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좋아하는 술
저도수, 달콤한 술에는 여지없이 ‘여자들이 좋아하는 술’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정말 그럴까? 여자들이 좋아하는 진짜 술에 대하여.
여자라면, CS
‘여성 취향 저격!’ 문구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혹시 당신의 세상엔… 여성이 한 명뿐?
이 문구는 과일소주나 단맛이 강한 스파클링 와인처럼 알코올 도수가 낮고 첨가물로 단맛을 끌어올린 술에 흔히 붙는다는 점에서 악질적이다. ‘여자들이 이런 거 좋아하지’라며 취향을 젠더화시키고 얕잡아보는, 협소한 과녁판만을 가진 저격수들에게 고한다. 여자라면 CS(Cask Strength)다!
일반 위스키는 병입 전에 물을 넣어 알코올 도수를 조절하는 데 반해 CS 위스키는 원액 그대로 병입한다. 증류소의 캐릭터를 가장 진하게 느껴볼 수 있는, 화장품으로 따지면 에센스인 셈. 나의 최애는 알코올 도수 60도쯤 하는 ‘블랑톤 스트레이트 프롬 더 배럴’인데, 60도가 각도가 아니라 도수라고요? 네, 괜찮습니다. 여성의 몸은 강인하니까요.
알코올 함량 부족할 일 없게 해주는 이 위스키는 맛도 디자인도 제대로 갖췄다. 오크 배럴이 연상되는 아름다운 유리병과 말을 탄 기수의 조각으로 장식된 코르크는 비슷비슷한 모양의 술병들 사이에서 영롱한 존재감을 뿜는다. 코냑을 연상시키는 화사한 향과, 바닐라 크림이 꽉 찬 빵을 베어 문 것 같은 버번 특유의 부드럽고 달콤한 풍미는 압도적이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채운 뒤 반쯤 몸을 담그고 블랑톤을 홀짝이면 더 이상 러쉬 입욕제는 필요 없다.
블랑톤은 ‘존 윅 위스키’로도 불린다. 영화 <존 윅>에서 존 윅(키아누 리브스 역)이 부상을 입었을 때 진통제 대신 마셔서다. 이 장면은 블랑톤 품귀 현상까지 빚었다. 존 윅처럼 마실 일이야 없겠지만, 마음의 상처에도 훌륭한 진통제가 되어줄 수 있다는 걸 다들 간파했던 게 아닐까. 나에게도 그렇다. 여성을 한데 싸잡고 낮잡아보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블랑톤 위스키를 연다. 누군가에겐 여자답지 않지만 30년 넘게 여성으로 살아온 내 기준에는 한없이 나다운 술을 마신다.
CS 위스키 정도는 되어야 힘을 얻는 나, 제법 여자답죠.
– 김혜경(제일기획 AE, 팟캐스트 ‘시시콜콜 시시알콜’ 진행자)
달지만 센 술의 정석, 주정강화 와인
주정강화 와인을 좋아한다. 양조 과정 중 ‘브랜디’와 같은 증류주를 더해 알코올을 ‘강화’했다는 의미로 주정강화(Fortified) 와인이라고 부르는 그 술이다. 알코올 도수가 20도 정도 되고, 단맛은 모스카토 다스티보다 훨씬 진하다. 10여 년 전, 유럽 출장 중에 처음 만난 이 와인은 ‘기 쎈’ 이름부터 마음에 쏙 들었는데 역시 한 모금 맛보자마자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평소 위스키를 즐기는 나에게는 초콜릿, 견과류, 건과일 계열이 단맛이 훨씬 응축된 형태로 훅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식사 후 주정강화 와인을 한 모금, 추운 날 집에서 잠들기 전 한 모금, 배가 고플 때 한 모금씩 꾸준하게 즐겨왔다. 언젠가 이 술에 덧입혀진 글로벌한 편견에 대해서 들은 적 있다. “할머니들이 집에서 마시는 와인.” 