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특구, 한남동
30여 팀의 아티스트가 전시를 열었다
아티스트가 사는 동네는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티가 난다. 담벼락에 그라피티가 그려 있고, 소규모 갤러리와 아트 서점이 자주 눈에 띄며, 동네 카페와 바에서는 독특한 패션 스타일의 아티스트를 흔히 만날 수 있다. 이토록 크리에이티브하고 자유로운 동네의 분위기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그래서 아티스트가 사는 동네는 금세 집 값이 오른다. 1990년대의 소호가, 2000년대의 베를린이, 그리고 현재 윌리엄스버그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안타까운 것은 집값이 오르면서 아티스트의 동네에 아티스트는 사라지고 장사꾼만 모인다는 점이다. 사실 물 건너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젊은 인디 아티스트들의 동네였던 홍대 앞도 특유의 크리에이티브한 분위기로 인기를 얻자마자 옷가게와 카페, 레스토랑이 즐비한 ‘예술적인 분위기를 파는 거리’로 바뀌지 않았나. 그 덕에 홍대 근방에 살던 국내 젊은 인디 아티스트 상당수가 문래동으로 이주했다. 예술인의 작업실이 몰려 있는‘문래동 예술촌’은 그렇게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인 것은 문래동만큼은 아직 상업화에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 아직은 아티스트가 머물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폐공장을 개조한 작업실에서실험적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남동이 아트 특구로 지정되었다. 아티스트, 디자이너, 사진가, 설치예술가, 트렌드세터 등 예술적 영감을 인정받은 30여 개 팀이 한남동으로 몰려든 것. 빈 가옥 6채를 공간 디자인해 선보이는 ‘인 한남’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한남동의 빈 집 6채가 30개의 갤러리로 새롭게 태어난 셈이다. 이는 디자인 업계의 거장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디자인 코리아 2010>의 일환으로, 디자인의 무한 가능성을 재미있게 제시하는 이벤트로 기획됐다. 빈 집이 아트 작품으로 완성되는 과정의 묘미를 살린 ‘21C형 아티스트 라이브쇼’라고 할까?
한남동 51-1번지에는 설치미술가 로리킴이 한복 천으로 동양적 공간을 창조해냈고, 세라믹 디자이너 김하윤은 하얀 공간에서 세라믹 조형물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68-13번지에는 모션 그래픽 팀 DUDE가 감각적인 음악과 함께 비디오 아트를 선보였고, 크리에이티브 디자인 컨설팅 기업 DAREZ가 화이트 가구와 털실을 이용해 독특한 이미지로 관객들을 환기시켰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구경한 집은 31-4번지였다. 라인 테이프를 이용한 공간 디자이너 강선미가 흑백의 컬러링만으로 재창조한 공간은 방을 들여다보는 순간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한다. 현대사진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 고상우는 보디 페인팅과 퍼포먼스를 병행하면서 이것을 사진으로 기록해 보여준다. 강렬하면서도 활기찬 컬러가 뿜어내는 에너지가 보통이 아니다. 선명한 컬러로 독특한 감성을 만들어내는 추상회화가 하태임의 방은 그녀 특유의 컬러들로 넘쳐난다. 벽과 바닥 전체를 화폭 삼아서 산뜻하게 컬러링한 그녀의 방은 유쾌한 감동을 준다. 배우 구혜선의 작품도 31-4번지에 있다. 최근 작가급 실력의 일러스트 작품으로 전시를 연 바 있는 구혜선은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방을 디자인했다. 이 외에도 디자이너 빈&민규의 짚으로 만든 의자가 있는 31-5번지, ‘윈도 페인트’라는 새로운 아트 분야를 만들어 활동 중인 나난이 윈도 페인팅을 선보이는 51-3번지도 전혀 새로운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한남인’ 프로젝트의 재미는 작품을 설치한 집을 투어하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멕시코 대사관 뒤쪽에 위치한 51-1번지, 68-13번지, 31-3번지 등 아티스트들이 꾸민 집을 찾아가는 동안 한남동 구석구석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한남동 뒷골목의 가구숍, 카페, 맛집 등 일상의 공간과 맞닿아 있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 공간은 12월 30일까지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이 거리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예술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일본 나오시마 현의 시코쿠섬이나 북경 다산쯔의 모습이 떠오른다. 예술과 일상이 자연스럽게 융합되었다는 점에서 무척 비슷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지막 질문. 한남동 지리도 모르는데, 번지수로만 집을 찾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한남동이 괜히 아트 특구로 지정되었겠는가? 한남동 거리 곳곳에 안내 표지판을 설치한다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거리 곳곳에서 한남 가이드 맵도 나눠준다.
- 에디터
- 박훈희
- 포토그래퍼
- Desink Korea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