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포리아의 스타, 헌터 샤퍼
21살의 헌터 샤퍼는 이미 사회운동가, 모델, 아티스트 그리고 <유포리아>의 스타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샤퍼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 몇 주간은 밤마다 열정적으로 글쓰기에 몰두하며 지냈다(그녀는 숀다 라임스의 글쓰기 강연을 듣고 있다). “하지만 고립감을 감당할 수 없었어요. 아파트에 혼자 있고 교통수단이 없으니까요.” 샤퍼는 쿨한 10대처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뛰쳐나가고 싶었다’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트럭을 샀다. 그리고 미국을 가로질러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언니집으로 갔다. “아마도 모든 격리 과정에서 제가 느꼈던 가장 편안한 상태였을 거예요. 단지 한 가지 목표가 있었죠. 지도를 보고 도로를 따라 운전하는 것. 정말 대단했죠.”
어릴 적 다녔던 유치원을 보기 위해 애리조나로 차를 몰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피살당한 로레인 호텔(지금은 국가인권박물관으로 개조된)을 방문하러 멤피스에도 들렀다. 텍사스에서 풍차가 있는 탁 트인 시골길을 달리면서 그녀는 거대하고 엄청난 자연 현상도 목격했다. 불길한 구름과 광활한 폭풍의 기운이 초원을 휩쓸고 있었다. 그건 적운이었다고 샤퍼는 확신하고 있다. 뜨거운 텍사스 바람이 장엄하고 막강하며 두려운 뭔가를 만들었고, 그건 파괴적인 토네이도로 이어질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샤퍼는 폭풍의 눈으로 곧바로 돌진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샤퍼는 HBO의 하이틴 드라마 <유포리아>에서 17세 소녀 줄스로 세상에 알려졌다. 약물과 성, 트라우마, 소셜미디어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갈등하는 10대들을 다룬 스토리 속에서 루(젠데이아)의 절친인 트랜스젠더 소녀 역을 맡았다. 나머지 배역 역시 엄청나게 매력적인 젊은 배우들로 채워졌지만, 모든 캐스팅 중에서 줄스가 가장 절묘하다. 첫화부터 파격적인 모습으로 충격을 던져준 그녀는 누군가와 서서히 사랑에 빠지는 행복한 연애를 꿈꾼다. <유포리아>는 샤퍼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물론 하룻밤 사이에 스타가 된 건 아니지만 시즌1이 방영된 2019년 여름, 일요일밤마다 그녀의 인기는 치솟았다. 뉴욕에서의 모델 활동이 담겨 있는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수는 어느 순간 1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녀를 찍고 인터뷰하고 기사화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HBO는 그녀가 걸어서 출근할 수 있도록 HBO 스튜디오가 보이는 웨스트 할리우드 아파트로 그녀의 숙소를 옮겼다. 그러던 중 팬데믹으로 <유포리아> 시즌2 촬영이 중단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인기는 고공행진 중이다. 시세이도는 이런 그녀를 자신들의 글로벌 브랜드 홍보대사로 선정했다. 자신들의 독특한 뷰티 콘셉트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말이다.
“그건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아마도 줄스에게서 부분적으로 제 모습을 보기 때문일 거예요.” 샤퍼는 트랜스 모델로서 그녀가 지닌 신체적 유사성 때문일 거라 말했다. “가끔은 줄스처럼 옷을 입고 줄스처럼 느끼는 게 좋아요.” 줌(Zoom) 인터페이스를 통해 온통 블랙에 화이트 에어포스원 하이탑을 신은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저의 일부일 뿐이지만요.” 그녀는 DC 코믹스 <틴 타이탄>의 슈퍼히어로 레이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암흑계 마법을 쓰는 레이븐도 이 기분을 알 거예요. 감정을 절제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서는 ‘10가지 버전의 나’로 나뉘는 순간이 있죠. 그건 모두 무지개의 서로 다른 빛깔과도 같아요. 줄스는 10대의 수많은 내 모습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샤퍼의 목소리는 느릿하고 담담하며 살짝 허스키하다. “제가 있는 곳은 줄스와는 확실히 다르지만요. 주변 사람들, 그들을 좋아하는 방식, 지금까지의 관심사 등 여러 면에서 말이에요.” 그녀는 <유포리아>의 첫 회 장면을 떠올렸다. 친구인 네이트가 파티에서 화풀이 대상으로 삼자 줄스는 부엌칼을 들어 자신의 팔을 그으며 네이트를 위협했다. “헌터 샤퍼는 절대 할 수 없는 대응법이죠.”
