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윤수의 말간 미소 뒤에는 전혀 낯선 얼굴이 있다.

 

이제 확실히 ‘배우 남윤수’라고 불러야겠네요.
저도 그 호칭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오디션이나 작품 미팅에 가면 제가 모델이었던 걸 아예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빽빽한 프로필을 보고 다들 놀라세요. 뭐가 많으니까요.

모델과 배우, 꽤 달라요?
엄청나게 다른 건 없는 거 같아요. 감정을 드러내고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둘 다 비슷하거든요. 호흡은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어요. 모델이 비교적 짧은 순간 극대화된 감정을 표현한다면 연기할 땐 호흡을 길게 유지할 줄 알아야 하니까요. 모델 일을 하면서 차곡차곡 쌓인 바탕이 연기할 때 도움이 많이 돼요.

특히 남자 모델의 수명은 눈에 띄게 짧은 편인데 그에 비하면 꽤 긴 시간 일을 했죠.
저도 이렇게 오래 일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18세이던 2014년 여름 <쎄씨>가 제 첫 화보였어요. 지금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이)호정이 누나랑 함께한 촬영인데, 긴장해서 벌벌 떨던 기억이 선명해요. 제가 웃는 게 좀 예뻐요.(웃음) 노력하는 건 티가 나잖아요. 근데 전 밝은 에너지를 타고난 거 같아요. 모델로서 뭐가 확 터진 적은 없지만 많은 분이 좋게 봐주신 덕분에 조금씩 꾸준히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해요.

그간 크고 작은 작품에 배우로 참여했지만,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인간수업>은 좀 다른 느낌이에요. 본격적인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지금까지 촬영한 작품 중에 가장 큰 현장이었어요. 정말 많은 배우, 스태프가 함께했어요. 그런 환경 때문이었는지 훨씬 더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덕분에 작품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던 거 같아요.

화이트 슬리브리스, 스트라이프 오버올 팬츠는 모두 셀린느(Celine).

지난여름 내내 촬영한 것으로 알아요. 생일도 한여름이던데 여름과 인연이 깊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태어난 계절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딱히 여름을 좋아하진 않아요. 더운 건 질색이라서요. 좀 더 선선한 계절이 좋아요. <인간수업>을 촬영하는 내내 정말 더웠어요. 작년 여름이 특히 더했잖아요. 스태프도 그렇고 저도 지칠 때가 많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어요. 막 주문을 걸면서요.

넷플릭스라는 매체는 어때요? 100% 사전 제작에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되는 작품에 참여하는 건 배우에게도 드문 경험이잖아요.
현장에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는 게 느껴졌어요.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게 큰 장점이더라고요. 감독님의 오케이 컷이 났지만 배우 입장에서 살짝 아쉬울 때가 있잖아요. 감독님에게 한 번 더 연기하고 싶다고 요청하면 흔쾌히 수락하는 분위기였어요. 연기에 대한 의견도 자유롭게 나누면서요. 아마 일반적인 드라마 현장에선 제작 여건상 쉽지 않은 거로 알아요.

드라마라기보단 영화 현장 같은 느낌이네요.
맞아요. 스태프 대부분이 영화 현장에 계시던 분들이기도 했어요. 원래 영화에 도전하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인간수업> 이후 그 마음이 더 커진 상태예요. 기준도 더 높아졌고요.

어떤 기준이요?
저 자신에 대한 기준이요. 원래 용감했거든요. 당장 영화에 도전해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어요. 근데 이번 촬영을 경험하면서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어요. 스스로 더 엄격해졌다고 할까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단단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좀 더 진지해졌고, 간절해졌어요.

화이트 슬리브리스 셔츠, 레드 오버사이즈 재킷 코트는 모두 프라다(Prada). 블랙 팬츠는 포츠브이(Ports V).

<인간수업>은 민감한 이야기를 건네는 작품이죠. 자칫 치우칠 수 있는 이야기에 여성 제작자, 여성 촬영감독이 참여했기에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여성의 시선과 의견을 담기 위해 애쓰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죠. 대신 현장에서 연기할 때 특별히 다른 걸 느끼지는 못했어요. 일할 때 굳이 성별을 구분 짓거나 다르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고 봐요. 뭐가 더 특별하거나 다르거나 그런 잣대를 드리우고 싶진 않아요. 현장에 있는 사람 모두 좋은 작품을 위해 모인 거잖아요.