애초에 길고 긴 해상 운송 과정에서 변하지 말라고 주정을 더하는 형태로 개발된 와인이기 때문에 한 번 열어도 두세 달은 냉장고에서 거뜬히 버티는 터라 혼자 사는 외로운 할머니들이 야금야금 먹기 좋다는 의미로 생겨난 시대착오적인 편견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에서는 한 가지 편견이 더 붙는다. “달아서 여자들이 좋아하는 술.” 수년 전 ‘챔피언’이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한국계 런던 베이스의 여성 바텐더 모니카 버그(Monica Berg)가 잠깐 내한했을 때 인터뷰를 하며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정말 여자들이 더 달콤한 칵테일을 선호하나요?” 그때 그 질문을 듣고 ‘뭐라고요오오?’라는 듯 의아한 표정을 건넸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이 편견에 정면으로 맞서는 마음으로 나는 줄곧 달콤한 술에 대한 예찬을 이어왔다. 그리고 정확하게 외칠 수 있다. 나는 단순히 ‘달콤한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오크통에 20년 숙성해 달콤함과 오크향이 하이브리드가 된 데다 산회의 향까지 더해져 끝 맛에 독특한 산미가 이어지는 토니(Tawny) 포트 와인 20년 숙성 주정강화 와인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직접 와이너리를 방문해보고 너무 만족해 스태프들이 입는 점퍼까지 기념품으로 사온 그라함(Graham’s) 와이너리의 것을 최고로 친다. 달콤한 술을 좋아한다는 것으로는 취향 이상의 그 어떤 것도 추론할 수 없다. 여자라서, 술을 몰라서, 술이 약해서, 입맛이 초보라서 하는 예측으로 이어질 수 없는 철저히 개인의 입맛일 뿐이라는 걸 내가 증명하며 살고 있다.
–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저자)
코가 깨져도 좋은, 빼갈 고량주
나는 술 마시기를 꽤나 좋아하는지라 맥주, 와인, 막걸리, 주종을 가리지 않고 마시지만 가장 편안한 사람과의 술자리에서는 ‘쎈 술’, 독주를 마시길 좋아한다. 이런 도수가 높은 술은 나의 행동거지를 신경 써야 하고 다음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편치 못한 자리에서는 쉽게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편안한 이들과 솔직해지고 싶을 때, 빠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싶을 때, 내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때에만 함께할 수 있기에 독주는 나에게 더욱 특별한 애정과 의미가 있다. 다양한 독주 가운데서도 가장 사랑하는 술은 고량주이다.
왜 좋아하냐 묻는다면 일단 맛이다. 마실 때면 가장 먼저 입안에 달콤한 꽃향기가 퍼진 뒤 목을 타고 내려갈 때 느껴지는 타 들어가는 특유의 느낌이 좋다. “지금 술이 들어갑니다!”라고 외치는 듯한 목넘김은 첫 입부터 흥이 오르게 한다. 화끈하게 치고 빠져버리는 깔끔한 뒤끝이 좋다. 숙취 후폭풍에 시달리며 침대 위에서 다음 날을 보내기에는 체력도 시간도 따라주지 않는 나 같은 회사원에게 이만한 술이 없다. 즐기는 만큼 즐거운 사건사고(?)의 추억도 많아서, 그것도 좋아하는 이유다.
