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겉옷보다 더 중요해진 잠옷. 이제는 파자마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는 한 수면 부족형 인간의 고백.

1109-252-1

 

얼마 전, 내 방에 파자마 서랍을 하나 만들었다. 큼직한 서랍장 중 하나를 비우고 잠옷을 차곡차곡 넣었다. 원래는 데님 서랍이었다. 데님이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마더진, 제이브랜드, 베트멍… 요즘 데님은 아우터보다 비싸다), 집에서 입는 잠옷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가만, 그런데 언제부터 잠옷을 입었더라?

어린 시절 엄마가 억지로 입힌 게 아니라면 ‛잠옷처럼 생긴 잠옷’을 입은 기억은 별로 없다. 외출할 때 입을 옷을 사기도 돈이 부족한데 집에서 입을 옷을 위해 돈을 투자하다니! 대신 엄마가 편해 보인다며 사다 준 옷이나, 무릎이 나오기 시작한 트레이닝 팬츠 등을 입었다. 유행이 지난 면 원피스, 온갖 브랜드의 로고가 찍혀 있는 판촉용 티셔츠. 그것은 아빠의 동창회 기념 수건처럼 기능은 하지만 아무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런 패턴에서 조금씩 달라진 데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불면증. 나이 들면 불면증이 심해진다는 것은 과학이다. 나이가 들수록 수면을 유도하는 물질인 멜라토닌 분비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령이 높아질수록 불안과 우울, 빛 등 수면을 방해하는 반응에도 민감해진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오히려 잠을 많이 자는 타입이었건만, 30대 중반이 되니까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잠이 안 왔다. 억울한 일이라도 있으면 더 그랬다. 좀처럼 열리지 않는 잠의 문앞에서 서성거려본 사람이라면 그 고통을 알 것이다. 잠자리가 조금이라도 편하면 도움이 될까 싶어 매트리스, 베개와 이불, 이불커버 등을 모조리 바꾸면서 구입하게 된 것이 파자마였다. 불면증에 대한 여러 연구 결과 및 책을 보면 일상과 잠의 경계를 분명히 하라는 내용이 꼭 있다. 잠들기 전, 나는 의식처럼 파자마를 입으며 잠이라는 걸 긍정하려고 애썼다. 그중 뭐가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잘 때는 역시 파자마가 편하다는 것!

정작 파자마에 푹 빠지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환자 기간’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수술을 받거나, 대상포진에 걸리는 등으로 나는 회사를 쉬고 병원에 가는 날만 제외하면 꼼짝없이 집에서 요양을 하는 신세가 되었다. 동시에 내 옷장에 그득하게 걸려 있는 멋진 옷은 모두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배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허리를 조이는 옷을 입을 수 없고, 통증에 민감해진 팔에 부드럽지 않은 소재를 꿸 수 없었다. 결국 파자마를 하루 종일 한 달 내내 입고 살았다. ‘파자마 직구’에 푹 빠져 파자마를 입고 침대에 누워서 파자마를 골라대기도 했다. 택배 아저씨가 두고 가는 박스는 울적한 내게 큰 위안이었다. 오늘은 무슨 파자마를 입고 하루를 보낼 것인가, 점심과 저녁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가 하루 중 가장 큰 결정이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파자마는 곧 환자복(실제로 병원 환자복과 비슷하다)이고, 사람들도 못 만나고 집에 무력하게 있던 나의 고마운 친구였다(또 다른 친구로는 만화책, 넷플릭스가 있었다). 예전 <나 혼자 산다>에 빅뱅 태양이 나왔을 때 내 시선을 끈 것은 그의 옷장에는 걸린 수많은 잠옷이었다. 잠옷 동지인 태양이 못 견디게 부러웠다. 그의 슬리피 존스 컬렉션이 대략 얼마만큼의 달러인지 내 눈에는 보였다. 아, 난 슬리피 존스가 1.5벌, 그것도 짝짝이로밖에 없는데.

비록 슬리피 존스의 수는 적지만 대신 나는 다양한 파자마 브랜드로 실적을 쌓았다. 만약 당신이 파자마 초보라면, 유니클로나 GU의 파자마 세트를 추천한다. 약 2~3만원대의 가격으로 그럴듯하고 편안한 파자마 몇 벌을 가질 수 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건 유니클로 이네스 드 라 프레상주 라인의 여름 잠옷으로, 잠옷 중에서는 보기 드문 차이나 칼라에 리넨처럼 가공한 면 소재가 가볍고 시원해서 아껴 입는다. 좀 더 여성스러운 취향이라면 오이쇼를 눈여겨보길. 유니클로가 기본형 파자마를 선보인다면 오이쇼는 그때그때 유행하는 멋진 요소를 집어넣었다. 최근에 구입한 배기 팬츠와 셔츠가 조화된 파자마는 배기 팬츠의 둥글고 부드러운 라인이 예뻐서 만약 파자마 파티가 열린다면 이걸 입을 거다. 너무 피곤한 날, 예민한 날에는 에버제이의 파자마를 꺼낸다. ‘고오급’ 파자마가 갖춰야 할 미덕인 아무것도 안 입은 듯한 감촉과 특히 아무것도 걸리지 않고, 조이지 않는 허리 부분이 일품이다. 파자마 마니아라면 잠옷에 대체 얼마까지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해봤을 텐데, 내 경우 그 상한선은 F.R.S다. ‘For Restless Sleepers’의 약자인 이 브랜드는 파자마 셔츠 하나에 700파운드나 하는 무시무시한 브랜드. 하지만 마치 오트 쿠튀르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파자마를 선보이기에 파자마 러버의 로망을 자극하기엔 충분하다. 국내 모 편집숍의 아울렛에서, 떨이에 떨이를 거쳐 85%까지 세일하는 이 파자마를 나는 샀다. 어차피 나 말고 알아보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게 뻔했다.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건 이 F.R.S는 누가 봐도 잠옷이라는 걸 잘 모르게끔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가끔은 입고 출근하기도 한다. 이렇게 파자마를 입으면서 내 일상은 조금 더 정돈되었다. 퇴근을 하면 흐뭇한 마음으로 파자마 서랍을 연다. 하루를 무사히 보냈고, 다시 포근한 잠자리로 돌아가는 것에 감사하면서 오늘밤의 파자마 단추를 잠근다. 참, 슬리피 존스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세일을 할 때 사면 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