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한 시간 위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때 크러쉬는 일단 웃고 본다.

 

재킷, 팬츠, 신발은 모두 벨루티(Berluti). 선글라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재킷과 팬츠는 발리(Bally). 신발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내내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던데 어땠어요, 오늘?
원래 화보 촬영하고 나면 늘 피곤한 상태로 인터뷰 자리에 앉았는데 지금은 전혀 힘들지가 않아요. 이상하게 부담이 없는 촬영이었어요.

촬영장에 흐르는 음악을 직접 선곡하곤 한다던데 그러지 않았네요.
누가 틀어놓은 건지 모르지만 스튜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이 좋았어요. 테크노 같은 걸 오랜만에 들었더니 되게 신선하더라고요.

요즘은 뭘 들어요?
저야 늘 그렇듯이 1970~80년대 재즈, 소울 음악을 들어요. 보사노바도 좋고요.

뮤지션 크러쉬도 크러쉬지만 ‘틱톡커’ 크러쉬에 관한 물음표가 가득해요. 당신의 틱톡 계정을 보고 한바탕 웃고 나선 ‘대체 뭘까?’ 싶었거든요.
철저히 재미를 위해서 시작했어요. 평소에도 웃긴 영상이나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아카이빙해둬요. 그냥 좀 재미있는 걸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그 타이밍에 틱톡을 알게 된 거죠.

틱톡은 이미지와 텍스트가 함께 가는 기존의 SNS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이죠. 15초짜리 짧은 동영상을 지배하는 정서는 ‘병맛’ 코드고요. 그 법칙에 순전히 동참하지 않으면 즐기기 어렵죠.
틱톡 미학에 대해 거창하거나 진취적인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틱톡을 멋있게 찍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긴 해요. 오히려 그 ‘B급’ 감성의 ‘병맛’ 코드가 매력적이에요. 15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번에 나온 노래 ‘자나깨나’의 뮤직비디오도 틱톡 감성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싶어요. 누구의 참견이나 압박 없이 자유롭게 저만의 나래를 펼쳤다고 할 수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뮤직비디오라고 하기도 좀 그렇죠.(웃음)

코트, 티셔츠, 팬츠는 모두 드리스 반 노튼 바이 분더샵 (Dries Van Noten by Boon the Shop). 신발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리코더 든 모습을 꼭 찍고 싶었는데, 가방에 항상 챙겨 다닌다기에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다 싶었어요.
늘 가방 속에 있어요. 자나깨나 챌린지를 준비하면서 몇십 개를 샀거든요. 틱톡의 폐해예요. 하하. 농담이에요.

왜 갑자기 지금일까요? 전혀 다른 크러쉬의 얼굴이 또 다른 자아 ‘부캐’처럼 등장한 시점이.
심심해서요. 지금 다들 너무 힘들어 하잖아요. 그런 시기를 지내고 있잖아요. 그냥 좀 함께 웃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에요. 그걸 오픈하지 않았던 것뿐이죠.

자신이 망가지는 대신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었나요?
위로는 아닌 것 같아요. 그건 너무 거창해요. 웃자. 그냥 웃자. 그 마음이 전부예요.

음악은 어때요? 자기만족이 중요한 사람이 있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맨 먼저 생각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처음에는 진짜, 오롯이 제 만족을 위해서 음악을 했어요. 어느 순간 사람들에게 제 노래가 위안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걸 깨닫고 난 후 지금까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요.

사람들이 당신의 음악에 대해 좀 알 것 같은 얼굴을 할 무렵, 단정 지으려 할 때마다 보기 좋게 배반해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사람들의 기대를 요리조리 피해간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엄청난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요. 하고 싶은 게 많아서 그래요. 음악적으로 시도하고 싶은 게 많아서 이것저것 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패딩 점퍼는 몽클레르×크레이그 그린(Moncler×Craig Green).

황소자리라던데, 고집이 센 편인가요?
고집이 안 세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분명 추구하는 게 있긴 하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친구들과 스태프들의 피드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도 있어요. 다른 의견을 대체로 잘 수렴하는 편이에요.