고량주의 맛을 처음 알게 해준 것은 중국 유학 시절을 같이 보낸 나의 위험한 친구들이다. 당시 나에게는 금요일 밤마다 함께 고주망태가 되는 한량 같은 동성 친구 두 명이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던 유학생 신분이라 좋은 백주를 마시진 못했으나 저렴한 고량주에 옌징 혹은 하얼빈 맥주 그리고 각종 꼬치를 한 다발 사서 여자 셋의 도원결의 북경라이프를 즐기곤 했다. 조금 더 취하고 싶은 날에는 맥주까지 더하여, 고량주 한 잔에 맥주 반 잔(맥주는 꼭 하얼빈으로!)을 섞어서 한입에 털어먹는 기행도 일삼곤 했다. 당시 고량주는 여행 중이던 우리에게 구세주 같은 존재가 되어주기도 했다. 북경에서 출발해 30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는 계림행 기차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먹고 자고 떠드는 것뿐. 좁디좁은 3층 침대 기차에 몸을 실은 지 10시간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더 이상 잠도 오지 않고 좀이 쑤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조금 미쳐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고량주를 가방에서 꺼냈다. 빠르게 들이붓고 빠르게 뻗을 수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기나긴 무료함과 불편함은 40도에 육박하는 알코올의 힘으로 사라졌고, 정신이 들고 보니 곧 도착지였다. 물론 이 독주에 아름다운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량을 넘기고 마신 고량주 때문에 문자 그대로 코가 깨진 적도 있었으나 여전히 고량주의 그 독하고 즐거운 맛을 포기하지 못하겠다. 여자들이 저도수의 약한 술을 선호할 것이라는 편견이 존재하지만 나를 포함해 내가 아는 여자들은 맛있는 모든 술을 좋아한다. 설상 코가 깨져도!
– 정다솔(SBS 콘텐츠프로모션팀)
무궁무진한 진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맛을 모르겠는가.” 이따금씩 ‘가난한 사랑 노래’ 시 구절처럼 되뇌곤 한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의 온도로 탄식하듯 말해야 한다. 아버지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 때부터의 유전은 하필 나한테 왔다. 그로 인해 말술을 마시는 안동 김씨의 유전을 받은 내 동생들은 맥주 같은 건 콜라처럼 마시다 배가 불러 멈춘다. 양천 허씨의 유전을 받은 나는 맥주 한 모금에도 얼굴에 홍조가 드리운다. 좀 맘먹고 마셔보면 두피부터 발가락 끝까지 빨개지며 홍인이 된다. 이 꼴을 처음 본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한다. “얘 좀 봐. 이 집 술은 네가 다 마셨나 보다!”
하지만 남들보다 알코올 분해효소가 적다고 해서, 맛을 모를까? 거슬러 올라가자면 한때 나는 술과 음식 담당 기자이기도 했다. 김영란법이 없던 시절, 주류 회사의 가장 잦은 이벤트는 시음회였고 나는 빈티지 샴페인부터 진귀한 위스키에 이르기까지 맛을 보곤 했고 보르도와 말보로, 토스카나, 나파에 이르는 세계의 와이너리와 증류소를 취재했다. 맛있는 것 중 더욱 맛있는 것을 맛보며 내 미뢰는 훈련되고 더욱 예민해졌다. 그러니까 아는 맛이 더 무섭듯이, 나도 술의 맛을 좋아한다.
취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게 술’이란 술꾼들의 명제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맛없는 술은 안 마시고 맛있는 술만 골라 마신다. 고소한 잣막걸리며, 톡톡한 향이 기분 좋은 소홍주며, 언제나 좋은 화이트 와인이며… 늘 청량한 진이며. 한때 약으로 쓰였던 진은 안에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향이 확확 달라진다. 주니퍼베리는 기본이지만 다른 재료를 얼마든지 넣을 수 있다. “진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제조하기 쉬운 술일 겁니다. 누구나 크래프트 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취재로 만난 세계적 바텐더가 내게 말했듯이, 진을 만드는 사람들은 다양한 재료를 넣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중이다. 진을 즐긴다면 지금도 즐길거리가 무궁무진하게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진은 주로 토닉으로 만들어 먹기에 알코올의 양을 슬쩍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술이 약한 내게 적절한 술이다. 흥을 위해서는 적당히 타고, 오래가고 싶으면 약하게 타면 되니까. 그러니 말이다, 술이 약하다고 맛을 모르겠는가…? 내 입술에 닿는 너의 차가움, 마셔달라고 마셔달라고 하는 주니퍼베리의 향기… 술이 약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때로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 허윤선(<얼루어 코리아> 피처 디렉터)
척하면 카스
이 술을 주문할 때, 우리는 흔히 고유명사보다 보통명사를 먼저 호명하곤 한다. 양조장의 명칭과 술의 특정 에디션을 바텐더 앞에서 암호처럼 나열하는 것이 아마추어 술꾼의 자부심임에도 불구하고. “저희 맥주 세 병 주세요!” 술집 주인의 무뚝뚝한 말투에 실려, 술의 이름은 그제서야 들려온다. “카스랑 하이트 중에 뭐 마실 거예요?”
