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큼 여기 어울리는 사람은 없어
정유미는 데뷔 7년차를 맞았다. 그 7년 동안의 필모그래피가 그해 개봉한 좋은 영화 리스트와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 잘될 작품이 아니라 좋은 작품에 욕심 내는 배우가 있어서 영화계는 더 다채로워졌다. 눈이 촉촉해서 우는가 보다 싶으면, 금세 해사한 미소를 짓는 순도 100%의 배우. 작년 한 해에만 5편의 영화를 스크린에 올린 그녀에게, 영화 속 대사를 빌려 말해주고 싶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새해도 잘 부탁합니다.
ALLURE 인터뷰와 촬영 울렁증은 여전한가요?
정유미 좀 나아졌어요! 작년은 개봉 영화가 많아서 태어나서 말을 가장 많이 한 해였어요. 그래서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요. 인터뷰를 할 때는 아무것도 먹지 않거든요.
ALLURE 알고 보면 한 해에 무려 5편의 영화의 주연을 맡은 저력의 배우죠. 특히 <내 깡패 같은 애인>이 아주 반응이 좋았잖아요.
정유미 관객수로만 따지면 <차우>가 훨씬 잘된 영화였지만 <내 깡패 같은 애인>이 좀 더 직접적으로 다가왔어요. 관객수가 100만이 넘었는데, 손익분기점도 넘었거든요. 그 영화로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길에서 저를 알아보는 영화팬이 훨씬 많아졌어요.
ALLURE ‘88만원’ 세대나 ‘이태백’ 같은 사회적인 문제를 따뜻하게 그려내서, 관객들이 많이 공감했죠.
정유미 내가 느끼고 연기한 것보다 더 진짜같이 영화를 봐주셨다는 게 신기했어요. 영화의 결말이 비현실적이잖아요. 그렇지만 그 부분을 지적하기보다 절 살려줘서 고맙다는 리뷰가 많았거든요.
ALLURE 좋은 필모그래피를 여럿 가졌지만, 그 중 각별하게 의미를 두는 작품이 있겠죠?
정유미 음, 관계자분들과 다 잘 지내고 있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아마도 <사랑니>가 없었다면 여기 없었겠죠. 제겐 특별한 작품이에요.
ALLURE <조금만 더 가까이>의 은이는 마치<사랑니>의 조인영이 성장한 느낌이었어요.
정유미 그렇지만 눈빛이 달라요. 온전히 그 캐릭터가 되어서 연기한 적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얼마 전에 우연히 <사랑니> 때의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이건 내가 아니라 조인영이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잊었던 모습, 그때의 기분이 떠올랐어요. 이 사진이 우연히 다시 제게 와줘서 좋았어요
ALLURE 작년 이맘때쯤엔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죠? 크리스마스에 촬영했으니 딱 1년 전이네요.
정유미 크리스마스에 일을 할 거란 생각은 잘 안 하잖아요. 그런데 홍상수 감독님이 전화해서는, “해야겠다”하시는 거예요. 원래 친구들과 약속이 있었던 터라 투덜대면서 촬영장에 갔는데, 막상 일하면서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함께 있다는 게 정말 좋았어요. 밤새 촬영하고 스태프들과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하는데, 그날은 정말 크리스마스 날이었던 거예요.
ALLURE 작가주의 감독과 작업을 많이 하는데, 어렵거나 힘들진 않아요?
정유미 홍 감독님도 그렇고, 정성일 감독님도 그렇고 대부분 감독님들이 굉장히 자상해요. 특히 감독님들이 대사를 너무 잘 써주셔서 고마워요. 홍 감독님의 경우엔 대본을 아침에 휙휙써서 주는데, 그렇게 금방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아요. 요즘은 대사에 많이 기대게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기로 칭찬을 받았다면,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좋은 대사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곤 해요.
ALLURE 좋은 대사를 좋은 연기로 표현하는 것이 재능이죠.
정유미 난 그냥 영화 속에 있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현장에 가는 것뿐이거든요. 작년 한 해는 연기에 대한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가끔은 울타리 안에서 산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칭찬에 의미를 두면 큰일 나겠다 싶기도 해요. 저를 모르는 분들이 훨씬 많을 테니까요.
