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울 건 없다고, 쓰고 싶은 내 소설을 쓴다고 말하는 소설가 서이제. 

니트 베스트와 톱은 코스(Cos). 옐로 컬러 포인트의 잔은 솔루나리빙(Solunaliving).

서이제

2018년 등단 이후 소설집 <0%를 향하여>를 썼다.

이름이 특이한데 무슨 뜻인가?
소설을 쓴 이후의 삶이 이전의 삶과 딱 나눠졌으면 하는 바람에 지은 필명이다. 이제부터 다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 했다. 이름에서 성별이 추측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소설을 쓰면서 이제 좀 달라졌나?
되게 능동적으로 바뀌었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다. 영화도 좋고 영화 공부도 재미있었는데 영화는 찍으려고 하면 돈과 인력이 들지 않나. 창작하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실천하기도 어렵고, 실패했을 때 타격감도 커서 습작할 때도 항상 신중해야 했다. 그런데 소설을 써보니까 이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소설은 망치더라도 돈도 친구도 잃지 않으니 무조건 해볼 만한 실패구나. 이런 식이라면 계속 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첫 소설도 영화 때문에 쓰게 됐다고 들었다.
영화 공부를 할 때 좋은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말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마치 좋은 글만 있으면 좋은 영화가 완성되는 것처럼 말하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직접 소설을 써보면 머리로 아는 것 외에 다른 걸 알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 당시 찍은 영화를 소설화하면서 이미지와 텍스트를 비교하는 작업을 했다. 

작년부터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오늘의작가상을 연이어 수상했다.
상을 받아서 기쁜 건 맞고 상금도 받으니 더 좋다.(웃음) 그런데 결과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도 해볼 만하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하는 편이다. 과정에서 만족을 얻는 게 중요한데, 소설 쓰기는 그 과정에서 이미 되게 큰 만족감을 준다. 

독자 반응도 찾아보는 편인가?
많이, 열심히 찾아본다. 독자가 남긴 댓글, 리뷰와 계속 대화를 한다. 반박할 때도 있고 자각하지 못한 부분을 한 번 더 생각해본다. 내가 쓴 글을 읽고 누군가가 그에 대한 글을 쓰고, 내가 그의 글을 다시 읽는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다. 

좋지 않은 반응에는 주눅이 들기도 하나?
대부분은 신경 쓰지 않지만, 어떤 거는 약간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럼 그 뒤에 ‘웃겨’를 붙인다. 나를 비난하다니 웃겨. 그럼 기분이 괜찮아진다. 내 소설이 상 받을 자격이 없다고? 진짜 웃기네. 

첫 소설집인 <0%를 향하여>를 읽는데, 솔직히 재미있어서 놀랐다.
어릴 때 꿈이 코미디언이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앞에 나가서 막 웃기는 타입은 못 됐다. 하지만 누군가를 웃기고 싶은 열망은 계속 남아 있어서 그런 게 반영되는 것 같다. 강박에 사로잡힌 것 같을 때도 있는데, 그때는 다른 톤의 소설을 쓰면서 이런 나를 멈춰보기도 한다. 

소설 중간에 QR코드를 넣는가 하면 순서가 뒤섞인 작품도 있다.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는 이유가 있나?
기본적으로 형식이 곧 주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전통적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에도 형식은 있다. 익숙해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형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주제나 이야기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곳에서’라는 작품에서는 스도쿠 형식을 차용했다.
발표 시기와 상관없이 실제로는 처음 쓴 소설이다. 네 번 정도 다시 썼다. 다 쓰고 나니 내가 하고 싶은 게 이런 방식의 말하기였음을 깨달았다. 레이어가 겹치고, 파편적으로 쪼개져 있지만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그런 이야기. 이건 영화를 할 때부터 꿈꿔온 방식이었고, 이제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쓰면 되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다양한 골조를 짜는 게 어렵지는 않나?
어릴 적, 레고 블록이랑 퍼즐을 진짜 많이 했다. 학교 수업 끝나고 날마다 8시간씩 했으니 거의 장인급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여러 가지를 조합하면서 계산하는 일이 어렵기보다는 재미있다. 영화의 편집과도 비슷하다. 쇼트와 쇼트를 배열하면서 시간을 뒤섞기도 하니까. 

새로운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글쓰기를 시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체 감각만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시대는 지났다. 사물을 바라볼 때도 카메라와 협력하고 있지 않나. ‘인간의 감각은 기술과 협력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고, 그걸 소설에도 반영하고 싶었다. 현재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뿐 아니라 시대가 어떤 기술과 함께 가는지 보여주는 것도 시의성이라고 생각한다. 

청춘 소설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청춘은 내게 너무 낯선 말인데 데뷔했을 때부터 내 소설이 청춘소설이라는 거다. 진짜 청춘인 나이는 청춘이라는 말을 안 쓰지 않나? 그럴 의도가 없었으니 처음에는 그 말을 없애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제도권 안에서 소설을 쓰다 보면 특정 이미지화될 수밖에 없다. 쓰고 싶은 게 많다면, 그중 지금밖에 못 쓰는 걸 먼저 선택한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그 감각이 없어져서, 내가 변해서 쓸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래 얘기를 썼던 거다. 

90년대생 작가를 묶어 조명하는 흐름도 있었다.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라.(웃음) 확실한 건, 이전 시대와 단절하고 위 세대의 소설과 다른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나만의 고유한 소설만 있다. 90년대생 작가라고 묶어서 불리는 작가도 결국 개별적으로 다 다른 소설을 쓰고 있지 않나. 오히려 너무 쉽게 이해하려는 방법이 아닐까? 작가별로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좋겠다. 

문학의 지속성을 의심해본 적 있나?
소위 문단이라는 곳에 발을 디디니 문학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 문학의 지속가능성을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반문해보자면, 그럼 가능하지 않다고 하면 안 할 건가? 어쩔 건데?(웃음) 그래서 문학이 시장 안에서 존속 가능할지가 아니라 앞으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더 생산적이다. 

문학은 어디로 나아갈 수 있을까?
모든 게 가시적인 성과에 매몰되어 있는 것 같다. 눈앞에 성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치부된다. 과거에 새로운 예술이 등장할 때와 같은 혁명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고요한 혁명은 가능하다고 본다. 당장은 우리 소설이 시장 안에서 가시적 성과가 없다고 해도 이 소설을 읽고 자란 10대가 어떤 삶을 살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고요하게, 오랜 기간에 걸쳐 혁명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고요한 혁명이란 말이 인상적이다.
나도 원래 진짜 책을 안 읽는 사람이었다. 왜 읽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네이버 지식인에 영화감독 되는 법을 물었더니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더라. 그래서 좌절하고 책을 억지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책 읽기의 즐거움을 알게 된 거다. 결과적으로 내 삶은 책과 영화를 통해 바뀌었다. 책이 많이 팔리지 않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계속 한국 문학을 읽고 있고, 어딘가에서 삶의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앞으로 더 써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번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두개골의 안과 밖’을 쓰면서 동물의 언어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어떤 방식으로 써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우연성에 의거한 글쓰기를 시도해보고 싶다. 글씨가 쓰인 종이를 뿌려서 무작위로 조합된 것들을 써 내려가거나 주사위를 던지며 쓰는 소설처럼 나조차 예측할 수 없는, 우연과 협력해 쓰는 소설을 시도해보고 싶다.

서이제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에게 추천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나는 운명론자라서 운명에 맡기겠다. 펼쳐지는 페이지부터 읽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