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삐딱함’이 패션 트렌드가 된 진짜 이유
패션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균열에서 진화해왔다. 삐딱함이 이제 주류가 되어 우리의 스타일에 깊이 스며든 것처럼.

알고리즘은 우리의 취향을 끝없이 강화한다. 한 번 ‘좋아요’를 누른 콘텐츠에서 보인 색과 길이, 스마트폰이 기억한 가격대와 브랜드 같은 정보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은 이걸 좋아할 거야~’라며 속삭인다. 하지만 패션의 역사를 진짜로 움직여온 건 언제나, 예측 불가의 노이즈였다. 깔끔함을 뒤집는 헝클어짐, 유려한 비율을 끊어낸 파괴, 숭고와 속됨이 섞인 위태로운 균형 말이다.
그 노이즈가 어떻게 ‘주류’가 되었는지, 역사의 몇 장면을 되짚고 오늘의 길 위에서 답을 찾아보자. 첫 장면은 1981년 파리에서 시작한다. 레이 가와쿠보는 검고 큰, 그리고 비대칭적인 옷으로 여성의 몸을 가리는 대신 재구성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 파격적인 형태를 보며 “이것이 아름다움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97 S/S, 체크 원단 속에 패딩을 넣어 신체 일부를 돌출시키고 함몰시킨 이른바 ‘럼프스 앤 범프스(Rumps and Bumps)’가 등장한다. 이 컬렉션은 몸과 옷, 미와 기형, 공업과 육체의 경계를 일부러 어긋나게 배치해 ‘모델의 몸’이라는 기존의 표준을 해체하고, 새 기준을 제시한 혁신적 시도였다.
두 번째는 마틴 마르지엘라의 등장이다. 1988년 데뷔 무대에서 선보인 타비 부츠의 쪼개진 앞코는 금세 파격의 상징이 되었다. 또 1997년의 ‘스톡만(Stockman)’ 작업에서는 재단용 마네킹의 흔적과 활자를 의복 표면에 그대로 드러내어, 옷을 ‘만드는 과정’을 완성된 옷의 미학으로 끌어올렸다. 낡은 것을 해체하고, 남은 흔적을 드러내며, 원단의 올과 재단선을 숨기지 않는 태도는 패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이것은 훗날 ‘업사이클’과 ‘해체주의’의 상상력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실용적 언어가 된다.
장 폴 고티에가 선보인 남성 스커트는 또 어떤가. 1985~86 F/W 당시 그는 클래식의 핵심을 살짝 비틀어 남성복의 지층에 새로운 ‘틈’을 냈다. 이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린 특별 전시 <Bravehearts: Men in Skirts>(2003)는 서구 남성복의 역사가 본래 더 화려하고 유연했으며, 19세기 이후의 획일화가 오히려 예외적이었음을 환기했다. 고티에의 이런 파격은 젠더의 의례를 미세하게 비틀어, 옷이 사회적 규범을 따를지 혹은 거부할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류 패션계에 각인시켰다.
마지막으로 헬무트 랭은 단순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백을 통해 현실을 더 정확히 포착하는 미니멀리즘을 선보였다. 1998 F/W를 온라인과 CD-ROM으로 공개하며 산업의 작동 방식을 통째로 뒤흔들었고, 파리에서 뉴욕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며 ‘패션은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라는 관습을 완전히 뒤엎었다. 이 또한 조용하지만 근본을 건드리는 삐딱함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이런 역사적 ‘비틀기’는 오늘의 스트리트와 런웨이에서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틱톡에서 시작된 ‘Wrong Shoe Theory(가벼운 원피스에 러닝화, 테일러드슈트에 쪼리 같은 스타일링)’는 ‘맞는 신발’ 대신 ‘틀린 신발’을 골라 룩에 긴장감을 더한다. 어긋남이 하나의 완성도를 만든다는 간명한 규칙은, 소비자에게 새로운 시도를 제안하며 획일화된 스타일에서 벗어나는 쉬운 탈출구가 되었다. 런웨이에서도 ‘삐딱함’은 미학이자 전략이다. 프라다는 ‘못생김(Ugly)이 흥미롭다’는 선언 이후 충돌, 불협, 반(反)호화로움을 고급스러움의 언어로 재해석해왔다.