ALLURE <조금만 더 가까이>는 2009년에 촬영한 작품이 작년 가을 개봉했죠. 역시 2009년에 촬영한 <카페 느와르>는 드디어 12월 31일에 개봉해요. 개봉이 미뤄지곤 하는 상황이 스트레스가 되지는 않아요?
정유미 별로 신경 쓰진 않지만, 예상과 너무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이 재미있긴 했어요. <내 깡패 같은 애인이> 5월에 개봉을 했고, 전주영화제나 부산영화제 가겠지? 싶었다가 생각지도 못한 <옥희의 영화>가 9월에 개봉을 했죠. 언제 보려나 싶었던 <조금만 더 가까이>가 11월에 개봉했을 땐, 조금만 더 있다가 인사드리고 싶은데 내가 너무 자주 나오는 거 아니야 싶었어요. 12월엔 <카페 느와르>가 개봉하고요. 우연히 개봉이 작년에 다 모이게 되었어요. 모르는 사람은 진짜 바빴겠다고 하는데 사실 2010년은 촬영장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 안 된 해였어요.
ALLURE <조금만 더 가까이의> 김종관 감독은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라는 전설적 단편 영화로 당신을 데뷔시킨 주인공이기도 하잖아요. 이 영화는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었고요.
정유미 쓰고 보니까 제 생각이 났대요. 시나리오를 읽고선, “뭐예요, 이거. 여주인공이 왜 이렇게 됐어요.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여자애가 짝사랑만 하다가 미쳤나 봐.”라고 했었어요. 재미있었어요, 역할은.
ALLURE 평소에 보면 패션 스타일도 좋은데 다만 늘 수수한 역을 맡으니 영화 속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죠. 그래서인지 <조금만 더 가까이>의 차도녀 의상과 스모키 메이크업이 인상적이었어요.
정유미 <내 깡패 같은 애인>의 옷은 감독님이랑 의상팀이랑 진짜 열심히 고른 건데. <조금만 더 가까이>는 제가 해본 메이크업 중에서 가장 진해요. 촬영하는 딱 나흘 동안만.
ALLURE 나흘 만에 영화가 만들어지다니, 놀라운걸요.
정유미 <옥희의 영화>는 6일, <조금만 더 가까이>는 4일 찍었어요.
ALLURE <옥희의 영화>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레드카펫도 밟았죠?
정유미 원래 안 가려고 했는데 감독님이 “<옥희의 영화>인데 옥희가 안 가면 되니?”라고 하셔서 같이 가게 되었어요. 딱 하루 공식 일정이 있었는데 영화제 마지막 날이었거든요. 나머지 시간은 베니스 시내와 리도섬에서 동네 마실 다니면서 쉬었어요. 맛있게 먹고, 수영하고, 공 차고, 과일 차에서 과일을 사서 돗자리 깔아놓고 먹으며 멋진 하루를 보냈어요. 나중에 나중에 생각해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요.
ALLURE 홍상수 감독은 유럽이 사랑하는 감독이잖아요. 영화제에서 그런 분위기를 느꼈어요?
정유미 감독님 덕분에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기분이 들긴 했어요. 그리고 웃는 포인트가 비슷하다는 게 신기했어요. 영어와 이탈리아어로 두자막이 동시에 나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웃는 장면에서는 다른 나라 사람들도 다 웃더라고요.
ALLURE 처음부터 당신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 제법 있죠? 감독으로 첫 데뷔를 하는 평론가 정성일도, 처음부터 정유미 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말하더군요.
정유미 그런 게 행운인 것 같아요. 정말 좋은 감독님들만 만났고, 감독님들이 자기 색깔이 잘 보이는 작품을 하잖아요. 제 연기에 그런 게 있다면 모두 그 분들과 함께해서 그렇게 보이는 걸 거예요.
ALLURE 영화배우들도 연기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죠. 당신을 두곤 본능적으로 연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연기 동선을 표시해도, 그런 걸 무시해서 카메라가 정유미를 쫓아다닌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고요.
정유미 그걸 장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이야기는 과장된 부분이있어요. 항상 그럴 수가 없는 게, 어떨 땐 카메라 안에 갇힐 수도 있고, 또 이 이야기를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하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ALLURE 마치 만화 <유리가면>의 천재 주인공을 떠올리게 하는 에피소드니까요. ‘타고난 재능’이란 무엇보다 멋지잖아요.
