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에디터의 문화생활
지난 한 달 동안 밀라노와 서울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평범한 관람객이 되어서 전시회를 보다가도 어느새 패션 에디터의 감상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래서 아예 두 개의 감상문을 적었다. 하나는 평범한 관람객의 시각으로, 다른 하나는 패션 에디터의 시각으로.
SWAROVSKI ON STAGE
평범한 관람객의 시각 <오즈의 마법사>에서 주디 갈란드가 신었던 루비 슬리퍼, <물랑루즈>에서 니콜 키드먼의 화려한 목걸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메릴 스트립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던 반지. 영화 속의 바로 그 주얼리가 모두 스와로브스키의 컬렉션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007 네버다이>의 할리 베리와 <라르고윈치>의 멜라니 티에리, <오페라의 유령>의 에미 로섬등 스와로브스키를 사랑한 여배우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다. 아름다운 영화 장면과 함께한 스와로브스키의 전시가 단 하루뿐이라는 건 좀 아쉽다.
패션 에디터의 시각 이 전시에서 볼 수 있었던 컬렉션은 스와로브스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다니엘 스와로브스키 컬렉션이다. 가슴을 온통 뒤덮는 거대한 목걸이와 화려한 왕관과 클러치뿐만 아니라 레드 카펫에 종종 등장하는 스와로브스키의 드레스가 바로 이 컬렉션의 제품이다. 스와로브스키가 주얼리뿐만 아니라 우아하고 화려한 드레스도 만든다는 건 알았지만, 마릴린 먼로가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 축가를 부르던 그 유명한 장면에 등장했던 크리스털 드레스의 그 크리스털이 스와로브스키의 것일 거라곤 짐작도 못했다.
장소서울 한남동 그랜드 하얏트
전시 일자10월 5일
프레스 키트 프레스
평범한 관람객의 시각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전시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프레스 키트 프레스’는 소비자가 책을직접 만들 수 있게 재료만 제공하는 좀 다른 형태의 출판사다. 이들이 전시해둔 지침서를 보고 따라 하기만 하면 책 한 권을 뚝딱 만들 수 있다. 조립용 장난감을 만드는 것처럼.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절대 귀찮다는 이유로 이런 출판사를 만든 것은 아니다. 제작의 기쁨을 구매자에게 양도하기 위해서 그들은 절대 완성품을 취급하지 않는다.
패션 에디터의 시각 도산공원 골목에 위치한 플랫폼 플레이스는 독특한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들에게 전시 공간을 내준다‘. 플랫폼 플레이스 629’라는 프로젝트를 정기적으로 진행하는데, 629는 이 공간이 1년에 6번, 2주 동안, 하루에 9시간 열려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1년에 여섯 명 혹은 그룹의 전시가 열린다. 프레스 키트 프레스는 이‘ 플랫폼 플레이스 629’의 세 번째 전시다. 이 전시를 연 출판사‘ 프레스 키트 프레스’는 책을 팔지는 않고, 책을 만드는 것을 도와준다. 나도 책(의 내용만)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진짜 책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데, 마감이 끝나고 이들의 도움을 좀 받아봐야겠다.
장소 서울 신사동 플랫폼 플레이스
전시 일자 10월 21일까지
IL SEGNO ALFA
평범한 관람객의 시각 시동 거는 소리만 듣고 귀신같이 차의 브랜드를 알아맞히는 사람들도 있다지 만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나처럼 차에 무지한 사람에게도 이 전시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전시는 1910년대부터 2010년까지를 10년 단위로 나누어서 알파 로메오의 대표적인 자동차를 전시하는 형식이었는데, 이 공간에는 자동차 외에도 그 시대의 정황을 포착할 수 있는 몇 가지 다른 요소들이 있었다. 자동차 옆에 그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가 상영되고, 또 다른 한쪽 벽면에는 그 시대의 살림살이가 놓여 있었다. 이런 독특한 방식 덕에 한결 입체적이고 풍성한 전시가 완성되었다.
패션 에디터의 시각 알파 로메오의 전시장에서 본 빈티지 자동차들은 운전할 생각이 전혀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설레게 했다. 그 중 제일 마음에 든 건 1920년대의 하얀 자동차. 이유는 요즘 나의 뮤즈인‘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롱 스커트를 입은 여인’과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에.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긴 벽을 따라 알파 로메오의 시대별 광고 포스터가 걸려 있었는데, 그 중 몇몇 작품은 패션 브랜드의 광고라고 해도 손색없을 만큼 아름다운 차림의 여인들이 등장해서 눈여겨봐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 전시를 보고 걸어 나오는 길에는 알파 로메오의 자동차가 유난히도 눈에 많이 띄었다.
