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으로
뚜벅이 여행자에게 군산만 한 곳이 없다. 도심과 바다를 모두 누빈 군산에서의 1박 2일.
고군산군도
조금 걷기만 해도 콧잔등에 땀이 송송 맺히는 계절이 오면, 평생 서울 토박이로 살던 주제에 바다가 내 고향인 것처럼 바다 노래를 부른다. 당장 떠나는 일이야 기차든 버스든 가장 빠른 표를 잡으면 되니 어렵지 않다. 그러나 늘 문제는 여행지에 당도해서 일어난다. 내가 면허가 없는 ‘뚜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뚜벅이 여행자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무면허 여행자는 편리한 교통과 탁 트인 자연경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고민하는 내게 모두 입을 모아 군산을 추천했다. 군산에는 그게 다 있다면서.
뚜벅이라도 괜찮아
서울에서 군산은 2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한다. 고속버스를 타고 아침에 출발해 점심쯤 당도하니 벌써 해가 쨍쨍했다. 은근하게 미식거리는 속을 개운하게 씻어내기 위해 냉면만 한 메뉴가 있을까? 마침 여름이기도 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버스 터미널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군산의 명물 뽀빠이냉면이 있다. 1954년부터 3대째 내려오는 평양냉면집으로, 간판보다 먼저 보이는 전용 주차장의 드넓은 규모가 진정한 맛집임을 증명한다. 메뉴는 물냉면과 비빔냉면, 왕만두뿐이다. 전문점이라면 으레 메뉴가 적어야 한다는 나의 맛집지론에 맞아떨어져 주문할 때부터 예감이 좋았다. 그런데 웬걸, 물냉면이 나오자마자 이게 평양냉면인가 싶어 다시금 메뉴를 살펴봤다. 거무스름한 육수에 잘게 찢은 닭고기 고명과 가늘게 채 썬 오이가 한 움큼 올라가 있다. 모양새도 낯선 냉면은 맛도 지금까지 먹은 평양냉면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초계국수, 또는 냉모밀에 가까운 맛이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이곳 육수에는 사골과 돼지 등심뿐 아니라 닭이 들어간다. 꿩 대신 닭을 우리는 옛 방식 그대로를 따른 거라고. 여기에 간장으로 맛을 내 그렇게 어두운 빛을 띤 것이다. 그런데 이 국물, 묘하게 계속 당긴다. 끝맛이 자꾸 달착하게 감기는 게 어쩐지 다시 생각날 것만 같다.
뽀빠이냉면에서 멀지 않은 곳에 3대째 이어져 오는 또 다른 가게가 있다. 무려 1943년부터 장사를 해온 중동호떡은 기름 없이 구운 호떡으로 유명하다. 피가 아주 쫄깃쫄깃한데 안에 든 시럽도 그리 달지 않아 앉은 자리에서 두 개도 거뜬하다. 한 개는 가게에서 해치우고, 한 개는 종이컵에 둘둘 말아 여유롭게 호텔로 향했다. 여행지에서 숙소를 고르는 일은 언뜻 까다로워 보이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기준은 명확하다. 내게는 위치와 요금이다. 개장 당시 충청 호남권역 최초의 4성급 호텔이던 라마다 군산 호텔은 군산 도심 중앙에 위치한다. 터미널에서도 가깝고, 산책하기 좋은 은파호수공원이 인접해 있으며 호텔 바로 앞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만하면 뚜벅이 여행자에게는 트리플 크라운이나 다름없다. 체크인한 후 고군산군도로 떠나기 위해 조금 서둘렀다. 군산 도심에서 고군산군도로 떠나는 99번 버스는 1시간에 한 대만 편성되어 버스 시각을 맞추는 것이 관건. 타기만 한다면 환승할 필요 없이 새만금방조제를 시원하게 가로질러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꿈에 그리던 바다에 닿는다.
배신 없는 풍광
고군산군도는 섬 63개로 구성됐다. 그중 16개만 유인도로, 선유도와 야미도, 무녀도부터 대장도까지 큼직한 섬은 모두 다리로 연결되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다. 섬에서 다른 섬으로 이동하고 싶으면 배차 시간이 긴 버스보다는 자전거와 전기 스쿠터를 대여해 이동하는 것을 추천한다. 첫 번째로 선유도에 하차했다. 신선이 머물며 놀다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이곳에는 유명한 해수욕장이 두 곳 있는데 분위기가 꽤 다르다. 옥돌해수욕장은 납작한 자갈이 깔려 도르르 맑게 굴러가는 소리가 좋고, 바다 바로 앞에서 해물라면을 먹을 수 있는 옥돌슈퍼가 있다. 그 반대편 선유도해수욕장은 동해안과 닮은 고운 모래사장이 특징인데, 이곳에 이번 여행의 중대 목표 중 하나인 짚라인도 있다. 위풍당당하게 세워진 높이 45m의 전망타워는 가까이 갈수록 점점 높아져 자신감 있게 온 이들의 오금이 저릿해질 정도다. 전망타워부터 반대편의 솔섬까지 무려 700m를 횡단하는데, 바다 위 공중 하강 시설 중에서는 국내 최장길이다. 무섭지는 않았느냐고? 사실 무서워할 새가 없었다. 안에서는 출발 직전까지 바깥이 보이지 않아 높이를 실감하기 어려웠고, 안전요원은 모두 숙련된 ‘소울리스’의 면모를 보였기에 그곳에 대기하던 모든 사람은 호들갑을 떨기보다 어엿하고 엄숙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예상한 만큼 시원한 절경이었고 예상하지 못한 만큼 사타구니가 고통스러웠다.
대장봉 전망대는 고군산군도의 명소로 빠지지 않는 곳이다. 대장도에 위치한 대장봉은 해발 142m의 봉우리로 제법 만만하다. 20~30분이면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데 등산로를 잘 골라야 한다. 무턱대고 대장봉 표지판을 따라 가장 가까운 길로 오른다면 엄청난 경사에 네 발로 기어오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바람 피운 할아버지에게 분노해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할매바위가 있는 길로 가야 인간다운 모습으로 인증샷을 찍을 수 있다. 산행을 마치고 나면 모름지기 잔을 채워야 하는 법. 대장도에 인접한 장자도에는 갖은 해물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다. 다만 평일에는 저녁 6시만 돼도 문을 닫는 곳이 많으니 허탕치지 않기 위해 미리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밑반찬과 함께 신선한 해물이 한바탕 펼쳐지는데 멍게와 해삼은 물론, 지금 가장 단맛이 오른 키조개까지 푸짐하다. 여기에 메인으로 바로 잡은 활어회가 한 접시 가득 등장한다. 우럭, 광어, 부서 등 언제 먹어도 좋은 흰살생선은 회로, 초여름부터 제철인 밴댕이(군산에서는 반지라고 한다)와 노래미는 매콤새콤한 회무침으로 먹는 게 좋다. 쑥갓과 무를 듬뿍 넣어 시원하고 얼큰한 매운탕까지 푹 끓여 먹고 나면 바다는 어느새 어둠 속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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