갈색 유리병의 뚜껑을 딴다. 좌중에 긴장감은 없다. 모두가 이 술의 맛에 대하여 알고 있다. 열일곱, 열아홉, 스물하나, 처음 술을 입에 댄 나이는 모두 달라도 한국인의 ‘첫 맥주’는 이 주종이었을 확률이 높다. 국산 라거. 한창 수제 맥주가 유행하기 시작하던 시기, 일군의 미식가들은 국산 라거의 풍미를 빗대며 묽고 거품만 부글거리는 ‘말 오줌’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금 더 인용하자면 ‘제조 공정상 몰트와 홉의 비율이 낮은 발포주’라는 설명이 있었다. 잘 유통되고 관리된 국산 맥주는 오래된 수제 맥주보다 오히려 맛있을 수 있다는 전문가의 코멘트, 한국 라거의 싱거운 풍미가 한식과 잘 어울린다는 고든 램지의 증언(비록 오비 맥주의 모델로 일하는 중이긴 했지만)이 이어지며 말 오줌 운운하는 비웃음이 사라지긴 했으나, 그렇다고 카스의 맛이 싱겁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다. 카스를 따르는 순간 과연 누가 맥주와 거품 사이 ‘황금 비율’에 신경을 쓸까? 연노랑빛 맥주가 콸콸 투박한 유리잔으로 쏟아진다. 비누거품 같은 포말은 글라스 가득 포르르 솟아올랐다가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사이 나도 모르게 꺼져버린다.
국산 라거에 대해 말할 때 내가 떠올리는 건 결국 맛이 아니다. 그것은 술자리, 함께 마셨던 사람들, 그것은 기억과 취기 어린 이야기, 발포주 거품처럼 솟아올랐다가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던 우리의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술의 풍미에 빠져들기 이전과 이후, 술과 사랑에 빠졌던 첫 번째 이유였다. 나는 이제 좀 심각하고 우스꽝스러운 알코올 스놉이 되었다. 술의 맛과 향, 술을 마시는 양식, 술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술집과 술꾼을 판단한다. 지금의 나도 싫지는 않지만, 카스를 두세 짝씩 쌓고 가끔은 소주를 말아대는 가맥집에서라면 늘 술자리의 어리석고 낭만적인 힘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한다.
서사로 빚어지는 데 성공한 삶은 예술이 되지만, 이야기되지 못하는 삶은 망각 속으로 흘러간다. 사람들의 일상은 이야기가 되고 싶어 하고, 밤의 술집은 그 욕망으로 충만한 장소다. 나는 술집의 그런 풍경과 분위기를 언제나 좋아했다. 카스를 간이 테이블에 가득 쌓아놓는 밤, 우리는 저마다 말하기에 열중했다. 각자의 특별했거나 별것 아니었던 하루가 맥주 포말처럼 입술 위로 솟아오른다. 심심한 맛의 카스는 물처럼 들이켜질 뿐, 발화와 취기가 가속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야기로 쓰여지지 못한 그 이야기들은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지만, 완전히 잊혀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네가 거기에서 했던 그 이야기 말이야…” 그런 기억들은 언제나 카스나 하이트, ‘쏘맥’을 편하게 들이켜던 술자리에서 가장 흥건했다. 술집과 술의 맛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대신.
금요일, 오늘 밤에도 이 도시에는 그런 술자리가 수십만 회는 열릴 것이다. 칵테일의 흥미진진한 변주, 하드리쿼의 한없는 깊이에 반해버린 후에도 ‘내가 좋아하는 술’의 대답으로 카스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유다.
