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거나 믿지 않아도, 가난한 마음일 때도 주저 없이 갈 수 있는 곳. 그저 머무는 것만으로 벌렁대던 마음이 잠잠해지는 종교 공간의 풍경 안에서.

 

한국 정교회 |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

소위 ‘좋은 브랜드’의 아파트가 솟아나고 있는 마포 어디쯤 한국 정교회 서울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섬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 정교회는 1899년 대한제국에 주둔하던 러시아군과 외교관을 위해 러시아 정교회가 신부를 파견하면서 시작됐다. 가뜩이나 인적이 드문 평일 낮, 연이은 폭염과 폭우로 말끔히 씻긴 듯 한적한 기운만 가득하다. 텅 빈 대성당에 앉아서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비잔틴 양식의 천장 돔을 올려다보는데 화창한 날이 아님에도 어디선가 빛이 모여 내렸다. 유난히 선명한 채도로 그려진 실내 벽화는 확실히 낯선 인상으로 신비로운 감정이 들 법도 하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여운이 남아 꽤 오래 거기에 혼자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암브로시오스 대주교가 베로니카 사무장을 통해 보내온 선명한 메시지. “일치와 협력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걸 잊지 맙시다. 그것이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될 방법입니다.” 무엇을 믿는지와 무관하게 그 아름다운 공간에 다시 가는 건 시간 문제가 됐다.

대한성공회 | 서울주교좌성당

그리스도교는 다사다난한 분열의 역사와 함께 오늘날에 이르렀다. 성공회는 자신을 그 분열의 창조적인 의미와 아픔과 한계를 인정하고 되새기는 교회라고 말한다. 덕수궁 옆에 자리한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은 1922년 아더 딕슨의 설계를 뿌리로 한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눈길을 끈다. 색감이나 문양의 톤이 낮고 부드러우며 단순하다. 색유리를 머금고 은은히 확산하는 빛줄기를 만지듯 보고 있자니 쫓아오던 고민이 저만큼 멀어진 기분이다. 성당을 떠날 무렵에야 스테인드글라스에 우리 조각보에서 볼 수 있는 조형적 아름다움을 반영한 사실을 알았다. “성공회는 나라와 문화마다 다양한 색깔을 지니며, 한 교회 안에서도 신앙과 신학의 흐름이 매우 다양합니다. 모두 매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굳센 믿음의 길을 걸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서울 교구장 이경호 베드로 주교의 말.

 

천주교 | 서울 대교구 불광동 성당

“건물 촬영 때문에 연락주셨나요?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이른 아침이 예쁘니까 참고해주세요.” 수천 번은 안내한 듯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능숙하지만 따뜻하다. 한국 현대 건축을 이끈 김수근이 남긴 마지막 건물. 마산의 양덕성당, 장충동의 경동교회와 함께 그의 3대 종교 건축물이자 한국의 100대 건축물에도 이름을 올린 불광동 성당은 건축을 공부하는 이들의 순례지다. 김수근의 시그니처인 빨간 벽돌도 벽돌이지만 전통적인 종교 건축이 의도하는 화려함과 위압감을 배제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본당으로 향하는 출입문이 건물 정면에 거대한 파사드의 형태로 존재하는 대신 좁은 통로를 통과하면 소박하게 나 있는 것도 그렇고. 마침 미사 시간이다. “살면서 고통과 걱정이 없고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라는 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런 인생은 세상에 없습니다. 삶의 행복과 불행은 나 자신의 선택으로 결정됩니다.” 주임 신부인 백성호 세례자 요한의 묵상. 그 기도를 아로새기며.

 

남대문교회 | 대한예수교 장로회

영원한 건 없다는 걸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 개발과 경쟁력이라는 명분 아래 하루하루가 낯설게 된 서울, 고층 빌딩 숲속 등잔 밑 공간인 남대문 교회의 석조 건물은 한국 현대사의 기록이라고 할 만하다. 고려대 본관, 중앙고 본관, 영락 교회 등 고딕 양식 석조 건축의 기틀을 마련한 박동진 건축가가 설계했다. 외관은 단단하고 우아한 회색 돌이 아귀를 딱 맞춘 처음 모습 그대로이지만 예배실 정면에 자리한 웅장하고 화려한 파이프 오르간은 외관의 모습과 또 다른 남대문 교회의 상징이다. 수도권 거리 두기 4단계 조치를 앞둔 마지막 주일, 신해선 사무장은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온라인 영상 예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일 예배 목사님 말씀을 대신 전합니다. 모두가 시대적 상황을 바로 깨닫고, 분별해야 합니다. 겸손과 인내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안전과 건강입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아름다운 연주도 잠시 멈추겠지만.

 

대한불교 조계종 | 봉인사

같은 층에 마주 보고 있는 친근한 남매 <지큐> 6월호 송중기의 인터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제일 힘들 때마다 찾는 곳이 절이거든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절밥도 되게 좋아하고요. 정서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많이 쉬게 해주는 곳이에요.” 절이란 무릇 종교와 신념을 떠나 꽤 많은 이들에게 평온함을 주는 곳이 아닐까. 여행을 가든 등산을 가든 한 번씩 들르는 절의 냄새나 전경, 특유의 리드미컬한 박자가 중독성이 있는 목탁과 염불의 조화로운 사운드, 세배와는 동작부터 마음가짐까지 다 다르겠지만 절을 올리는 사람의 숭고한 얼굴은 익숙하고 선명하다. 서울의 이름난 절의 방문과 촬영을 못하게 된 상황에 사진가 차혜경이 템플 스테이 취재차 다녀온 남양주 봉인사의 사진을 보내왔다. “명상의 목적은 편안해지는 거예요. 그건 얻는 게 아니라, 나를 자각하는 순간 저절로 따라오는 겁니다. 언제 한번 오시지요.” 주지 스님인 적경 스님의 말씀이다. ‘절밥도 맛있나요?’라는 질문은 그저 마음의 소리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