장소Triennale di Milano, Viale Alemagna, 6
전시 일자 10월 10일까지
LORETTA LUX
평범한 관람객의 시각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새하얀 갤러리의 창 너머로 파릇한 나무가 보였다. 그 공간에 로레타 룩스가 찍은 ‘그림 같은 사진’이 걸려있었다. 여느 갤러리의 인공 조명 대신 자연광이 만든 아름다운 분위기는 로레타 룩스의 비현실적인 사진과 묘한 긴장감을 형성하며 그야말로 비현실적으로 어울렸다. 이 갤러리의 주인인 소차니 여사는 이 사실을 진작 눈치 챘을 것이다. 이 공간에서 보낸 시간이 밀라노에서의 가장 아름다운 찰나였다.
패션 에디터의 시각 그림도 그리는 사진가여서 그런지 그녀의 작품은 그림과 사진의 애매한 경계에 있다. 이번 전시는 그녀가 즐겨 작업하는 ‘무서운 어린이’ 시리즈. 여기 등장하는 창백한 얼굴의 어린이들은 세련된 공포영화의 주인공 같다. 게다가 전혀 어린이답지 않게 세상 모든 일에 관심 없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 이건 화보 촬영을 할 때마다 내가 모델에게 요구해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 바로 그 눈빛인데…. 언젠가 그녀를 만나면 꼭 물어보겠다. 도대체 뭐라고 꼬드기면 어린이들도 이런 눈빛 연기를 하는 거냐고.
장소 Corso Como 10, Milano
전시 일자 10월 31일까지
INSIDE PAUL SMITH
평범한 관람객의 시각 패션 에디터가 아니더라도 폴 스미스는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디자이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사생활도 궁금하다. 그가 열한 살 되던 해에 아빠에게서 선물받은 코닥 레티네트 사진기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사진으로 일기를 쓴다는 것,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과 셰퍼드 페어리의 포스터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미술 작품을 수집한다는 것, 그리고 전 세계의 팬으로부터 온갖 신기한 물건을 선물 받는 것. 이 전시를 보면 이런 시시콜콜한 폴 스미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패션 에디터의 시각 요즘 패션 디자이너는 옷 만드는 데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톰 포드가 영화를 찍고, 칼 라거펠트가 연기를 하는 동안 폴 스미스는 사진을 찍거나 예술작품을 사 모으며 여가 시간을 보낸다. 전시장 한쪽에서 상영되던 그의 인터뷰에서 그는 코너 헤링턴의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클래식한 옷 어딘가에 즐거운 요소를 숨겨두는 폴 스미스의 옷과 전형적인 그림에 펑키한 장치를 하는 코너 헤링턴의 작품은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장소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림미술관
전시 일자 11월 28일까지
TOD’S & TEATRO ALLA SCALA
평범한 관람객의 시각 1778년에 개관한 유서 깊은 라 스칼라 극장의 댄서들이 토즈의 고미노 슈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춤으로 재현했다. 라 스칼라의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들이 표현한 몸짓에는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토즈의 슈즈를 만드는 장인들에게서도 느껴지는 숭고함 같은 것 말이다. 특히 일렬로 늘어선 수십 명의 댄서가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장면은 어떤 발레 공연을 볼 때보다 압도적인 순간이었다.
패션 에디터의 시각 토즈만큼 예술에 관심이 많은 패션 브랜드도 드물다. 독특하고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 예술가에게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빌려주는 사루비아다방과 런던의 화이트채플 갤러리, 밀라노의 현대 미술관, LA현대미술관에 이어 이번에는 라 스칼라 극장을 후원하기로 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토즈와 라 스칼라 극장의 댄서들이 아름다운 영상물도 만들었다. 라 스칼라 극장이 패션 브랜드와 함께 어떤 작업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데, 콧대 높은 라 스칼라 극장도 예술을 사랑하는 토즈에게 마음을 움직였나 보다.
장소 Via Savona 56, Milano
전시 일자 9월 23일
없음
평범한 관람객의 시각 전시회 제목은 ‘없음’. 제목과 달리 전시장에는 커다란 숫자 모양도 있고, 복잡하게 늘어놓은 전선도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가가 임의로 고른 책의 뜬금없는 대사로 연기를 하는 배우의 영상, 서울 근교에서 채집한 일상의 소리를 믹싱한 사운드 작업물 등의 소리가 뒤섞인다. ‘없음’은 작가가 이 전시에 어떤 방향성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뜻. 작가가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고 설치해둔 작품은 더 다양하고 자유로운 교류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패션 에디터의 시각 안쪽 방에서는 바위처럼 보이는 라디오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서 여러 나라의 라디오 방송이 정신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한 DJ가 누군가와 인터뷰를 한 후에는 서아시아 혹은 동유럽의 어느 나라 노래인 것 같은 민속적인 음악이 흘러 나왔다. 그러고 보니 밀란 컬렉션 기간 중에 들른 안토니오 마라스의‘I’m Isola Marras’ 프레젠테이션에서도 이와 비슷한 노래를 들었다. 요즘 아티스트들은 이런 민요풍의 노래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
장소 서울 신사동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
전시 일자12월 5일까지
YUKI ONDERA
평범한 관람객의 시각 유키 오노데라의 사진은 일상적인 것을 소재로 하지만 뭔가 다른 포인트가 하나씩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축구 경기 장면을 캡처한 후에 축구공의 위치만 바꾼 ‘Watch your joint’ 시리즈. 반짝이는 아이디어 하나면 이렇게 위트 있는 작품이 된다.
