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는 마지노선이 없다고 말했다. 예민함을 간직하려면 좀 둔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웃음으로.

 

플리츠 스커트가 레이어드된 재킷은 스테판 쿡 바이 분더샵(Stefan Cooke by Boon the Shop). 웨스턴 부츠와 진주 이어클립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종일 우중충한 금요일이네요. 지금 어때요?
컨디션이요? 우중충이고 금요일이고 뭐 이런 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지나온 것 같아요. 살면서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옷을 다 입어본 것 같아요.

2022년 남성복 최신 트랜드가 바로 ‘치마’랍니다. 스테판 쿡과 프라다를 준비했어요. 혹시 오늘 일을 후회해요?
아뇨. 제가 두려움이 좀 많은 편이거든요. 그래도 이런저런 작품을 많이 경험하면서 배운 게 있어요. 작품 속에서 원래 나랑 좀 다르거나 낯선 모습으로 확 변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어요. 하기 전엔 좀 그런데 막상 하고 나면 대체로 결과가 좋았어요. 오늘 화보도 그런 것 같고요. 실패해도 상관없어요. 뭐 어쩌겠어요.

정신이 좀 들어요? 오늘 찍은 사진을 쭉 보니까 어때요?
원래 그냥 이런 후드티에 편한 운동복 바지만 입는 사람인데 패션 잡지나 런웨이에서나 보던 옷을 입어봐서 신기해요.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스치듯 본 런웨이 이미지가 순간 떠오르기도 하고요. 잠깐 다른 세계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재미있었어요. 본 적 없는 제 모습이 여기 있는 것 같아요.

2021년에 공개된 작품이 <싱크홀>, <마이 네임>,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연애 빠진 로맨스>, 이제 막 시작한 <공작 도시>까지 이어져요. 그야말로 소처럼 일했네요.
뭔가 많긴 한데 제 분량이 되게 많거나 오랫동안 촬영한 작품은 없어요. 그래서 여러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기회가 닿으면 어느 곳이든 가보고 싶은 마음이 제 안에 있는 것 같아요. 무섭긴 하지만.

싱글 코트와 레이스업 슈즈는 벨루티(Berluti).

뭐가 무서워요?
너무 잠깐만 나오는 것도 부담스럽고, 너무 오래 나와도 부담스러운 마음인데 어쨌든 저는 이 일을 오래 하기로 마음을 먹었거든요. 어느덧 삼십대 중반인데 나이나 경력에 비해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너무 정리가 안 된 삶을 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어요. 뭐든 경험을 쌓으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뭐든 다 했던 것 같아요. 안정이라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하면 좀 안정적일 수 있지 않을까. 멋지게 해내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조바심 같은 걸 느껴요?
조바심은 없어요. 조바심은 아니고요. 어떻게 하면 일을 오래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거예요. 잘되는 걸 생각하는 건 또 아니에요. 그냥 좀 무섭고, 제가 그릇이 좀 작은 편이거든요. 소심하고요. 타고난 성향인 것 같아요.

그래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뭐예요? 포기할 수 없는 거.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게 제일 중요해요.

좀 헷갈리네요. 적어도 오늘 촬영장에서 당신의 모습과 태도는 부끄러움이나 무서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하나씩 하나씩 만나게 된 역할을 통해서 저를 발견하고 이끌어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됐어요. 그 결과가 대체로 좋았죠. 그럼 어디 한번 그 사람들을 온전히 믿어보자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요즘 특히 더 그런 것 같아요.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도움과 영향을 많이 받았거든요. 오늘도 일단 믿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중요해요. 지금 제 목표는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거니까요.

애니멀 프린트 재킷은 장 폴 고티에 빈티지(Jean Paul Gautier Vintage), 쇼츠는 리바이스(Levi’s), 이너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커리어의 기승전결이 있다면 어디쯤인 것 같아요?
‘기’의 끝자락 정도 아닐까요? 제가 이 일을 한 지 이제 10년 정도 됐거든요. 아직도 시작 단계라고 말하는 건 좀 창피하고요. ‘기’의 끝자락이 맞는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공작 도시>가 방송되기 시작했지만, 촬영은 이미 다 끝났어요. 다음 작품을 기다리면서 잠깐 시간이 생겼는데요. 정리하면서 되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그런 마음이 있어요. 이제 기승전결의 ‘승’으로 넘어가야 할 때인 것 같아서요. 정리해야죠. 앞으로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아요? 감이 막 와요?
아무래도 다음 작품을 함께할 감독님께 달린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함께하는 배우들에게 달린 문제고요. 제가 믿게 될 사람들이고, 저에게 조언해줄 사람들이니까요.

흐르는 대로 물살에 몸을 맡길 생각인가요?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어요. 노력하고 있습니다.

레더 재킷은 렉토(Recto), 앵클 부츠는 처치스(Churches), 타이는 베르사체 빈티지 (Versace Vintage), 팬츠와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웃는 얼굴과 웃지 않는 얼굴 사이의 정서적 격차가 너무 커요. 그거 알아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고요. 웃는 얼굴이랑 안 웃는 얼굴이 되게 다르다고요. 그래서 알게 됐어요. 아 다르구나.

그런 자기 얼굴을 보면 어때요?
제 얼굴에 굉장히 만족하면서 살고 있어요.(웃음) 자존감이 높은 편인지 외모에 불만을 품고 있진 않아요. 웃는 얼굴이 좋다는 말을 듣고 잘 웃으려고 노력을 해봤는데 이상하더라고요. 그래도 노력하면 되겠지 싶어서 열심히 노력해봤는데 그래도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웃길 때 웃고 안 웃길 땐 안 웃는 것으로 그렇게 정리했어요. 저는 진짜 웃길 때만 웃어요. 진짜. 억지로 웃으면 이렇게 돼요.(웃어 보이며)

방금 그 웃음 진짜 어색했어요.
완전 가짜 웃음?(웃음) 보니까 웃는 상태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웃을 수 있는 상태요. 웃을 수 있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그 상태를 만들 수 있다면 웃을 수밖에 없어요. 그 상태를 기억해놓으면 웃음이 필요할 때 딱 웃을 수 있어요. 정서를 기억하는 거죠. 울음도 똑같아요. 웃음이든 울음이든 다 같은 감정이니까.

* 전체 인터뷰와 화보는 <얼루어 코리아> 20221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