– 정미환(칼럼니스트)
술에도 의리가 필요하다면, 전통주
“저…한국전통주진흥협회죠?” 주뼛대며 전화를 걸었던 때는 바야흐로 2009년. 여행을 중심으로 미식을 비롯한 각종 문화를 다루는 잡지를 펴내던 내 첫 직장은 주류 문화에도 소홀하지 않은 곳이었다. 술에 대한 상식이라고는 비록 ‘소맥을 좀 더 창의적으로 마는 법’에 그쳤으나 알코올 문화를 향한 마음만은 활짝 열려 있었던 스물셋의 나는 ‘한국 전통주’를 소개하는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받고 한산소곡주, 진도홍주, 경주 교동법주, 전주이강주, 담양죽력고 등 팔도의 술 지도를 듬성듬성 그려가던 차였다. 그러나 때는 대형마트의 전통주 진열대가 제사용 청주나 백세주나 매화수 정도로 빈약하게 채워져 있고 막걸리 붐조차 찾아오기 전이었던 2009년! 소위 진짜 ‘전통주’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들은 각지에서 가양주로 특산물처럼 존재할 따름이었다. 사진 촬영을 위한 술을 협찬받을 수 있는 곳은커녕 판매처조차 찾기 힘들었던 당시 내게 검색 끝에 발견한 (사)한국전통주진흥협회의 존재는 구세주와도 같았으니… 무작정 걸었던 취재 요청 전화에 ‘일단 와보라’는 대답을 듣고 택시에 실려 사당역 근방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나를 맞이해줬던 당시 노영환 협회장님의 실루엣이 문득 떠오른다. 사진 촬영을 위해 빌린 각종 도자기 술병을 소중히 품에 안고 택시에 다시 올라탔던 기억도. 아니 그보다는 사무실에 진열되어 있던 군침 돌게 한 술병들이…그것이 시작이라면 시작이었다.
본디 소주를 좋아하는 데다가 어떤 술을 마시든 무조건 도수 높은 쪽에 관심을 보이는 나와 한국 소주의 관계는 슬슬 시작된 전통주 혹은 한국술(K-Liquor)의 유행과 함께 자연스레 자라났다. 한국사람에게 한국 술의 장점은 무엇인가? 우리 몸에 우리 것이 좋을 것이라는 신토불이적 믿음은 차치하고 우선은 저렴하다는 것이다. 수입 관세를 낼 일도 없고, 주세율이 감면되다 보니 정말로 훌륭한 가격에 상대적으로 양질의 술을 마실 수 있다. ‘화요 토닉’을 주문할 수 있는 가게가 늘어나고(이때 화요는 최소 화요25도여야 한다!), 한식과 갖가지 전통주를 페어링하는 술집을 기웃거리는 사이 솔송주나 오메기술보다는 역시 깔끔한 쌀 증류주가 좋다거나, 이왕 과실주를 마셔야 한다면 오디나 복분자보다는 매실이 내 입맛에 더 잘 맞는 것 같다는 나름의 뭉툭한 기준도 생겨났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우리 술만 취급하는 ‘우리술방’ 매장이 처음 생겼던 때는 정말로 감격했던 것 같다. 아니, 이강주가 이렇게 예쁜 유리병에 담겨 나오다니? 이렇게 술 종류가 많다니? 심지어 예쁘다니! 그때 집어든 것이 ‘황금보리’와 ‘문경바람’이었던가? 도통 어떤 맛일지 잔뜩 호기심에 휩싸여 40도짜리 술들에 얼음을 퐁당퐁당 띄웠던 여름날의 끈적끈적한 공기가 떠오른다. 이왕 협회 이야기를 들먹이며 시작했으니 나와 전통주의 관계가 보다 학구적으로 발전했으면 좋았을 텐데… 기본적으로 이 술 저 술 기웃대기를 좋아할 뿐인 나는 나날이 넓어지는 전통주의 세계를 틈틈이 확인하듯 좇을 뿐이다. 완주에 생긴 ‘대한민국 술테마박물관’을 은근슬쩍 전주 여행코스에 넣는다거나, 뉴욕에서 만든 한국소주로 화제였던 ‘토끼 소주’ 양조장이 충주에 생겼다는 소식에 DM으로 방문 가능성을 물어본다거나(불가능했다) 하는 식으로, 무려 12년 전 한국전통주협회가 2개월 차 잡지 에디터에게 보여줬던 의리를 내 나름대로 보답하고 있달까? 