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으로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지고 몸과 영혼마저 깡그리 얼어붙는 세계 각지의 공포영화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한여름 밤을 위하여.

 

<로우> | 벨기에

세상 모든 욕망에는 옳고 그름이 없을 것이다. <로우>의 주인공 소녀 쥐스틴은 한 번도 짐작조차 해본 일 없는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그 욕망을 향해 치열하게 반응해나간다. 식욕과 성욕이라는 원초적인 욕망 그 자체에. 엄격한 부모 밑에서 평생 채식을 하며 자란 쥐스틴은 대학 신입생 환영회에서 토끼 콩팥을 강제로 먹는 폭력적인 신고식을 치른다. 고기의 감각에 눈뜬 그날 이후 쥐스틴은 육식을 넘어 인육을 먹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마저 느끼게 된다. 쥐스틴은 이제 자신의 욕망을 멈출 수 없다. 그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어떤 모습일까. 이 영화를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 고기 맛에 눈뜬 소녀의 황홀경이 그저 아름답고도 기이한 특별한 성장영화.
– 최지웅(영화 포스터 디자이너) 

 

<어스> | 미국

<어스>는 세상에 나의 그림자처럼 행동하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도플갱어를 주제로 다루는 영화는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의 영화들은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반면 조던 필 감독은 그림자 인간을 과학으로 설명하는 쉽지 않은 선택을 한다. 괴물이나 귀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현실 안에서의 리얼한 공포가 주는 긴장감과 이미지, 사운드가 가지고 오는 공포가 상당하다. 지금 우리의 적은 그 무엇도 아닌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 또한 그 어떤 귀신이나 괴물보다 무섭다.
– 김지수(영화 홍보대행사 올댓시네마 팀장) 

 

<서스페리아> | 이탈리아

다리오 아르젠토 지알로의 <서스페리아>와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의 줄기는 동일하다. 나는 오리지널 원작보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리메이크 버전을 더 좋아하는데 감독 특유의 과시적인 야심가의 면모를 귀엽게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물의 뼈가 튀어나오고 장기가 쏟아지는 장면이 이어지는 새로운 <서스페리아>를 본 다음 과연 이 영화의 장르를 호러라고 부르는 게 적절한지 고민하며 극장을 나선 기억이 난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마녀 오컬트라는 주제에서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건드릴 수 있는 테마는 죄다 건드리는 과잉 주의자의 영화를 완성해냈다. 영화든 옷이든 사진이든 음악이든 결국 강렬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원한다. 소름이 쫙 끼치도록.
– 하예진(누데이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인비저블맨> | 오스트레일리아

배우 엘리자베스 모스는 늘 여성을 향한 불합리한 상황을 겪는 여성을 연기해왔다. 여성이 겪는 그늘진 상황 속에는 늘 표정을 지운 그녀의 얼굴이 있다. 투명 인간을 소재로 한 <인비저블맨>에서 엘리자베스 모스는 강압적인 남편 애드리안에게서 도망치는 세실리아로 분한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생각까지 통제하려는 남편에게서 그녀는 용기를 내려 한다. <인비저블맨>은 완벽한 음표를 기반으로 한 한 편의 사회 공포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귀신이나 유령은 없지만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학대라는 공포가 존재한다. 영화의 마지막, 세실리아가 투명 인간 슈트를 들고 가는 장면을 생각한다. 나는 그 슈트가, 그녀가 미래에 맛볼 자유와 모험을 상징하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그 영화의 제목은 <인비저블 우먼>이 될 것이다.
– 페비오 임미디아토(<보그 인디아> 패션 에디터) 

 

<드라큐라> | 영국

<대부> 시리즈와 <지옥의 묵시록> 등을 만든 할리우드의 거장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1992 년에 연출한 <드라큐라>는 브램 스토커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들 중에서도 유난히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드라큘라 백작의 게리 올드만, 반 헬싱 교수의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는 이 영화를 더욱 기품 있게 만들어주며,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위노라 라이더와 키아누 리브스의 모습은 지금 보니 소름 돋게 아름답다. 디자이너인 내게 이 영화의 비주얼은 다양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주는데 세트 디자인, 조명, 헤어와 메이크업, 특히 웬만한 컬렉션보다 높은 완성도와 미감을 자랑하는 의상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작품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여전히 세상 모든 뱀파이어의 열렬한 팬이다. Lov e N ev er D i es .
– 센센리(패션 브랜드 윈도우센 디자이너) 

 

<광란의 타이어> | 프랑스

관광객이나 이따금 찾는 사막의 작은 마을, 그 외로운 고속도로를 홀로 굴러다니는 오래된 타이어가 있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굼벵이는 구르는 재주만 있지만 로버트에게는 그 이상의 능력이 하나 있으니 바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폭파시킬 수 있는 초능력. 재미 삼아 콜라캔도 터트리고 병도 깨고 토끼도 죽여보지만, 한 여성에 대한 짝사랑이 좌절하면서 로버트는 이제 마을 전체를 통째로 없애버리기로 작정한다. 사이코패스 타이어가 마구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독특한 발상 그 자체가 마음에 든다. 게다가 이 영화의 감독은 사운드가 은근히 폭력적이고 실험적인 일렉트로닉 DJ 미스터 와조. 미친 상상력 하나만으로 장르영화의 긴장과 재미를 말쑥하게 뽑아내는 그의 능력이 부러워 죽겠다.
– 공성원(스타일리스트) 

 

<주온> | 일본

한때 내가 ‘ 무서운 영화 ’ 마니아였다는 걸 잊었다. 그때도 ‘고어’는 크게 선호하지 않았지만 피가 튀는 슬래셔부터 <로즈메리 베이비> 같은 오컬트 무비를 즐겨 봤고,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전지현의 영화인 <4인용 식탁>은 D VD까지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슬래셔 무비는 볼지언정, 오컬트 무비에서는 떠나게 되었는데 바로 극장에서 <주온>을 본 후였다. 주인공이 이불 속에서 귀신과 눈을 마주치는 그 장면에서, 나는 기겁을 했다. 한이불을 덮고 사는 게 귀신이라니! 귀신이라니 ! 게다가 <주온>의 그 소름 끼치는 음향 효과는 어떻고. 아직도 ‘토시오 ’가 무서운 아이의 대명사로 불리는 걸 보면 나만 느끼는 공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심약함을 인정하고 오컬트 영화에서 ‘탈덕’을 하게 된다. 그후 공포 영화는 피하면서 살았는데 몇 해 전 <곡성>을 보고 또 한번 다짐했다. 공포 영화를 보기에 나는 너무 심장이 약하다는 것을.
– 허윤선(<얼루어> 피처 디렉터) 

 

<알 포인트> | 한국

전쟁은 그 자체가 공포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전쟁 영화는 가장 두려운 공포 영화인지도 모른다. 6개월 전 캄보디아 로미오 포인트에서 작전 수행 중에 실종된 18 명의 부대원들로부터 구조 요청이 들어온다.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최태인 중위를 지휘관으로 열 명, 혹은 아홉 명의 수색 소대를 파견한다. 여기는 밤에는 어둠뿐이며 낮에는 안개로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곳이다. 이 영화는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의 이야기다. 2004년 개봉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이제 훌쩍 자라 어른이 됐다. 물론 평범한 또래의 남자들처럼 군대도 다녀왔다. 그 치열한 전쟁터에서 그들이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한 건 무엇일까? 과연 그 실체가 있기는 했던 걸까? 그리고 그들은 무사히 귀환할 수 있을까?
– 이종현(비주얼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