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긴 한겨울의 밤. 술 한 모금을 홀짝이다가 책 한 소절이 떠올라 그 구절을 툭 잘라 적는다.

 

로제 샴페인

“내일 해 뜨자마자 멜렌에게 로랑 페리에, 뢰드레, 돔 페리뇽 등등에 주문장을 돌리라고 이르세요. 인색하게 굴지는 말아요. 당신에겐 재력이 있으니까. 단 하나, 로제 샴페인은 절대 주문하지 마세요. 당연하지 않소. 금의 신비주의보다 장미의 태를 부린 우아함을 더 좋아하다니. 그런 부조리가 어디 있단 말이오! 로제 샴페인을 발명한 사람은 연금술사들이 하려던 것의 정반대를 성공했어요. 금을 석류 시럽으로 바꿔놨죠. 그 말을 끝으로, 사튀르닌은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 <푸른 수염>중에서, 아멜리 노통브

주인공이 로제 샴페인의 존재에 그리 맹렬히 분노한 이유는 화이트도 아니고 레드도 아닌 애매한 정체성 때문이 아닐까. 이 애매함이 로제 샴페인을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샴페인의 상쾌함과 레드 와인의 묵직한 타닌을 모두 품고 있다. 해산물이든 고기든 치즈든 어디에 붙여놔도 모나지 않게 제법 잘 어울린다. 온갖 음식과 취향이 모이는 새해 첫 파티의 술이면 좋겠다.

 

뱅쇼

“지하철을 타고서도 뱅쇼 뱅쇼… 그 이상한 술이름이 계속 혀끝에서 맴돌았다. 그녀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가 그 후 일주일 동안 한 번도 강습에 나오지 않았다. 봄이 오는 길목인 2월 마지막 주인데도 그 주간엔 진눈깨비가 두 번이나 내렸다. 동료들과 삼겹살을 구워 소주를 마시면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날엔 뱅쇼를 마셔야 하는데 말이야.” – <꿈꾸는 마리오네뜨>중에서, 권지예

주인공의 웅얼거림처럼 그 이름도 희한한 뱅쇼는 뜨거운(chaud) 와인(vin)을 의미한다. 와인에 계피, 생강, 육두구, 오렌지 껍질 등 각종 향신료와 꿀 혹은 설탕을 넣고 푹 끓이면 그것이 바로 뱅쇼다. 알코올은 날아가고 각종 향기만 남는다. 후후 불어 마시면 체온이 오르니 추우면 추울수록 찾아 마시게 된다.

 

모스코 뮬

“네가 모스코 뮬을 마시고 싶다고 했잖아. 한 잔에 이십 달러나 했지. 진짜 미친 가격이었어. 게다가 바텐더가 엄청 쌀쌀맞게 굴었어. 그래서 네가 오 달러를 팁으로 줬더니 바텐더가 엄청 친절해졌잖아. 너는 그날 모스코 뮬을 딱 네 잔 마셨지. 한 잔에 이십 달러, 팁까지 더해서 딱 백 달러를 쓰고 일어났어. 네가 바를 나오면서 엄청 싸늘한 표정을 지었던 거 기억나. 그건 업타운에 사는, 한 팔에 작은 강아지를 안고 다니는 부잣집 아가씨가 짓는 표정이었어.” – <천국에서>중에서, 김사과

모스크바(Moscow)의 노새(Mule)라는 뜻을 지닌 모스코 뮬은 심플하다. 보드카와 진저에일에 레몬이나 라임을 취향대로 넣으면 족하다. 모스크바는 그렇다 치고, 노새의 등장은 의아한데 노새의 뒷발에 걷어차이듯이 알코올이 훅 올라온다는 걸 빗댔다는 추측이 많다. 만만히 보고 들이켜다 천국에 갈지어다.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을 버티게 하는 보드카에 걷어차이고 싶지 않다면 경계를 늦추지 말 것.

 

고량주

“가오미 둥베이 지방의 붉은 수수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향이 진하고, 뒷맛이 꿀처럼 달고 취해도 뇌세포에 전혀 손상이 없는 그런 고량주가 되었을까? 어머니는 내게 그 비법을 말해준 적이 있다. 그걸 말할 때 어머니는, 이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이니 절대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 비법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첫째는 우리 집안의 명예가 손상되고, 둘째는 언젠가 우리 자손 중에 누가 다시 양주장이라도 차리게 되면 독점 경영의 우위를 잃게 된다는 거였다.” – <붉은 수수밭>중에서, 모옌

붉은 수수를 원료로 한 증류주다. ‘빼갈’이라는 표현이 익숙하다. 도수가 32도에서 70도까지 올라가는 독주 중의 독주다. 기름진 중국 음식과 잘 맞지만, 어디 한번 술 그 자체만을 즐겨보기를 권하고 싶다. 식도를 타고 흐르는 그 후끈함. <붉은 수수밭>의 작가 모옌의 말처럼 꿀처럼 달고 복숭아처럼 산뜻한 술. 2022년의 첫 태양을 맞는 그 아침에 곁들이는 건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