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애리, 이 나쁜 계집애!

이효리의 ‘Bad Girls’과 씨엘의 ‘나쁜 기집애’ 전에 <달려라 하니>의 나애리가 있었다.
나애리 하면 나쁜 계집애, 나쁜 계집애 하면 나애리. 놀랍게도 하니는 단 한 번도 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봄날은 간다>에서 이영애가 유지태에게 “라면 먹을래요?”라고 물었지,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말한 적이 없듯. 하니가 나애리에게 했던 말은 “나애리, 이 건방진 계집애”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쩌다 19금 플러팅 멘트의 대명사가 돼버린 “라면 먹을래요?”와 달리 “나애리, 이 건방진 계집애”는 <개그콘서트>에서 유행시킨 말이 원래 대사였다고 한다. TV 심의를 통과하기 위해 “나쁜 계집애”를 “건방진 계집애”로 순화시켰던 것. 어쨌거나 추석 연휴에 개봉한 <달려라 하니> 40주년 기념 극장판 제목은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다.
제목만 보면 주인공이 ‘투톱’처럼 보이지만 나애리가 주인공인, 나애리 시점의 영화다. <잠 자는 숲 속의 공주>의 ‘말레피센트’처럼, <101마리 달마시안>의 ‘크루엘라’처럼, 우리가 절대 빌런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악당의 주인공 캐스팅. 나애리는 어떻게 주인공이 되었을까?
사실 이진주 작가는 처음부터 나애리가 주인공인 작품을 구상했었다. 그런데 작품을 보는 어른들에게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면 곧게 성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결핍이 있지만 꿋꿋하게 성장하는 하니를 주인공으로 바꾸며 나애리는 조연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국 만화사에서 가장 ‘나쁜 계집애’로 각인돼 버린 나애리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는 작가. 그 마음은<달려라 하니>의 40년 후 스핀오프 <나쁜계집애: 달려라 하니>가 되었다.
어른이 되고 보면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이 측은하기 짝이 없듯 <달려라 하니>의 나애리 역시 달리 보인다. 영화 시작부터 달리는 나애리. 새벽 다섯 시 알람에 칼같이 일어나 언제나 같은 루틴으로 훈련하는 성실한 노력파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달리는 하니와 달리 기록 갱신을 위해 달리는 대문자 T. 체육관에 발자국을 낸 일진 무리를 일망타진하고 보복을 당하는 게 아니라 언니부대를 만들어버리는 마성의 ‘테토녀’. 전국 고교 육상대회 100m 달리기 1등 나애리가 극복해야 할 유일한 상대는 하니다.
2025년의 하니는? 경기장 트랙 대신 서울 시내 곳곳을 달리는, 가상의 스포츠대회 S런 최강자다. 여전한 건 ‘바람머리’에 빨간색 하트 모양 머리핀, 초보 러너들도 의아해 할 (카본화가 아닌) 빨간색 컨버스 하이탑. 달라진 게 있다면 무선 이어폰 정도다. 여전한 건 또 있다. 하니의 옆을 매니저처럼 지키는 친구 ‘창수’. <폭싹 속았수다>에 관식이가 있다면 <달려라 하니>에는 하니 밖에 모르는 바보 창수가 있다.
영화는 TV 만화에서 하니에게 진 후 종적을 감췄던 나애리가 하니와 홍두깨 선생님이 있는 빛나리 고등학교로 전학 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하니는 자신과 엄마를 모욕했던 나애리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지만, 어마무시한 실력에 공감 능력은 결여된 ‘주나비’의 등장은 두 사람이 한 팀이 되도록 만든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나희도(김태리)와 고유림(김지연)이 그랬듯 반드시 이겨야 할 라이벌에서 둘도 없는 동료가 되는 하니와 나애리. 4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워맨스다. 희도와 유림이 올림픽에서 경기를 마친 후 끌어안고 울 때처럼, 둘의 화해는 생각보다 더 코끝이 찡하다.
첫 등장에서 나애리를 가볍게 제친 주나비는 의미심장하게 묻는다, 너는 왜 달리느냐고. 하니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돌아온 답은 “달리고 싶으니까!”였다. 하니를 통해 비로소 달리는 즐거움을 깨달은 나애리. 그 시절 나쁜 계집애라고 숱하게 욕했던 그의 달리기를 응원하게 된 이유다.
*<Y2K쌀롱>은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고, 지금 다시 우리를 설레게 하는 Y2K 스타와 콘텐츠에 관해 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