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게 뿌리내리기 위하여, 수영
누구보다 본인에게 엄격하지만 수용할 줄 아는 너른 마음도 지녔다. 오늘도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는 배우 최수영.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어요. 겨울을 좋아해요?
제 생일이 겨울이라 팬들이 겨울아이라고 부르는데, 막상 저는 추위를 많이 타죠. 다행히 겨울에 촬영한 작품이 많지는 않아요.
드라마 <본 대로 말하라>는 예외였죠?
맞아요. 그때 겨울 현장을 처음으로 경험했어요. 그래도 운이 좋게 작년 겨울에는 많이 안 추웠고, 액션 신이나 뛰는 장면이 많아서 춥지 않게 보낼 수 있었어요.
12월에 방영될 JTBC 드라마 <런 온>에서 ‘서단아’ 역을 맡았어요. 어떤 인물인가요?
서단아는 대한민국 최고 기업의 유일한 적통이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후계 서열에서 밀리는 친구예요. 그래서 늘 경쟁하는 구도 안에서 살기에 항상 긴장하고, 굉장히 직설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자기밖에 모르게 비춰지죠. 자신이 하는 못된 행동들이 모두에게 이롭다고 생각해 더 미움을 받는데, 이런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남자를 만나게 돼요. 자기가 지켜오던 긴장과 경계를 무너뜨리는 사람이죠.
맡은 배역이 무엇이든 그 캐릭터를 사랑할 수 있나요? 배역과 배우의 관계가 연기에도 영향을 미치나요?
그럼요. 캐릭터에 대한 온전한 이해, 그리고 그 캐릭터를 연기함에 있어서 동기와 계기를 만들어놓지 않으면 연기하기 어려울 거예요. 악역을 연기하는 많은 분들은 캐릭터를 분석할 때 역할에 대해 연민을 쌓는 작업부터 시작한대요.
작가가 창조한 대본 속 캐릭터는 배우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잖아요. 최수영이 표현하는 서단아는 어떤 것 같아요?
처음 대본 속에서 만난 서단아는 지금보다 더 차가운 사람이었어요. 최수영을 만나 단아가 바뀐 점은 훨씬 감정의 폭이 커졌다는 거예요. 작가의 의도보다 조금 더 이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런 온>은 각자의 언어로 소통하고 관계 맺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죠. 본인은 소통에 능한 사람인가요?
지금은 소통을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되기까지는 꽤 힘든 시간을 거쳤죠. 데뷔 초에는 그야말로 어린아이 같았어요. 아이들은 뜨거운 냄비는 위험하다는 개념 없이 무조건 만지고, 다치고, 마구 쏟고 그러잖아요. 그랬죠. 그러다가 반대로 이런 행동이 어떻게 비춰질까 걱정돼서 꽁꽁 숨어버린 적도 있었고요.
작품을 시작할 때 특별한 각오를 하기도 하나요?
항상 작품이 끝나고 저와 이 캐릭터가 만나는 상상을 해요. ‘캐릭터를 만났을 때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을까’ ‘캐릭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수 있을까’ 등등이요. 캐릭터를 실존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부담이 엄청나요. 저는 그 부담을 이용해요.
부담감이 연기를 잘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요?
맞아요. 지금 돌아보면 최선을 다해 표현하지 못한 캐릭터, 미안한 마음이 드는 캐릭터도 있어요. 반면, 정말 웃으며 인사하고 보내준 캐릭터도 있었죠. 가끔 만나 즐겁게 수다 떨고 싶다 했던 유쾌한 친구도 있어요. 배역을 대할 때마다 그런 마음의 부담감을 만들면 캐릭터를 사랑하는 데 도움이 돼요.
본인을 엄청 다그치는 것 같은데요?
괴롭히는 것 같죠? 맞아요. 전 스스로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작품 끝나고 캐릭터에서 빠져나오는 데도 시간이 걸리겠어요.
그것도 즐기는 것 같아요.(웃음) 그 쓸쓸함, 우울함까지 전부 다요.
멋지네요.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방법도 있을 것 같아요.
