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쓰고 많이 저축하는 ‘파이어족’의 삶
전 세계를 휩쓴 ‘욜로(Yolo)’와는 반대의 삶을 택한 이들이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적게 쓰고 많이 저축하는 ‘파이어(Fire) 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 ‘욜로’로 살 것인가? ‘파이어’로 살 것인가? 노후를 준비하는 우리들의 자세.
소크라테스는 행복의 비결에 대해 “행복은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적은 것으로 행복해지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과도하게 일하고, 지나치게 소비하는 악순환 속에 갇혀 있다. 나 역시 열심히 일했지만 늘어가는 지출과 싸우며 매달 월급이 스치는 통장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내 행복과 바꾼 월급은 매달 내가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물건이나 해외 여행으로 교환됐다. 이렇게 나를 희생해서 일하는데, 이 정도의 보상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인류 최초로 부모보다 가난하며, 학자금의 부채를 안고 사회초년생이 되는 세대. 매달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저축한다고 해도 서울에 번듯한 집을 살 수 있을 리 만무하므로, 내게도 ‘노후 준비’는 막연하고 피곤한 미션 중 하나였다. 게다가 한번 틀어진 소비 습관은 바꿀 수도, 멈추기도 어려웠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된 ‘파이어족’에 대한 <뉴욕 타임스>의 기사가 유독 눈에 띈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파이어(Fire)’는 ‘경제적인 자유(Financial Independence)’와 ‘조기 은퇴(Retire Early)’의 앞 글자를 딴 합성어로, 파이어족은 연봉의 절반 이상을 저축해 30대에 은퇴하려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 더 쉽게 말하면, 빨리 돈을 모아 빨리 은퇴하려는 사람들을 뜻한다. ‘욜로’와는 정반대의 개념인 셈. 그들은 매우 극단적인 절약과 낮은 비용의 투자로 경제 상황을 통제하며, 끈기와 금융 지식, 싸구려 음식으로 끼니를 때울 의지만 있다면, 이 운동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람마다 적용하는 비율은 다를 수 있으나, 보통 수입의 50~70%를 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해 10년 안에 일할 필요가 없는 수동적 소득을 확보할 계획을 세운다고…. 아니 도대체 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가! ‘파이어 운동’의 사전적 의미가 담긴 기사의 초반을 읽어 내려갈 때 나도 모르게 터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파이어 운동’에는 작은 함정이 있다. 백인 남성, 특히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실리콘 밸리 출신의 2억 이상의 연봉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된 운동이기 때문. 엄청난 금액의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부자만이 할 수 있는 걸까? <파이어족이 온다>를 저술한 미국의 작가 스콧 리킨스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당연히 평균 연봉보다 더 많이 받는 고소득자들은 파이어를 달성하기 쉽죠. 그러나 적게 쓰고 많이 저축하는 파이어의 원칙 자체는 소득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적용할 수 있습니다. 5년, 10년, 30년이 걸리더라도, 물질 만능주의를 초월한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모두가 자기만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자유와 융통성을 갖는 것이죠.” <뉴욕 타임스>의 기사는 ‘파이어 운동’을 여성의 시각에서 다룬다. 남성과 임금 체계가 다른 여성의 입장에서 생활비를 쓰고 나면 저축하거나 투자할 여윳돈이 없을 수도, 누군가는 수입이 적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을 고집할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목소리는, 여성이 주축이 되는 파이어 커뮤니티의 확산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들은 노후 자금의 목표를 세웠다고 해서 그에 맞게 모든 비용을 극단적으로 줄여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일을 마친 뒤 친구와 함께 마시는 와인 한 잔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삶의 소소한 행복 중 하나니까. 단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이건 누군가와의 경쟁이 아니니 서두를 필요도 없다. 파이어 운동은 우리의 유한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한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자, 욜로로 살 것인가? 파이어로 살 것인가? 이 질문에는 모순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삶의 방식일지라도 모두의 상황에 똑같이 적용할 수 없으므로, 이건 취향과 선택의 문제를 벗어난다. ‘욜로’든 ‘파이어’든 다양한 사회 현상이 주는 메시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에 어떻게 응용하고 반영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자유와 행복, 즉 더 나은 가치를 얻기 위해 삶의 방향성을 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니까. 파이어족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 자신의 경제 상황과 생활 방식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혹시 소중한 시간을 돈과 맞바꾸고 있지는 않나? 나를 희생하면서 일하고 있지는 않나? 지금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한 걸음 멈춰 스스로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져볼 것. 노후 준비를 꼭 미래를 위한 자금 축적에 한정 지을 필요도 없다. 두둑한 통장이 지속 가능한 행복을 반드시 보장해주는 건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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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랜스 에디터
- 황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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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도서
- <뉴욕타임스 큐레이션>, 퍼블리, <파이어족이 온다> 스콧 리킨스, 지식 노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