이 장면에 많은 시청자가 열광했지만, 샤퍼는 이렇듯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줄스처럼 똑같이 혼돈으로 맞서기보다는 겸손함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언니집에 머물렀을 때 친구들을 만났어요. ‘지금 우린 엄청 혼란스러워. 그렇지만 너는 길을 찾았잖아. 네가 무얼 하는지도 알고. 또 직업도 있으니까 말이야’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제 반응은 이랬어요. ‘나 역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그저 나를 건드리는 파도를 타면서 잘 지내려고 애쓰는 중이야. 극 중 인물을 연기하면서 더 많은 정보를 수집했을지는 몰라도 여전히 나도 혼란스러워. 21살이 되는 방법들을 궁리하고 있을 뿐이야.’” 실제로 그녀는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혼란스럽고 두려우며 팬데믹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고통과 행복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단지 좀 더 빠른 속도(사륜구동 트럭)로 헤쳐나가고 있을 뿐이다.
샤퍼의 커리어는 미국의 10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스토리에 가깝다. 아름다운 틴에이저가 성공적인 모델이 되고 유명 배우가 된다!
물론 모델에서 배우로 전향한 이후의 행보는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모델과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분리될 수도 있고 어느 순간 둘 다 멈출지도 모른다. 샤퍼가 오스카를 타게 될지,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를 론칭할지, 모든 게 다 불분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샤퍼가 남들과는 다른 가장 확실한 차이점을 꼽으라면, 지금까지 트랜스젠더로서 살아온 정체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중 모델은 극소수고, 모델 출신 배우는 더더욱 드물다. 그리고 이런 차이점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다. 카메론 디아즈나 아만다 사이프리드 역시 사춘기 시절에 대한 긴 질문을 받았겠지만, 샤퍼에게는 이런 일은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빠지지 않으며 게다가 심지어는 대화 전체가 되기도 한다.
“지금부터 전, 입밖으로 나오는 말들에 필터를 달아야만 해요. 종종 ‘트’자로 시작되는 단어를 말할 때 어떤 문장이든지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에요. 남들이 묻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은 늘 예측 가능한 것이었고 제 인생의 일부였어요. 침묵을 지키면 오히려 더 이상한 루머가 돌기 때문에 여기에 관련된 대화의 필요성도 이해하고 있고요.”
샤퍼는 트랜스 커뮤니티에서 특히 트라우마가 되었던 순간들에 대해 얘기한다. 세계 인권 캠페인에 따르면, 한 아동작가의 반트랜스 성명이 있은 후 트랜스 여성에 대한 공격이나 피살이 적어도 올해만도 12건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런 얘기가 우리 대화의 무드를 바꾸지 않고 그저 인터뷰의 일부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마 이해하실 거예요.”
하지만 정체성에 관한 이슈는 언제나 강력하고 복잡하다. HBO 드라마는 이를 이슈화할 수 있는 거대한 플랫폼을 제공했지만, 샤퍼는 소수 공동체를 대표해 말한다는 건 항상 조심스럽고 두려운 일이라 한다. 그녀는 자신의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BLM(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도 지지한다. 종종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려, BLM 유스 재단이나 마샤 P. 존슨 인스티튜트 등 이들을 후원하는 단체들에 대한 관심을 독려하고 있다.
“많은 백인 유명인사들이 백인 우월주의의 큰 혜택을 받아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백인이든 흑인이든 상관없이, 누군가가 부당하게 억압당한다면 그에 대해 침묵을 깨뜨릴 수 있어야 하죠. 꼭 앞장서서 큰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소소한 관심을 일으키든지,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정당한 분배에 관심을 갖든지 그 어떤 형태로든지 가능해요. 모든 건 당연히 인간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를 찾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하기엔 인스타그램만 한 것이 없어요.”
샤퍼는 잠시 멈칫한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아요. 많은 걸 생각하려고 애쓰지만 잘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많고요.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부분도 포함해서요. 하지만 거기엔 언제나 보잘것없을지라도 ‘나만의 시도’가 있어야 해요.”
