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주영은 참지 않고 숨기지 않는다. 

레더 베스트는 이자벨마랑(Isabel Marant), 187 이어링은 오프화이트(Off-White).

싱글 코트와 화이트 팬츠, 스트랩 힐은 모두 프라다(Prada).

“스튜어디스 혜정아”가 모두의 유행어가 됐어요.
요즘 주변에서 모두 저를 그렇게 불러요. 오늘 소속사 이사님의 카톡 메시지 시작도 “스튜어디스 혜정아”였어요.(웃음) 저더러 혜정이로 개명하라는 사람도 있어요.

뜨거운 반응을 체감하고 있죠?
크게 실감하지는 못했어요. 3월 방영을 앞둔 주말 드라마 <진짜가 나타났다!> 촬영이 한창이라 촬영장과 숍 정도만 오가고 있거든요. 현장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제게 혜정이에 관해 이야기할 때, SNS에 접속하면 조금 실감이 나는 것도 같아요.

뜨거운 반응과 달리 굉장히 차분해요. 열기에 조금은 취해도 되지 않을까요?
아버지께서 늘 하신 말씀이 있어요. “꿈은 크게 갖되 발은 바닥에 붙이고 있어야 한다.” 긍정적인 기대는 하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요. SNS에 저와 관련된 콘텐츠가 올라오면 ‘내가 출연했으니까 당연히 알고리즘에 많이 나오는 거겠지’라고 생각해요.

<더 글로리> 시즌1 정주행은 몇 번이나 했어요?
한 번 봤어요. 그런데 작품에 제대로 몰입하기 어렵더라고요. 함께 찍은 배우들과의 비하인드가 생각나서. 이럴 때는 또 객관성이 떨어지네요.

역할에 과몰입한 배우들의 인스타그램 댓글놀이가 화제예요. 현장에서 케미가 굉장했나 봐요?
촬영은 지난해 8월 끝났는데, 배우들끼리 너무 친해져서 자주 봤어요. 원래 타인과 가까워지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인데, 임지연 배우가 먼저 훅 다가와줬어요. 덕분에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일 수 있었죠. 지연이가 리더 역할을 정말 잘해줬어요.

배우끼리 만나면 주로 무슨 얘기를 해요?
<더 글로리>죠! 주야장천 작품 얘기만 해요. 공개 전까지는 후반 작업과 편집을 거쳐 어떻게 나올까 하는 얘기만 했어요. 재미있고 치열하게 찍은 만큼 편집본이 궁금했죠.

개인적으로는 어떤 부분이 가장 설렜어요?
저는 기대보다 불안감이 더 컸어요. 분량이 많지 않은 데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고, 처음 시도하는 역할과 연기 스타일이기도 했고요. 캐스팅이 확정되기까지도 녹록지 않았거든요. 감독님도 혜정이 캐스팅을 제일 마지막에 확정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만큼 애를 먹인 인물이었나 봐요.

캐스팅 과정이 얼마나 길었는데요?
오디션을 정말 많이 봤죠. 일주일에 한 번씩 두 달 가까이 감독님을 뵌 것 같아요. 캐스팅을 해 주실 듯 안 해주실 듯해서 피가 말랐어요.

그럼에도 결국 혜정이를 연기하게 됐어요. 결정적 순간이 있었을까요?
캐스팅 확정된 날이 기억나요. 봐도 봐도 오디션이 끝나지 않으니 한계치에 도달할 때였어요. 짜증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상태로 감독님을 뵀죠. “자꾸 불러서 미안해요. 오늘은 결정짓죠.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주영 씨?” 하는데 제가 비속어를 섞어서 답했어요. 정확히는 “X같이 지냈어요”라고 했죠. 그랬더니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준비한 것도 아니고 그때 제 기분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이었어요.(웃음) 그날 저는 고삐가 풀려서 좀 막 나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웬걸, 캐스팅을 확정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한 문장으로 승부를 보셨네요.
감독님이 걱정하신 부분이 제가 욕을 너무 못한다는 것도 있었거든요.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었어요.

캐스팅 이후도 치열했나요?
‘깃털처럼 흩날리는 가벼운 친구’라는 설명 외에 감독님의 특별한 요구는 없으셨어요. 글래머러스한 설정을 위해 외적으로는 5~6kg을 증량했어요. 작품에 들어가기 전 캐릭터를 연구하려고 자료 조사를 해도 혜정이 같은 친구는 한 명도 없더라고요.

첫 촬영의 기억도 짜릿할 것 같아요. 어떤 신이었죠?
사라와 명오네 집에 몰래 들어가는 장면요. 사라역을 맡은 김히어라 언니와도 첫 신이라 친하지 않을 때죠. 초긴장 상태에서 리허설 한 번 하고 바로 슛 들어갔어요.

촬영은 성공적이었고요?
피드백을 주셨는데. 마음에 안 들어하셨어요.(웃음) 정말이에요. 감독님이 저를 캐스팅한 것도 베팅이었다고 생각해요. 믿음과 불안을 안고 함께 가주신 거죠. 매 신 끝날 때마다 감독님이 피드백을 주셨는데 아주 혹독했어요. 치열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도록.