진심은 통한다고 해야 할지 지금은 우리 술을 멋진 음식과 함께 파는, 자랑할 만한 술집이 있는 동네에 살고 있다. ‘동네요릿집완미’라는 곳인데 가장 최근에 방문했을 때는 메밀로와 감 보드카를 돼지고기두부조림, 조개탕에 곁들여 먹었다. 비록 40도짜리 감 보드카는 내가 우리 술에 품고 있는 어떤 의리나 책임감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러시아 보드카 벨루가도 선사하지 않았던 극강의 숙취를 선사했지만… 심지어 내 고향과 가까운 충남 논산에서 만든 지역 술이라 조금 더 배신감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또 새로운 우리 술이 보이면 기꺼이 주문할 것이다. 10여 년 전 이왕 시작한 여정을 가능한 한 계속 함께할 것을 약속하며.
– 이마루(<엘르 코리아> 피처 디렉터, <아무튼 순정만화> 저자)
에일, 새로운 승자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이따금 영화 <봄날은 간다> 속에 등장하는 이 대사를 자신에게 던지게 되는 때가 있다. 이를테면 맥주에 대한 애정이 시들어가던 시기에도 그랬다. 삼십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였을까. 500cc 잔을 꽉꽉 채운 맥주를 끊임없이 들이켜던 여름밤은 아득해졌고, 술에 대한 관심은 홀짝이다 보면 몸이 훈훈해지는 독주 쪽으로 옮겨갔다.
그때였다. 마치 모든 상황을 굽어보고 있던 맥주의 신이 거대한 패자부활전을 연 것만 같은 일이 생겼다. 때마침 크래프트 비어 붐이 일어나 다양한 에일을 접하게 된 것이다.
에일의 장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풍성한 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꽃잎과 풀, 약초, 과일을 저며 만든 부채를 코앞에서 살랑살랑 흔들 듯 섬세하고 화사한 향기로 마시기 전부터 만족감을 선사한다. 더욱 매력적인 것은 향이 주는 이미지를 단번에 전복시키는 진하고 쌉쌀한 맛이다. 알코올 도수가 라거보다 높은 경향을 띠는 데다, 더블 IPA(인디아 페일 에일)를 선택하면 대뜸 10도에 육박하는 농도 또한 마음에 쏙 든다. 이 같은 반전 매력에 이끌려 마시다 보니 패자부활전에 등장한 회심의 병기였던 에일은 어느새 가장 즐겨 마시는 술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한자리를 차지하는 새로운 승자로 등극했다.
쨍한 오렌지빛 캔으로 눈에 띄는 선데이 페일 에일을 일요일 낮부터 마시던 일, 강릉 해변을 바라보며 그 지역에서 생산된 하슬라 IPA를 마시던 일은 총천연색으로 물든 행복을 안겨주었다. 몇 해 전 플레이그라운드 브루어리의 홉스플래시의 맛에 반한 후부터는 흔히 ‘뉴잉’이라고 줄여 말하는 뉴잉글랜드 스타일 IPA의 매력에도 눈뜨게 되었다. 뉴잉은 홉의 함량을 늘려 탁한 듯 부옇게 보이지만 주시(Juicy)한 맛, 그리고 역시나 향긋한 씁쓸함이 돋보인다. 이렇게 감각을 가로지르는 반전을 담고 있는 에일을 꿀꺽꿀꺽 넘길 때마다 새삼 되뇌게 된다. 아, 어른이 되어서 참 좋구나, 하고.
– 은모든(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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