샤퍼는 청소년기부터 LGBTQ+ 인권 운동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출생 시에 배정된 성별에 해당하는 화장실만 사용하도록 한 노스캐롤라이나의 ‘화장실 법안’을 뒤집기 위한 ACLU(미국 시민자유 연맹) 소송에서 샤퍼는 원고로 등장했다(사회운동가라는 호칭을 이때 처음 얻었다). 당시 17살이었고 <유포리아>의 줄스와 같은 나이에 이 법안 때문에 부당하게 표적이 된 노스캐롤라이나인을 대표한 것이다. 캠페인은 부분적으로 성공적이었다. 비록 적당히 덜 차별적인 것으로 대체되긴 했지만, 어쨌든 화장실 법안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샤퍼는 뉴욕으로 이주해 모델 활동을 시작했다.
<유포리아>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묘사는 레빈슨과 샤퍼뿐 아니라 트랜스 자문을 맡은 스캇 터너 스코필드의 복합적인 노력 덕분에 놀라울 정도로 진솔하다. 대중문화에서 대부분의 트랜스 캐릭터들은 변방에 존재하거나 시스젠더(타고난 생물학적 성과 젠더 정체성이 일치) 배우를 통해 적당한 흐름으로 연기되곤 했다. 하지만 샤퍼가 연기한 줄스와 그 스토리라인은 솔직한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스코필드는 샤퍼를 두고서 ‘레빈슨이 스케치한 줄스에 생생한 컬러를 입혔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진짜이기 때문에 진정성이 존재하는 순간이죠. 실제 인물이 정말 그곳에 있고 리얼리티가 살아나는 순간이 거기에 있으니까요.”
샤퍼의 청소년기는 대부분 평범했다. 아버지는 목사였고, 가족은 뉴저지와 애리조나를 오가다가 노스캐롤라이나에 정착했다. ‘종교’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진보적인 상원의원 후보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그건 꽤 유동적이에요.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간혹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부분을 느끼기도 하지만요.”
샤퍼의 침실은 라임그린으로 칠해져 있다. 그녀가 네오팻 게임 속에서 기르는 라임그린 공룡 쇼이루(Shoyru)와 같은 컬러다. 그녀가 디지털 세계에서 트랜스 유튜버로부터 호르몬 테라피를 배우는 동안, 이 초록 공룡은 또 다른 디지털 세계에서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다.
16살 때 쇼퍼는 노스캐롤라이나 예술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윈스턴세이럼으로 이사를 했다. “전 항상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만화를 그리길 원했다. 그녀는 항상 가지고 다닌다는 검은 수첩을 보여줬다. 낙서, 스케치, 공부 메모로 가득했다. 그녀의 그림은 아주 드물게 인스타그램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종종 그로테스크한 자화상과 초현실적인 패션으로 차려입은 캐릭터들이 움직이는 흑백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이런 작업들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만화를 그릴 때엔 등장인물에 제가 좋아하는 부분들을 포함시키곤 해요. 옷차림은 무엇이고 그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죠. 스토리를 말하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외에도, 신체적인 움직임이나 옷차림을 통해 또 다른 보디랭귀지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재미있어요. 우리 몸이 어떻게 보이는지, 옷차림을 어떻게 하면 더 생동감 있게 표현될지 등을 고민하는 것도 무척 흥미롭고요. 그건 제가 가상공간에 창조해내는 일종의 모델링이죠. 신체와 정신 모두는 캐릭터를 생동감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고, 많은 면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사실 이건 제 인생의 프로젝트나 마찬가지예요. 내가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느끼고 또 남들을 올바르게 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 할 수 있어요.” 샤퍼는 창밖을 힐끗 내다본다. 해 질 무렵 로스앤젤레스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서 도시의 정경은 끊임없이 보랏빛 밤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다.
눈앞에는 거대한 평원이 미래를 향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며칠 후면 노스캐롤라이나로 돌아갈 거예요. 그곳의 도로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안개 자락 사이를 굽이치죠.” 샤퍼는 산악도로를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평화롭고 명상적이다. 가끔 구름이 하늘에서 떨어져 길 위에 깔리기도 하지만, 그녀의 트럭은 이것들을 뚫고 또 다른 곳으로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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