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우면서도 자꾸 안 가본 길로 간다. 모든 무대를 오가는 차지연의 등 뒤로 새로운 길이 생긴다.

 

셔츠와 팬츠는 모두 레호(Lehho). 골드 링과 골드 넥크리스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어제 기쁜 소식이 있었어요. 한국 뮤지컬 어워즈에서 주연상을 받았죠.
생각지 못한 상이기도 했고, 제게 의미가 깊은 <레드북>으로 받은 상이라 더 남달랐어요.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넘어서, 배우로서의 방향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만감이 교차한 밤이었나요?
쉽게 잠들지 못했어요. 남편과 새벽까지 이야기하다가 울기까지 했어요. 스타가 되고, 대중적으로 나를 알리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기쁜 일이지만 이제 선배 배우로서의 길을 잘 걸어가는 게 중요하겠구나 싶었어요. 무대를 사랑하고, 무대에 오르는 것 자체가 꿈인 친구들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왜냐하면 저도 평범하게 지내다가 뮤지컬 무대를 만난 사람이니까.

프레스콜 때부터 느꼈지만, <레드북>을 남달리 소중히 여기는 게 느껴져요. 왜 특별한 거죠?
저는 늘 어둡고 ‘세다’고 말하는 작품과 역할들을 맡아왔는데 <레드북>의 안나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죠. 밝고, 부드럽고, 어린 소녀 같은 발랄함이 있어요. 그래서 작품을 받는 순간부터 걱정이 정말 많았어요. 이걸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캐스팅 발표하는 날이 두려웠을 정도로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게 관건이었겠어요.
감사히도 너무 좋은 팀을 만났어요. 특히 박소영 연출님이 저를 많이 믿어주셨어요. “지연아, 넌 사랑스러운 아이야. 그런데 넌 왜 그걸 몰라?”라고 진심으로 말씀해주셨죠. 덕분에 작품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그래, 내가 가진 기존의 이미지를 쉽게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내 안에 갖고 있는, 안나와 이어지는 부분을 최대한 끌어내보자. 돌이켜보면 거의 초인적인 힘이었던 것 같아요. 나도 몰랐던 부분이 튀어나오면서 아이디어도 적극적으로 내게 됐고요.

안나 역할과 닮았네요.
맞아요. 그래서인지 안나의 넘버 중에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곡은 예사 넘버로 불러지지가 않았어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걸 딛고 성장하는 이야기니까요.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건 흔치 않아요. 배우로서 행운이죠.

작품을 받고 두려움을 느낀다는 건 조금 의외예요. 강하고 능숙한 사람처럼 보이니까요.
늘 작품을 만나게 되면 두려움부터 앞서요. 그게 시작이에요. 초연이든 재연이든 삼연이든 상관없어요. 이번에는 내가 뭘 더 찾아야 하는 걸까?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부터 들어요.

오래 자신을 증명해왔으니 이제 자신감을 가져도 충분하지 않나요?
저는 왜 제 자신을 믿지 못할까요? 조금 더 여유가 있어도 될 텐데 그게 안 돼요. 좋았던 점은 모든 게 끝난 후에야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나쁜 것 같지만은 않아요. 이런 성향 때문에 자만하지 않고 해온 것 같거든요. 전 노래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니까.

노래를 잘 못한다고요?
진심이에요. 전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드라마를 잘 표현하는 사람에 가깝죠. 그래서 노래 연습을 정말 많이 해요. 연출님들이 연습실 좀 오지 말라고. 하하. 안 가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어요.

완벽주의 성향인가요?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면 무대에 서는 게 무서워요. 거짓말로 할 수가 없어요. 하는 척이라도 하면 될 텐데 안 돼요. 과하게 말해서 이건 사기치는 거라는 생각이 막 들어요. 저에겐 배우라면 그 정도를 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

블랙 실크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작년 <모범택시>로 첫 드라마 연기에 도전하며 드라마 시청자도 만났어요. 그것도 새로운 시도였죠.
자꾸 새로운 선택을 하는 제가 저도 이상해요. 편하고 안정적인 길이 있는데 왜 꼭 다른 길로 갈까요. 사실 전 무엇보다 연기를 잘하고 싶은 배우예요.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그렇게 큰 시장은 아니에요. 특히 여자 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은 많지 않고요. 그렇다 보니 어떻게 하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어요. 그 답이 다양한 작품을 만나야겠다는 거였고요.