그래도 싫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맞아요. 연기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다른 배우에 비해 내공이 부족한 걸 너무 잘 알거든요. 압도적인 연기를 하는 선배님들 사이에서 제 몫을 잘해내야 하는 지점마다 감독님이 주눅 들거나 기에 눌리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주신 것 같아요. 제가 이걸 극복하고 넘을 수 있는지 계속 시험하셨던 거죠.

 

슬리브리스 톱은 미우미우(Miu Miu), 데님 팬츠는 뮈글러(Mugler), 힐은 세르지오 로시(Sergio Rossi)

보디슈트 형태의 페이크 레더 셔츠는 YCH, 로고 레깅스는 마린 세르(Marine Serre), 레오퍼드 힐은 소피 (Sophieest).

원래 승부욕이 강한 편이에요?
전혀요. 자괴감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괜찮은 척했던 거예요. 해내야 하니까. 불안하고 자신이 없으면 카메라에서 다 티가 나잖아요. 불안하고 자신 없어도 혜정이처럼 하는데, 끝나고 차에 타면 ‘오늘 내 몫을 제대로 못한 것 같다’는 생각에 엄청 우울했어요. 맥주 한 캔 하고 싶은데 과연 맥주 한 캔을 마실 수 있을 정도의 몫을 내가 해냈나?

요즘 말로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들어갔나요?
정말 그런 마음으로 찍었어요.

주영 씨가 현장에서 느낀 상황이 혜정이와 비슷한 것 같아요. 무리에 함께하고 싶어 아등바등 살아가는 지점요.
정확해요. 그래서 감독님께 너무 감사한 거죠. 동료 배우들은 차주영보다 최혜정으로 저를 먼저 봤는데 친해지고 나서 모두 놀랐어요. 방방 뛰고 왈가닥인 모습만 보다가 집순이에 파워 ‘I’성향이거든요.

<더 글로리>로 김은숙 작가와 안길호 감독의 저력을 새삼 확인했죠. 어땠어요?
저희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대본대로 연기했어요. 액션은 몰라도 텍스트적 애드리브는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작가님과 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 모두 프로였어요. 일 잘하는 사람이 모이면 이렇게 진행되는구나 하는 걸 느꼈죠.

엄청난 교육의 현장이었네요. 또 다른 수확이 있나요?
배우라는 일을 더 재미있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혼자 고민하고 연구하면서 시도한 것들이 얼추 들어맞은 것 같아 자신감이 좀 붙었거든요.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않았고, 확실한 연기 스타일이 없다 보니 늘 불안했어요.

경영학을 공부하던 중에 연기로 마음이 기운 계기가 있었어요?
배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영화나 음악 같은 종합예술을 너무 좋아했고, 영화 속 인물로 살아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운 좋게 기회가 닿았어요.

호기심으로 발을 담갔군요. 이렇게 오래 할 줄 알았어요?
배우를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사실 얼마 전의 일이에요. 그동안은 비행기 안에서 출입국신고서에 직업을 쓸 때면 늘 빈칸으로 냈어요. ‘내가 이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 이 에너지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속에서 살았어요.

결심한 계기가 있어요?
드라마 <키마이라> 이후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일도 개인적인 삶도 완전히 박살 나서 3개월 동안 집 밖에 안 나올 정도였어요. 다시 일어나야 하는데 드는 생각이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지?’뿐이었어요. 곰곰이 생각하니 ‘쌓아온 것도 없다, 새롭게 시작하자’는 결론에 이르더군요. 원점으로 돌아가자 싶었어요. 이후 <어게인 마이 라이프> <최종병기 앨리스> <더 글로리>를 만나면서 전환이 됐어요.

투자한 노력과 시간에 대한 결과가 확실한 공부와 달리 배우 일은 그렇지 않죠.
맞아요. 정확히 말하면 이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던 거죠. 나 하나 노력한다고 잘되는 게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변수 속에서 수많은 사람, 적절한 타이밍이 맞아야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거든요. 이 부분도 도전 정신을 깨운 것 같아요. 한 번쯤 내가 생각하는 목표에 도달하고 싶다.

요즘은 새롭게 태어난 기분인가요?
일을 대하는 자세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나는 내 몫을 완벽히 해낼 테니 비슷한 마음과 비슷한 준비가 된 사람들이 모여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요. 각자의 역할을 다하면 무조건 결과가 좋을 거라는 확신이 좀 생긴 거죠. 제가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생각해서 예민과 불안을 품고 살았던 것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죠.

배우의 속도는 상대적이잖아요. 누군가는 차주영이라는 배우가 갑자기 등장했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몇 년 전부터 활동해온 것처럼요. 배우 자신은 그 속도를 어떻게 체감하나요?
아직까지는 적절하고 알맞다고 생각해요. 몇 년 전까지는 많이 조급했죠. 배우 커리어를 시작할 당시만 해도 많은 분이 격려해주셨는데 그만큼의 퍼포먼스를 못 낸 것도 알고 애매하게 겉돌았거든요.

2023년의 속도는 어땠으면 좋겠어요?
<더 글로리>를 통해 저를 알아주셨으면 앞으로 제가 뭘 하는지 같이 봐주시면 좋겠어요. 쉴 틈 없이 일할 계획이에요. 마음껏 가져다 써주세요. 목말라 있었어요 저는. 50부작 주말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제 역량을 확인해보고 싶어서예요. 일이 잘 풀리면 좋겠어요. 그래야 제 삶이 좀 편안해질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