이는 ‘예쁘지 않음’에서 오는 산만함을 훈련된 균형감각으로 다듬는 일이었고, 지금도 그 역설은 유효하다. 미우미우는 2025 S/S에 ‘불완전한 아름다움’이라 불릴 만한 조합(수영복과 포멀 스커트, 여러 개의 벨트를 한 번에 착용하기 등)으로 고상함의 기준을 교란했다. 또 마크 제이콥스의 2025 F/W는 비율 자체를 장난감처럼 다루며, ‘인형의 집’ 같은 기묘한 비례감을 통해 ‘예쁨’에 대한 기존의 틀을 흔들었다.
균열의 미학이 주류가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답’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온라인 플랫폼은 과거의 취향을 복제해 비슷한 콘텐츠만 계속 보여주고, 이 때문에 ‘새로움’은 계산된 범위를 벗어난 우연한 조합에서 탄생한다. 2025년의 트렌드 지형은 단일한 거대 담론이 아니라 파편화된 수많은 소장르의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읽힌다. 중요한 건 급진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익숙함과 낯섦의 미묘한 조화다.
그렇다면 ‘삐딱함’은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첫째, ‘완성의 정의’를 변화시킨다. 마르지엘라가 공정의 흔적을 표면으로 끌어올렸듯, 오늘날 ‘티 나게 잘 만든 것’은 새로운 럭셔리의 문법이다.
둘째, ‘몸의 표준’을 흔든다. 가와쿠보의 패딩은 ‘이상적 실루엣’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표준은 누가, 왜 정했는지를 묻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셋째, ‘젠더의 관습’을 다시 쓴다. 고티에 이후의 남성복은 ‘스커트를 입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몸짓으로 어떻게 입을지’에 집중한다.
넷째, ‘보여주는 방식’을 완전히 뒤집는다. 헬무트 랭의 가상 쇼는 옷의 가치가 희소한 무대가 아닌,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민주적 공간에서도 창출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오늘날 주류 취향으로 스며들었다. 우리는 이 흐름을 일상에서 어떻게 체감할 수 있을까. 답은 과장된 반역이 아니라 ‘미세한 오차’에 있다. 아이템 간 질감의 엇박은 새틴 스커트와 워크부츠의 조합에서, 비율의 비틀기는 짧은 재킷과 긴 상의, 혹은 긴소매의 노출 시간차에서 볼 수 있다. 또 테일러드 팬츠에 쪼리를 착용하는 것처럼 포멀과 캐주얼의 교차는 아주 미묘한 어긋남을 만들어낸다. 결국 ‘틀린 신발’을 신는 간단한 행위가 사실상 전체 스타일링 알고리즘을 교란하는 스위치가 되는 것이다.
‘삐딱함’은 실패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패처럼 보이는 조합을 보정하고, 흔들리는 균형을 유지하는 동안 취향은 근육처럼 단단해진다. 주류가 되는 건 대중적 합의를 얻는 과정이지만, 그 합의가 반드시 매끈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오늘의 주류는 작은 오류와 틈, 시간의 흔적을 끌어안는 감수성을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잘 입는다’는 건 무엇일까? 아마도 남들이 ‘틀렸다’고 하는 것들을 유연하게 견디는 능력. 그 어긋남을 오래 들여다보는 인내. 그리고 그 삐딱함을 자신만의 균형으로 끝까지 이끌고 가는 책임감일 것이다. 덧붙이자면, ‘주류가 된 삐딱함’은 일탈의 피곤함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세한 비틀기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낯설 수 있다.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안전한 취향의 언덕에서 한 발 옆으로 내딛는 것, 그 한 발이 오늘의 스타일을 만든다.
- 사진 출처
- COURTESY OF GETTY IMAGES, GORUNWAY
- 아트 디자이너
- 임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