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포비아’의 시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일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적 있나요? 

띵동! 업무 메신저가 울린다. ‘선배 좋은 아침입니다’로 시작한 메시지 위로 순식간에 열다섯 개의 알림이 표시되며 매섭게 울려댄다. 아침부터 무슨 사고가 터졌나 싶은 마음에 다급히 발신인을 확인한다. 발신자는 맞은편에 앉은 후배다. 스무 개를 향해가는 알람을 클릭하니 어제 부탁한 일과 관련한 보고가 펼쳐진다. 진행 과정에 대한 설명에는 물음표와 느낌표, 텍스트 기호로 만든 이모티콘이 뒤섞여 있다. 읽어야 하는 내용이 좀처럼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질문과 보고의 경계가 불명확해 맥락을 짚기 어려웠고, 진행한 업무 내용을 나열한 문장과 문장 사이 궁금증이 쌓였다. 한참 읽은 뒤 나는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답장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 되면 잠깐 제 자리에서 이야기해요!’ 

텍스트로 소통하다 보면 흔히 말하는 ‘티키타카’가 불가능하다. 명확한 이해를 위한 질문은 타이밍을 놓치거나 묵살되어 직선 거리를 빙빙 돌아가는 기분으로 대화가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는 불필요한 오해도 생긴다. 텍스트의 건조함에서 비롯되는 무례한 느낌, 비약된 설명은 메시지의 의도를 오염시킨다. 10분이면 끝날 소통은 상대의 응답을 기다리며 30분, 1시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대화창을 붙잡고 있느라 멈춘 일을 향한 조급함에 속은 타들어간다. 여러 사람이 업무 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서 합을 이뤄야 하는 사무실에서 개인의 일정만 고려한 채 불시착한 일방적인 메시지는 팀워크에도 해롭다. 공식적인 업무 보고 툴인 메일이 부담스러워 메신저를 선택한 비겁함 앞에서는 눈살이 찌푸려지기 일쑤다. 머릿속에서는 ‘소통의 부재’라는 단어가 고개를 드는데, 기술의 발전과 현실 상황의 모순에 괜히 씁쓸해진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법으로 말을 걸 수 있는 시대에 확실한 소통은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되었을까. 

텍스트 소통자인 MZ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의 언어생활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90년대생이 가족이 아닌 타인과 주로 소통하는 창구는 대개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이다. 자장면 하나도 전화로 주문해야 되는 시대는 사라지고, 한마디 대화 없이 자장면 한 그릇을 집에서 맛볼 수 있게 됐다. 음성보다는 문자가, 사진보다는 영상 콘텐츠에 더 친숙하다. 이러한 이유로 음성 소통이 두려워 전화를 걸고 받기를 두려워하는 ‘콜 포비아(Call Phobia)’라는 단어도 MZ의 특징으로 언급된다. 지난해 한 방송에서 샤이니 멤버 키 역시 자신의 콜 포비아 증상에 대해 고백했다. 전화가 오면 가슴이 떨린다며 통화보다 문자가 편한 이유로 ‘예측성’을 꼽았다. “문자는 상대가 이야기하면 내가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전화는 즉석에서 말을 뱉어야 하고 이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그의 말이 많은 ‘좋아요’를 얻고 ‘움짤’로 회자된 걸 보면 이는 꽤 타당한 변임을 증명한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확실한 대비를 위해 소통을 하나의 일로 여기고 증거를 남긴다는 입장도 있다. 

회사에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일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데에는 코로나19라는 대재앙도 한몫했다. 코로나19가 극성이던 시기 많은 회사는 재택근무를 시행했다. 최근 3년간 취업한 이들은 면접부터 채용, 신입 사원 연수와 근무 자체를 비대면으로 경험했다. 이들은 애초에 업무상 대면 대화 기회 자체를 시대에 빼앗겼다. 선배와 동료의 얼굴도 모른 채 일단 일부터 시작했다. 사무실에 첫 출근한 이들에게는 “밥 한번 먹자!”는 상사의 말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예측할 수 없다. 게다가 직설적이고 권위적인 화법의 상급자와 대화는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애초에 말을 걸어야 하는 타이밍을 잡기 위해 눈치 보는 것부터 생각만으로도 피곤하다. 수신인이 확인하고 싶은 타이밍에 응답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넘긴 텍스트 소통이야말로 MZ는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여긴다는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공적 영역에서 대면 대화를 외면하는 건 업무상 장점이 아니다. 일을 하기 위해 모인 회사에서 대화는 불가결한 업무 형태다. 업무 수행 방식을 넘어 개인의 생산성에도 영향을 끼친다. 일본의 의학박사이자 정신과 의사인 오카다 다카시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좋은 대화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대화가 관심을 공유하는 관계에서 기분을 공유하는 단계로 넘어갈 때 두 사람 사이에서 생겨난 친밀감이 신뢰로 이어진다.” 누군가 내 마음을 헤아려주면 우리는 마음이 평온해지는 동시에 무언가 하고 싶다는 의욕이 샘솟는다. 그깟 대화가 일의 효율과 성과를 높인다는 얘기다. 안타깝게도 이를 위해서는 상황을 마주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대면 대화와 음성 소통이 어려운 이들을 대상으로 스피치 학원이 성행하고 해외에서는 컨설팅 업체까지 생기기도 했는데, 이들의 공통된 교육법은 잦은 노출이다. 시간당 4백80달러를 지불하면 일대일 코칭 서비스를 제공하는 미국의 전화 기술 컨설팅 회사 ‘더 폰 레이디’는 상담을 시작하면 지인들에게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대화하는 연습부터 시키는 교육법을 채택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대면 대화의 잠재력을 품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떨어온 숱한 수다의 경험을 떠올려보자. 선생님께 혼나며 수업 시간에 몰래 떨었던 수다는 가장 긴밀한 대면 대화다. 수다를 시작으로 설득, 토론, 협상, 고백 등 대화의 다양한 형태를 이미 경험했다. 시답잖은 수다로 친분을 쌓고 은밀한 가십을 나누며 소문을 퍼뜨리는 과정에서 내적 신뢰가 쌓였다. 필요에 따라 설득과 교섭을 하는 과정은 나를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는 기회가 됐다. 토론은 모두에게 공평한 최선의 의사 결정을 하는 데 필요한 대화였다. 눈으로 상대의 표정을 읽고 귀로는 목소리의 높낮이와 말투의 긴장감을 확인하며, 때로는 몸의 언어가 주는 확실성이 말보다 더 큰 힘을 갖기도 했다. 얼굴을 마주하고 펼치는 치열한 대화는 상대의 말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지 못할 만큼 익숙한 소통 방식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일단 오늘 퇴근길 팀장에게 메신저 대신 말로 인사를 전해보자. “먼저 퇴근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