정유미 일부러 그런 연기를 요구하는 감독도 있었어요. 그럴 때면 그건 그 상황이라서 가능했던 거라고, 속으로만 말해요. 좋게 봐주신 건 좋지만 그건 튀어나오는 거거든요. 감독의 디렉션에 따라 연기했는데, 제가 순간 그걸 잊었고 다른 연기가 튀어나왔고, 그걸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던 감독, 스태프들을 통해 이야기가 나오고, 기사화된 것뿐인데 너무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아마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대신 글로써만 연기를 읽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ALLURE 올해로 배우 7년 차죠. 무슨 생각이 들어요? .
정유미 배우도, 감독도, 현장도 다 다른 환경에 나를 자연스럽게 맡기는 것 같아요. 올해는 조금 더 편해진 것 같긴 하지만, 7년 동안 같은 고민을 한 것 같아요. 다른 생각 안 하고 연기를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잘하는 건진 잘 모르겠고. 늘 그게 고민이었어요.
ALLURE 그걸 찾아가는 게 배우의 과정이겠죠?
정유미 네. 맞아요. 연기자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럴 것 같아요. 살아가면서 하는 고민. 비슷한 거 아닐까요. 배우는 다만 그걸 좀 더 여러 번 연기하면서 살고요. 연기는 꼭 인생 공부를 하는 것 같아요.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니까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버겁지만, 일을 많이 하는 친구들에 비하면 전 아무것도 아니죠.
ALLURE 하지만 시트콤을 하고 싶다니 의외예요. 드라마를 하긴 했었지만, 당신은 늘 ‘영화배우’라는 인상을 주거든요.
정유미 시트콤은 다양한 걸 해보고 싶다는 뜻에서 한 말이에요. 드라마는 초반엔 힘들었지만 나중에 정말 재미있었어요. 드라마를 하면서 ‘순간집중력’을 기른 것 같아요. 대본이 1주일에 두 편 분량씩 나오고, 뒤죽박죽 순서로 찍고, 웃다가도 바로 울어 하면 울어야 했는데 나중에는 시간에 순서에 따라 찍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어요. <그녀들의 방>이라는 독립영화는 제작비가 정말 부족해서 되는 대로 뒤죽박죽 찍었는데, 만약 드라마를 하지 않았더라면 적응 못했을 거예요.
ALLURE 부쩍 성숙해진 것 같아요. 마치 연애를 하고 난 여자처럼.
정유미 모태 솔로라서 연애 얘기는 몰라요. 하지만 영화를 통해서 잠깐잠깐이지만 그 사랑 이야기의 순간들을 나눴기 때문에 내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해요. 이런 이야기하는 거 참 부끄럽긴 한데, 대학교를 졸업하고선 연애를 못했어요. 짝사랑만 해봤지, 누군가와 손을 잡고 다니는 일이 없었어요. 하지만 내가 찍은 영화들 속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감정의 교류가 있잖아요. 그 순간이라도 경험하고, 생각을 하고, 어떤 느낌일지 상상을 하게 되는 게 제겐 연애 같아요.
ALLURE 지금까지의 캐릭터를 관통하는 게 있다면, 순수함이었다고 생각해요. “헤픈 게 나쁜 거야?”라는 대사를 말할 때조차도요.
정유미 단막극 <위대한 개춘빈>을 찍으면서는 연기를 처음 했던 순수함을 느꼈는데, 항상 그런 기분이면 좋겠어요. 예지원 언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요. 박희순 오빠도, 예지원은 10년 전에도 똑같았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지금이 좋고, 특별히 원하는 건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에 귀를 기울이고 잘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어요. 어떻게 보여지느냐는 두 번째인 것 같아요.
ALLURE 최근 영화들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어요? 새해를 맞은 정유미에게 해주고 싶은 말.
정유미 <옥희의 영화>는 예고편을 특히 여러 번 봤는데, 내레이션이 유독 기억나요. “이 인생이라는 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그리고 <내 깡패같은 애인>에서는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대사. 이 대사는, 정말 마지막 크랭크업 날에 촬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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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허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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