패션 에디터의 시각 사실 이 전시를 보러 간 이유는 하늘에 옷이 떠 있는 것 같은 사진 시리즈 ‘Portrait of Second-hand Clothes’를 보고 싶어서였다. 작가는 헌 옷을 자신의 아파트창문에 걸어놓고 하늘을 배경으로 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냥 하늘 배경이 예뻐서 이런 사진을 찍은 건 아니다. 이 옷들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가 1993년 파리 전시에서 사용한 죽음의상 징이었는데, 옷에 죽음 대신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삼았다.
장소 서울 송파구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
전시 일자12월 4일까지
RALPH FLECK, PAINTING
평범한 관람객의 시각 도산공원 앞을 지날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커다란 창에 얼굴 없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앉아 있는 그림이 걸렸다. 랄프 플렉의 8가지 테마 중 하나인‘ Figure’ 시리즈. 이번 전시에서는 파리의 풍경을 담은‘ Cityscapes’, 책장을 발랄한 색으로 그린‘ Still Life’ 시리즈 등도 볼 수 있는데, 그는 이 일상적인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일단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사진을 참고해서 그림을 그리지만, 사진과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상상을 통해서 또 다른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것 같다.
패션 에디터의 시각 313 아트 프로젝트에 랄프 플렉의 그림이 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별 생각 없이 그림을 보고 있는데, 프린트해서 옷으로 만들면 참 예쁘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몹쓸 직업병은 수시로 발동한다. 어쨌든 그래서 이 전시를 보러 갔다. 전시를 보는 내내 느낀 것은 무엇보다 살짝 빈티지한 느낌이 드는 색감의 조합이 근사하다는 것.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의 해변시리즈는 실크에 프린트해서 셔츠로 만들면 참 예쁠 것 같다.
장소 서울 신사동 313 아트 프로젝트
전시 일자 11월 30일까지
GHERARDINI, CELEBRATING 125 YEARS OF STYLE
평범한 관람객의 시각 빈티지한 로고가 뭔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 아무 배경지식 없이 충동적으로 전시장에 들어섰다. 짐작처럼 게라르디니는125년이나 된 역사적인 브랜드이고, 이 전시는 게라르디니 125주년을 기념하는 일종의 회고전이다. 그냥 쓱 한번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유물처럼 보이는 진귀한 백들을 보고선 마음을 고쳐먹고 차례차례 찬찬히 감상했다. 우연히 발견한 보물 같은 전시 덕분에 밀라노에서의 즐거운 기억이 하나 더 보태졌다.
패션 에디터의 시각 역시 유행은 돌고 도는 건지 게라르디니의 125년 아카이브 안에서 최근 몇 년 동안 유행했던 거의 모든 백의 흔적을 찾았다. 몇 시즌전에 유행했던 토트백, 이번 시즌의 네모난 숄더백, 요즘 푹 빠진 클러치백의 모습도 발견했다. 이 훌륭한 빈티지 컬렉션은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패션하우스의 컬렉션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이렇게 훌륭한 아카이브를 가진 브랜드가 왜 생소한 이름이 되어버렸는지 씁쓸한 기분도 잠시 들었다.
장소 Triennale di Milano, Viale Alemagna, 6
전시 일자 9월 26일까지
PINEL & PINEL
평범한 관람객의 시각 꼬르소꼬모 2층으로 올라가는 길, 조그만 방에서는 트렁크 안에 온갖 물건을 넣은 피넬&피넬의 전시가 있었다. 피넬&피넬의 트렁크 안에는 반으로 접은 자전거도 있고, 홈시어터도 있고, 어린이의 옷장도 있다. 데스크톱 컴퓨터나 홈시어터는 그대로 집에 두면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이 될 것 같다.
패션 에디터의 시각 한쪽 구석에는 브라질의 플립플랍 브랜드 하바이아나스와 콜라보레이션 작품도 전시돼 있다. 피넬&피넬의 악어가죽으로 만든 플립플랍. 그래서 가격이 420유로다. 과연 420유로짜리 플립플랍을 사서 신을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발칙한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장소 Corso Como 10, Milano
전시 일자 10월 1일까지
- 에디터
- Editor / 이윤주(Y. J. Lee)
- 포토그래퍼
- 안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