤비 혹은 페르소나

감독과 배우의 관계는 결혼 제도가 없는 세계의 계약 커플 같다. 작품을 만들 때마다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커플이 탄생한다.

감독과 배우의 관계는 결혼 제도가 없는 세계의 계약 커플 같다. 작품을 만들 때마다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커플이 탄생한다. 누군가는 두 번, 세 번 다시 만나고 누군가는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욕을 하면서도 다시 만나고 누군가는 칭찬하면서도 다시 만나지 않는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진하고 오랜 관계, 우리는 이들을 콤비라 부르고 감독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배우를 페르소나라 칭한다.

나홍진 감독은 겨우 두 번째 영화로 자신의 페르소나를 두 명이나 만들어놓았다. <추격자>에서 최고의 호흡을 보였던 띠동갑 배우 하정우와 김윤석이 다시 <황해>에서 쫓고 쫓기는 남자들로 출연했다. 스태프들이 고생하기로 악명 높은 나홍진 감독의 영화에 두 배우가 별다른 고민 없이 출연을 결정한 것은 징글징글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끈끈한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감독과 배우는 계약 커플이긴 하지만 결국엔 연인이고 친구이기에 앞서 동업자에 가깝다.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감독은 최대한 배우를 굴리고 또 굴려야 한다. 감독 입장에서 자신의 페르소나가 좋은 건 툭 건드리기만 해도 알아서 잘 굴러간다는 것,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어려운 길로 굴러가 준다는 것이다. 하정우는 나홍진 감독에 대해“ 서로 잘 알기 때문에 극한의 단계까지 실험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11개월간 죽도록 굴렀지만 하정우는 나 감독에 대해 칭찬일색이었다. 동업의 기본은 믿음이다. 찰떡콤비란 끈끈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관계다. 윤제균 감독과 하지원이 그런 관계다. <색즉시공>으로 큰 성공을 거뒀던 윤제균 감독이 <낭만자객>의 실패로 무너졌을 때 하지원은 두 말 않고 <1번가의 기적>에 출연했다. 이후 윤 감독은 사석에서도 수차례 하지원에 대한 고마움을 표한 바 있다. 결국 두 사람은 <해운대>로 1000만 신화를 이뤄냈다. 김지운 감독과 이병헌은 지향하는 바가 뚜렷이 일치하기에 별 수 없이 반복적으로 작업할 수밖에 없는 콤비 관계다. 김 감독은“ 배우의 표정 변화가 없는 애니메이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배우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클로즈업에 담기 좋아하는 감독이다. 이병헌은 국내 미남배우 중 독보적인 연기력을 자랑하는 배우다. 흔히 말하는‘ 자타공인’이다. <달콤한 인생>에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까지 김지운 감독이 이병헌을 캐스팅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매력적인 외모 그리고 눈빛과 표정 연기다.

감독과 배우의 콤비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인 감독이 무턱대고 남의‘ 페르소나’를 넘보다가 무너지기도 한다. A감독과 오랜 기간 함께해온 연기파 배우 B씨는 최근 신인감독 C의 영화에 출연했다가 촬영 기간 내내 갈등을 빚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콤비 관계는‘ 선수’들만이 즐길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딱히 페르소나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최고의 선수들은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최상의 게임을 만들어내곤 한다. 대한민국 모든 감독이 캐스팅하고 싶어하는 송강호는 박찬욱과 봉준호의 영화에 단골 출연한다. 박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박쥐> 그리고 봉 감독의 <살인의 추억> <괴물>에 이어 <설국열차>에 출연할 예정. 감독과 배우의 변화에 따라 콤비 관계가 바뀌기도 한다. 정재영은 한때 장진 감독의 페르소나였지만 이제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이끼>와 <글러브>에 연달아 출연하고 있다. 설경구는 이창동 감독과 강우석 감독의 영화에 집중적으로 출연했지만 요즘은 뜸한 편이다. 감독과 배우 사이에 느껴지는 권태기는 종종 영화와 관객의 그것으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이준익 감독과 정진영의 경우처럼 빈번한 동업 관계를 10년 가까이 이어가는 경우가 그리 흔하지 않은 건 이러한 이유에서다.

해외 영화계에도 감독과 배우의 찰떡콤비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미후네 도시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과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로버트 드니로, 레오 카락스 감독과 드니 라방, 장 뤽 고다르 감독과 장 폴 벨몽도 등 2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리들리 스콧과 러셀 크로, 토니 스콧과 덴젤 워싱턴, 팀 버튼과 조니 뎁, 왕가위와 양조위 등은 이제 전속 관계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오랜 기간 자주 손을 잡고 있다.

2011년 극장가에도 단짝 콤비들의 끈끈한 밀월관계를 볼 수 있는 영화가 줄줄이 개봉한다. 이준익 감독은 <황산벌>의 정진영과 다시 손잡고 <평양성>을 내놓았고, 강우석 감독은 자신의 새 페르소나 정재영과 <글러브>를 만들어 1월에 공개한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로 쏠쏠한 재미를 봤던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조니 뎁을 성우로 기용해 애니메이션 <랭고>를 만들어 3월에 선보일 예정이다. 왕가위 감독이 양조위와 다시 손을 잡은 <일대종사>, 시리즈 영화라 딱히 콤비라고 말하긴 애매하지만 마이클 베이 감독과 샤이아 라보프가 다시 뭉친 <트랜스포머 3>도 2011년의 기대작이다.

    에디터
    고경석(아시아경제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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