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는 ‘절제된 음주’가 트렌드!
취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대가 찾아왔다. 절제된 음주로 건강과 자유를 만끽하는 소버 라이프.

“나는 콜라 마실래.” “논알코올 맥주도 있나?” 언제부터인가 ‘먹고 죽자’고 덤벼들던 술자리의 풍경이 달라졌다. 잔이 빌세라 소주를 따르고 또 따르다 한 명은 엎어지고, 또 한 명은 집으로 도망치던 기억은 이제 추억이 됐다. 나 역시 일주일에 서너 번 찾던 단골 술집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게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술과 멀어졌다. 뭔가에 홀린 듯 너도나도 실천 중인 ‘소버 라이프(Sober Life)’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점령했다.
전 세계적 유행
‘소버’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술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의’ ‘냉철한’ ‘진지한’. 말 그대로 술에 취하지 않은 채 맑은 정신으로 시간을 보내는 걸 뜻한다. 단순한 금주를 넘어 자신의 건강상태와 취향에 맞는 음주 방식을 택하는 것. ‘소버 큐리어스’ ‘소버 리빙’ ‘소버 유니온’ ‘소버노믹스’ 같은 개념 역시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음주 문화가 달라진 건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를 추구하는 MZ세대의 취향 때문이다.
2030세대의 음주 빈도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31%가 ‘전혀 마시지 않는다’고 답했으며, ‘거의 마시지 않는다’가 25%, ‘월 1~2회 마신다’가 23%로 뒤를 이었다. 지독한 숙취를 안겨주는 소맥 대신 달콤한 하이볼을 택한 이들은 저도수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술을 적게 마시는 ‘소버(Sober)’ 트렌드까지 탄생시킨 것.
산토리 글로벌 스피리츠 관계자는 이런 트렌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소버 트렌드는 소비자 개개인의 다양한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해야 한다는 흐름 같아요. 각자의 상황과 기분에 따라 술을 즐기는 방식이 변화하는 거죠.” 폭음보다는 절제를, 타인의 권유보다는 스스로의 선택을 존중하는 이 움직임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논알코올 바의 수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사교 문화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뉴욕의 ‘리슨 바’와 로스앤젤레스의 ‘바 누다’는 단순한 논알코올 칵테일을 넘어, 웰빙과 치유를 위한 다양한 음료를 선보인다. 일본에서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 청년층을 일컫는 신조어 ‘시라후’가 탄생했고, 영국과 미국 등에서는 ‘소버 옥토버(Sober October)’ ‘드라이 재뉴어리(Dry January)’ 같은 금주 캠페인이 인기를 끄는 중이다. 올해로 190번째 열리는 독일 뮌헨의 민속 축제 옥토버페스트에서도 무알코올 맥주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내 상황도 마찬가지다. 무알코올 칵테일인 모크테일을 맛볼 수 있는 바앤카페 ‘놀로!(NoLo!)’와 위스키 풍미를 담은 더치커피로 유명한 카페 ‘펠른’, 차를 칵테일의 형태로 재해석한 논알코올 티칵테일을 맛볼 수 있는 오설록의 ‘바설록’ 등 알코올 없이도 술 문화를 즐길 공간이 즐비하다.
요동치는 주류업계
변화한 음주 문화는 주류업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F1 드라이버 루이스 해밀턴이 무알코올 아가베 스피릿 브랜드 ‘알마베(Almave)’를 론칭했다는 걸 아는지? 컨디션 유지를 위해 술을 끊었다는 그는 테킬라 특유의 맛과 풍미를 즐기기 위해 이 제품을 개발했다. 기존 테킬라처럼 블루 아가베를 조리하고 증류해 제작하지만, 발효과정을 생략해 알코올이 전혀 없다고. 테킬라 외에 와인과 샴페인, 칵테일 등 여러 종류의 논알코올·무알코올 제품이 있지만, 국내 시장의 최강자는 단연 맥주다.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국내 무알코올 맥주 매출은 전년 대비 35% 증가했으며, 주요 구매층은 2030세대가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오비맥주의 대표 브랜드 카스는 2020년에 카스 0.0을 출시하고, 5년 만인 지난 8월에 카스 올 제로를 추가로 선보이며 제품 포트폴리오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중이다. 디아지오의 기네스 역시 논알코올 맥주 기네스 0.0을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 출시했다. 하이트진로와 롯데칠성 등 대형 주류 회사는 물론, 제주맥주와 세븐브로이 같은 수제 맥주 업체도 논알코올·무알코올 제품을 내놓고 있다. 한편, 지난 4월에는 국내 최초의 무알코올 위스키 더 페이커와 데어 제로도 모습을 드러냈다. 기준 도수와 제조 과정이 까다로운 위스키의 특성상 혼합 음료로 분류되지만, 버지니아 증류소의 원액을 사용해 싱글 몰트위스키 수준의 맛과 향을 선사한다.
이러한 논알코올·무알코올 제품이 주류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보다 기존 알코올 제품과 동일한 맛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여러 브랜드가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논알코올·무알코올 위스키 제조와 생산 방법에는 증류·숙성·혼합 방식이 있어요. 저희는 버번 캐스트 숙성 방식과 혼합 방식을 복합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알코올로도 버번의 맛과 풍미를 최대한 유지할 수 있는 기간 동안 숙성하고, 맛과 풍미를 더하기 위해 일부 첨가제를 혼합하는 방식이죠.” 디스틸러데어 조영민 대표가 설명했다. 오비맥주 역시 철저한 원료 선정과 끊임없는 연구로 맥주 본연의 맛과 풍미를 구현하는 데 집중한다.
지속 가능한 트렌드
술이 친목과 회식, 스트레스 해소 같은 사회적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소버 트렌드가 찾아온 지금도 그렇게 작동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꼭 술이 아니어도 된다’는 점이다. 오히려 음주 권유가 무례한 행동으로 인식되기도 하니까. 이는 단순한 시장의 변화 그 이상이다. 술은 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는 도구로 바뀌고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진한 위스키 한 잔을 즐기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논알코올 와인 한 잔으로 충분히 멋진 저녁을 보낸다. 중요한 건 선택의 자유다. 소버 트렌드에서 시작된 논알코올·무알코올 제품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그저 또 하나의 선택지가 늘어난 것뿐이다. ‘술을 마셔야 할 이유’를 찾기 전에 ‘술이 없어도 괜찮은 순간’을 더 풍요롭게 만들 방법을 고민해볼 때다.
- 포토그래퍼
- 정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