당신이 연기한 ‘기태’는 양아치죠. 히죽히죽 웃고 있지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폭발할지 예측이 안 되는 얼굴이 인상적이에요. 그래서 더 의뭉스럽기도 해요. 실제 모습과 비슷한 면이 있어요?
학교 다닐 때 보면 원래 그런 애들이 진짜 무섭잖아요.(웃음) 감독님이 저를 캐스팅한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했어요. 밝게 웃고 있는데 그 속에 나쁜 사람의 얼굴이 있다고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그게 마음에 드셨대요.

그런 말 들으면 어때요? 
저를 돌아보게 되죠.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일까, 사람들이 나를 진짜 그렇게 바라볼까? 배우 남윤수의 입장에선 아주 좋은 칭찬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남윤수라는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살짝 고민이 되더라고요. 괜한 오해를 받는 건 싫거든요.

요즘은 어떤 영화를 봐요? 누가 좋나요?
최대한 다양하게 보고 있어요. 장르든 이야기든. 한쪽으로 치우치는 걸 경계하고 있거든요. 배우의 연기를 지켜보고 탐구하는 것도 좋은데, 자꾸만 화면 바깥의 상황을 상상하게 돼요. 직업병 같은 건가 봐요. 요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좋아하게 됐어요. 초창기 미소년 시절부터 지금의 강인한 모습까지 다양한 캐릭터와 감정선을 넘나드는 매력이 대단하더라고요.

화이트 블루 스트라이프 시어서커 재킷, 화이트 핑크 스트라이프 슬리브리스, 데님 팬츠는 모두 셀린느.

디카프리오는 그 잘생긴 얼굴로 망가지는 일에 주저하지 않아요. 편견이라면 편견일 수 있는데 모델 출신 배우는 멋있는 걸 포기 못 한다는 인상이 있어요. 어때요?
저는 그런 거 없어요. 멋있는 모습만 보여줄 생각은 정말 ‘1’도 없어요. 작품이 마음에 든다면 살도 찌울 수 있고, 분장을 할 수도 있고 더한 것도 할 수 있어요. 도전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어요. 마냥 멋있는 역할만 하고 싶었다면 배우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자신감과 자존감, 자존심이 있어요. 어떤 편인가요?
자신감은 늘 넘치고요. 자존감도 엄청 높아요.(웃음) 근데 자존심은 잘 모르겠어요. 자존심도 센데 티는 잘 안 내는 편인 거 같아요.

2년 전 이맘때 가르텐 에이전시 10주년 다큐멘터리 촬영장에서 당신이 내지르듯이 그랬어요. “저는 뭐든 욕망이 아주 커요”라고. 지금의 욕망은 무엇이죠?
그때의 욕망은 막연했던 거 같아요. 막연하게 큰 작품에 참여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었던 거죠.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이제 없어요. 생각해보니까 그게 우선순위가 될 수 없겠더라고요. 열심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든지 말든지 그럴 문제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최대한 많은 작품,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가 오기를 바라요. 그 욕망이 제일 커요.

배우로서 영향력에 대해서도 생각해요? 그걸 감당할 준비가 됐나요?
감당할 수 있으니까 지금 여기에 있죠. 두려웠다면 진작에 이 길을 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모든 사람이 저를 좋아해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근데 괜찮아요. 말했잖아요. 저는 자신감, 자존감, 자존심이 엄청 높은 사람이에요.(웃음)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하는 사람이죠?
하기 싫으면 안 해요, 전. 하고 싶은 건 다 해요. 일단 해봐야 직성이 풀려요. 모델도 그렇고 연기도 그렇고 제가 진짜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플로럴 패턴 스팽글 반소매 셔츠는 드리스 반 노튼 바이 분더샵(Dries Van Noten by Boon the Shop). 블랙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블랙 레더 앵클부츠는 닥터마틴(Dr. Marte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