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사이클이 없어도 괜찮다. 우리에게는 페미닌하면서도 관능적인 레이싱 패션이 있으므로.

이태원이 말도 안 되게 큰 옷과 가짜 명품, 빈티지 옷의 쇼핑 성지로 성행하던 시절의 얘기다. 말하기 좋아하는 후배의 표현대로라면 ‘공민왕 시절’의 얘기쯤 되겠다. 아무튼, 빈티지 옷에도 카테고리가 있는데, 이태원에는 특히 밀리터리 룩과 레이싱 패션의 아이템이 즐비했다. 지금도 레이싱 재킷 숍에서 나던 냄새가 잊히지 않고 기억난다. 켜켜이 내려앉은 먼지나 자연스럽게 바랜 패널 등에서 세월이 느껴지는 레이싱 재킷 숍은 그 앞에만 지나가도 눅진하고 고약한 가죽 냄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찍이 레이싱 문화에 눈뜬 한 친구는 20대 초 모터사이클에 심취해 그 룩을 즐겼다. 브랜드도 역사도 줄줄 읊으며 모터사이클을 사기 전까지 의상을 더 탐닉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옷이 요즘 유행하며 다시 거리를 메운다. Y2K 패션이 인기를 끌며 주목을 받은 데다 스포티 무드, 그리고 빈티지 패션에 대한 관심 등이 맞물려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아이템이 되었다. “팔과 어깨 부분에 둔탁한 패드가 장착된 것은 만약에 일어날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해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예요. 실제로 레이싱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필수인데 패션적 요소로 재해석하기도 하죠.” 약 10년 동안 거르지 않고 모터사이클을 즐기는 열혈 마니아 포토그래퍼 A가 말한다. 2000년대 초반, 레이싱 재킷은 힙합퍼가 즐겨 입는 스포티한 유니폼 룩 중 하나였다.
남녀를 막론하고 오버사이즈 팬츠나 낙낙한 오버올, 사이즈가 큰 컴뱃 부츠 등과 매치했다. 힙합 정신이 그러하듯 모터사이클이나 레이싱카를 탈 때 느끼는 자유로움을 의상으로 표현하려고 했으리라. “과거 레이싱에 출전한다는 건 목숨을 거는 것과 같았어요. 귀족만 하는 고가의 력셔리 스포츠라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죠. 스피드 자체가 피 끓게 하는 속성이 있어 일탈이나 자유의 가치와 연결고리가 있어요.” 한때 <포뮬러1> 매거진에 몸담았던 기자 B가 이야기한다. 이처럼 과거의 레이싱 재킷이 투박하고 날 선 느낌으로 저항의 이미지를 담았다면, 다시 돌아온 레이싱 패션은 유연하고 페미닌한 스타일의 틈을 비집는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디테일에 레이싱 모티프를 더해 은근한 파워와 관능을 어필한다고 할까? 

스타일링 팁은 런웨이만 훑어봐도 온전히 알 수 있다. 모터사이클 재킷을 그대로 재현한 아이템을 비롯해 펑키한 레더 소재 의상, 멀티 포켓이나 벨트 디테일, 가죽 장갑 등이 대거 등장했다. 가장 먼저 디올은 직접적으로 모터바이크 재킷을 차용한 브랜드다. 페미닌한 레이싱 톱과 플레어스커트에 더한 모터사이클 재킷은 디올의 모토인 당당한 여성의 모습을 그린다. 선이 얇은 슬리브리스 톱에는 투박한 레이싱 장갑을 매치했고, 어떤 의상에는 모터바이크 재킷의 뼈대만 남겨놓은 듯 어깨와 가슴 패널만을 레이어드하기도 했다.
디올이 대비를 통한 연출로 눈길을 끌었다면, 디젤과 미우미우는 탄탄하고 두꺼운 가죽으로 승부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레더 소재로 연출해 강렬함을 배가했다. 디젤의 라이더 재킷은 빈티지 워싱으로 세월감을 느끼게 하고, 미우미우 역시 자연스러운 얼룩이 오래되고도 값진 느낌을 자아낸다. 알렉산더 맥퀸은 변형된 라이더 룩을 선보였다. 허리와 허벅지, 무릎 등에 벨트를 장착해 펑키한 무드를 극대화한 것. 앞코가 뾰족한 앵클부츠 역시 여러 개 벨트를 장식했고, 실버 메탈 브레이슬릿과 스터드 장식 클러치를 들어 전반적으로 쿨하고 펑키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스포트막스처럼 클리비지가 돋보이는 가죽 점프슈트에 날렵한 바이커 글러브와 언밸런스한 드롭 이어링을 매치하면 관능적 레이싱 패션을 완성할 수도 있다. 그 밖에 알투자라, 발망, MM6, 코페르니, 베르사체 등에서 내놓은 아이템도 눈길을 끈다.
팬데믹은 거의 종식됐고, 우리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다. 새로운 도전, 새로운 패션을 즐길 때가 온 것이다. 가장 먼저 모터사이클 재킷으로 당당하고 여유 있는 스타일을 표현해보자. 자신의 개성과 정체성을 꾹꾹 눌러 담아서 배달의 후예, 본능의 후예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