그대로 둘 때가 가장 많아요. 계속 빠져 살기도 하고, 더러 잊기도 하고. 시간이 해결해주기도 하고 갑자기 새로운 일이 생겨서 말끔하게 해소되기도 하고요. 다행히 마음을 오래 어지럽힌 캐릭터가 많진 않았어요. 적절한 시기에 잘 보내준 것 같아요.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올 수 있잖아요. 그런 경험이 있어요?
이 분야에는 신나는 일과 신나지 않은 일이 명확히 존재해요. 신나지 않은 일만 지속되면 그게 슬럼프가 되는 거죠. 하지만 누구나 신나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땐 함께하는 사람들을 돌아봐요.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함께 뜻을 모아 무엇인가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의 에너지를 내 안으로 들어오게 해요. 그럼 생각과 감정이 환기되면서 무엇인가 새롭게 열리는 느낌이 들어요. 연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준비를 했음에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건 상대방의 에너지를 받는 거예요. 주변 사람의 에너지를 받고 책임감을 가지고 더 나은 모습으로 돌려줘요.
작품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하는 일이 있나요? 일종의 의식 같은 거?
여행을 가거나 그동안 못 했던 염색이나 네일아트 받는 거 정도? 모두와 비슷해요.
일상으로 돌아온 사람 최수영은 무대 위 최수영과는 다른가요?
무대에 서 있을 때보다 평소에 훨씬 더 긴장하고 살아요. 저는 다른 사람보다 저에게 훨씬 엄격한 편이거든요. 그런데 무대 위에서는 뒷일 생각하지 않는 스타일이에요. 캐릭터로 임하는 거니까, 어떤 한 이야기 속에 들어가 집중해서 표현만 하면 되거든요. 그래서 제가 무대가 좋고 편한가봐요.
유명인이라 일상으로 돌아가도 제약이 많겠어요. 얼굴이 알려져 있어 못 하는 일 중 아쉬운 게 있어요?
딱 하나 떠올라요. 직거래요!
당근마켓 같은 거요? 네 바로 그거요! 짐을 비우고 싶은데 도저히 버릴 수가 없어요. 누구에게 줄까 싶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짐이 될 테니 망설여지고. 코로나 때문에 플리마켓 같은 걸 할 수도 없고요.
직거래의 즐거움은 불가능하지만 본인의 일상 또한 즐기는 편인가요? 날씨가 좋으면 문득 드라이브를 떠난다거나,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 커피를 마시러 간다거나.
물론이죠! 분위기 내는 일들을 좋아하고 주저하지 않아요. 비가 내리면 파전을 먹으러 가고, 맛있는 요리를 하면 친구 불러 와인을 한잔하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긴장 속에 살아도 건강한 것 같아요.
주변을 잘 챙기는 성격인가봐요.
맞아요. 그런데 어느 날 친구 티파니 영이 남이 아니라 너를 위해 살아보라고 얘기하더라고요. 너를 위해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고, 너를 위해 초를 켜고, 너를 위해 예쁜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으라고요. 남을 챙기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일들을 계획하라고요. 그러고 나서는 예쁜 잠옷, 속옷, 피어싱 등 많은 선물을 사줬어요. 제가 분명 생각만 하고 사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무조건 해보라고 던져준 거죠.(웃음)
그렇게 했더니 뭔가 달라지던가요?
저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어요. 스스로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부분을 친구가 애기해줬어요. 그래서 더 좋았죠.
지금까지 이것만큼은 정말 잘해왔다. 본인에게 토닥거려주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웃고 싶지 않을 때도 힘내서 잘 웃었다. 자신을 느슨하게 풀었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인내심. 인내심은 단체생활이 준 가장 큰 자산이자 저의 무기예요.
최수영을 떠올리면 뭐든 다 잘할 것 같은 팔방미인의 이미지가 있어요.
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나는 뭐 하나가 특출나진 않아도 멀티플레이가 되는 사람이야’라고 합리화도 했었고요. 그런데 좀 대단한 착각이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깊게 뿌리내리지 못해서였더라고요. 내가 뭘 잘하고 못 하고 규정하는 것보다 깊이 뿌리내린 어른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아직까지도 배우 최수영입니다, 가수 수영입니다 자신 있게 얘기를 못 하겠어요. 제 안에서 아직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라, 뿌리를 내리면 잘하든 못 하든 진정성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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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지는 대로 생각하는 게 아닌,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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