반려견 ‘두유’는 이미 유명하죠. 최근에 둘째 ‘로즈’를 입양했고요.
로즈는 라브라도 리트리버 종이고 나이는 두 살로 추정해요. 작년에 우연한 기회로 처음 만나게 됐어요. 다른 분이 임시 보호를 하고 있었는데 처음 보자마자 느껴지더라고요. 이런 말 좀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운명 같았어요. 내가 데려와야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한동안은 멀찍이서 지켜만 보다가 결국에는 입양하게 됐어요.

입양이라는 게 말이 쉽지, 막상 행동에 옮기려면 이런저런 마음이 들기 마련이잖아요.
그럴 수 있죠. 동물도 사람처럼 ‘에고(Ego)’가 있더라고요. 저를 만나기 전에 생긴 트라우마도 있을 거예요. 그게 느껴져요. 첫 반려견을 데리고 왔을 때는 사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어요. 다른 생명을 책임진다는 게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제가 이 친구들에게 되게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돌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 조지 플루이드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인권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문장을 남겼죠.
전 세계 사람들이 다 관심 있잖아요.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요. 음, 뭐라고 해야 할까, 제가 지금 그런 거 같아요.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생명은 다 소중해요.

니트와 신발은 J.W. 앤더슨(J.W. Anderson), 팬츠는 르메르(Lemerre).

여러모로 그 사실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해요.
네, 맞아요.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인 거 같아요. 모두가.

말을 느릿느릿 하는 편이네요. 말과 말 사이에 숨을 고르는 시간도 길고요.
그런 편 같아요. 말하면서 생각을 많이 해요.

한 땀 한 땀 신중하게 말하고 싶어요? 
특히 요즘 더 그래요. 표현하고자 하는 문장이 있는데 가장 좋은 단어가 안 떠오를 때도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느릿느릿해진 것 같기도 해요. 잘 모르겠어요.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말하는 방법도 까먹은 거 같아요.

현장 스태프들이 오늘 당신을 보고 아주 빵빵 터졌어요. 웃음을 주지만 크러쉬의 지난 인터뷰를 들춰보면 늘 외로움과 결핍 같은 정서가 묻어 있더군요. 언뜻언뜻 속마음을 내비칠 때도 보였어요.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었어요. 지금보다 훨씬 더 예민했고, 자주 동굴 안에 들어가고 그랬죠. 거기서 나오려고 아등바등하면서 살았어요.

지금은 어때요?
인생의 목표가 단순하게 사는 거예요. 밝게, 단순하게요. 물론 그게 쉽지는 않아요. 지금은 뭐, 거울 안 본 지가 하도 오래돼서 제 얼굴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해요. 감정의 폭이 이렇게 작아졌어요. 그래서 틱톡도 하고, 오늘 같은 화보도 찍으면서 망가질 수 있게 된 거 같아요.(웃음)

코트, 셔츠, 팬츠는 드리스 반 노튼 바이 분더샵.

전보다는 걱정이 덜해요?
걱정은 늘 많아요. 근데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딱 지금뿐이잖아요. 그걸 표현할 수 있는 타이밍도 지금뿐이고요. 그걸 놓치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평생 남는 거니까.

건강해지고 싶어요? 그린 주스를 열심히 갈아 마신다면서요.
잠이 문제였던 거 같아요. 전에는 늘 해가 떠야 잤거든요. 요즘은 밤 12시만 돼도 졸려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요.(웃음) 9~10시 정도에요. 결국 이게 마라톤이거든요. 사는 게요. 얼마나 오래 달리는지가 관건인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그나저나 <Homemade1>의 앨범 소개 글은 또 뭐죠? ‘기분이 울적하고 몸이 무거울 땐 주위 사람들과 함께 자나깨나 박수를 쳐보세요’라는 문장이 신선하던데요.
요즘 박수를 많이 치고 있어요. 좋더라고요. 저처럼 이렇게 한번 쳐보세요.(웃음) 활력이 생기지 않나요?

집에 가서 해볼게요. 요즘 멋있다고 생각하는 게 뭐예요?
이제 모르겠어요. 뭐가 멋있다, 힙하다, 예쁘다, 그런 거요. 시야가 좁아진 건지 기준이 모호해진 건지, 큰 의미가 있나 싶어요. 그냥 재미있게 할 수 있다면 그게 제일 멋지다고 생각해요. 웃으면서요.

재킷과 팬츠는 르메르. 신발과 복면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