예를 들면 어떤 작품인가요?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처럼 흔히 젠더프리 캐스팅이라 말하는 역할을 선택한 것도 지금 당장 반짝하는 이슈가 되길 원했던 게 아니에요. 저처럼 조금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후배들이 있을 텐데 그들이 한발짝이라도 편하게 디딜 수 있는 전례가 있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누군가의 길이 된다는 게 값지지만 그만큼 힘들기도 할 텐데요.
오히려 제가 성장하는 게 더 많아요. 그런 경험들이 켜켜이 쌓이는 느낌이 저에겐 행복이에요. 물론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걱정도 많고 겁도 나지만, 모든 게 재미있는 모순이라고 생각해요.

<모범택시>의 대모 역 또한 전형적인 인물은 아니었어요. 남성 주연의 액션극에서 끝까지 맞서는 여성 빌런이 흔하지는 않으니까요.
10년 전쯤 카메라 앞에 섰을 때 무방비하게 놓여서 확 움츠러든 적이 있어요. 마치 다른 나라에 와 있는 듯 언어도 통하지 않는 느낌이요. 정서적으로 잔뜩 체했던 거죠. 그때의 기억 때문에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무서웠는데 어느 날 툭, <모범택시>라는 작품이 왔어요. 메시지가 명확한데 그걸 통쾌하게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방식이 너무 재밌어 보였죠. 다음에 악역을 한 번 더 하게 된다면 제대로 끝까지 가는 악역을 하고 싶어요.

더 끝까지 가고 싶나요?
액션도 제대로 하는 역으로요. 그래서 지금 혼자 액션스쿨도 다니고 있어요. 회사에 얘기도 안 하고요. 저 혼자 가서 펀치도 하고 킥도 차고. 제 외형상 언젠가는 액션을 할 것 같거든요? 그런데 액션도 닥쳐서 갑자기 하려면 생각보다 자세를 잡는 것부터 쉽지 않잖아요. 미리 기본기를 차근차근 쌓아놓고 있어요.

다가오는 3월의 <잃어버린 얼굴 1895>도 그렇고, 창작극을 많이 해왔죠. 창작극의 매력은 뭔가요?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입장에 놓인 배우로서 좋은 창작 작품이 태어나려고 하는 순간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내가 조금 더 애쓰고, 희생하거나 양보하게 될지라도요. 대단한 배우는 아니지만 나의 존재로 조금이나마 이목을 끄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해요. 결국 좋은 반응이 돌아올 때, 아 이 작품이 드디어! 세상에 드러났구나! 그때의 성취감과 행복은 다른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요.

뮤지컬 팬들은 모두 당신을 ‘차언니’라고 불러요. 멋있으면 다 언니라는 말도 있는데, 그렇다면 차언니가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누군가요?
최근 촬영장에서 배우 김미경 선배를 뵌 적 있는데 나중에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로페셔널한 모습과 그 존재감에 완전 반해버렸어요. 유연하게 타협하기도 하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상대가 누구든지요. 그게 너무 정의로워 보였어요. 닮고 싶은 선생님을 만난 것 같아요.

정의로움, 옳음, 책임감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네요. 어떤 의미를 두나요?
이 길을 쭉 걸어오면서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상황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지켜만 봐야 하는 때가 있었어요. 그때 내가 조금 더 힘을 가진 배우가 되고, 그런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바르고 멋지게 사용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앙상블 중에서도 작품에 진심으로 애를 쓰는 배우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회의감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조금 더 바른 방법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아요. 그게 피곤한 길일 수도 있겠지만 보여주고 싶어요. 더 정직한 길을 걸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그런 선배가 있다는 걸요. 우린 같이 가는 거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사람이라면 뭔가가 쌓이기 마련인데, 해소하는 창구가 있나요?
쌓이기만 해요. 그래서 그게 문제예요. 남편이 제발 나가서 친구들 좀 만나라고.(웃음) 그런데 제가 커피도 못 마시고 술담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뭐 하냐고 물어봐요.

그러니까요. 대체 뭐 하세요?
집에서는 끊임없이 정리해요. 계속 쓸고 닦고 쓸고 닦고. 아, 저 케이크 굽는 영상 보는 거 좋아해요. 직접 만드는 클래스도 3개월 전에 등록해놨는데 촬영하느라 한 번도 못 갔네요. 이제 한번 해보려고요.

그 흔한 SNS도 안 하더라고요.
저 초등학교 아니고 국민학교 나왔거든요. 이게 너무 어려워요. 샵(#) 달고 뭘 써야 하는 것 같은데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괜히 시작했다가 너무 서툴러서 실수만 할 것 같아요.

촬영도 다 끝났으니, 이제 좀 쉴 수 있나요?
모처럼의 여유네요. <잃어버린 얼굴 1895> 연습이 막 시작됐어요. 더 바빠지기 전에 케이크를 만들어야죠. 만들고 꼭 보여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