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PC방
인터넷 사용 인구 4천만인 시대에 굳이 컴퓨터를 하기 위해 PC방에 갈 필요가 있을까? 20년 만에 PC방에 가기 전까지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7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만나기 전, “뭐 할까? 뭐 하고 싶어?”라는 질문을 서로에게 퍼붓느라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 종종 있다. 며칠 전 “이것 좀 봐”라며 한 게임 동영상을 보여주었던 그가 떠올랐다. 어쩌다 하는 게임이라고는 스타크래프트밖에 없는 남자친구가 무려 3만2천원을 주고 계정을 샀다는 그 게임은 요즘 ‘갓 게임’으로 통하는 ‘배틀 그라운드’였다. 출시된 지 7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매주 금요일만 되면 유저들이 대거 몰려 서버가 먹통돼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릴 정도로 인기 있는 게임이다. 그날은 웬일인지 그 게임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그 게임엔 대체 뭐가 있지?
그와 동네에서 만나 주변 PC방을 검색했다. ‘요즘에 누가 PC방 가나?’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PC방은 건재했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PC방 두 곳을 찾았다. 처음 찾은 곳은 20년 전에 가봤던 그곳과 가장 비슷했다. 어둡고, 찌든 담배냄새가 났다. ‘그럼 그렇지. PC방이 거기서 거기지’라며 안일한 생각으로 자리를 잡으려 하자 남자친구가 “아냐, 여기 말고 다른데 가자”라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가 옳았다. 굳이 다른 곳에 갈 필요가 있었다. 또 다른 PC방은 환한 조명에 시시때때로 공기청정기가 돌아가는 쾌적한 곳이었다. 흡연룸도 별도로 있어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정산 기계가 따로 있는데 회원가입을 간단히 하면, 그 아이디로 어느 PC를 사용하든 선불로 낸 금액만큼 시간이 차감되는 시스템이었다. ‘배틀 그라운드’는 19금 게임이라 별도의 자리가 있었다. 우리는 큼지막한 모니터와 또각거리는 기계식 키보드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요금은 1인당 3시간 30분에 2천원!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곳에서 4시간 남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일단은 만족스러웠다.
PC방에는 일정한 데시벨이 있다. 게임하러 온 사람들이 대다수이지만 중간중간 TV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참을 수 있을 만큼의 소음이 있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음악 소리, 환호성, 욕설, 웃음소리 등이 혼재한다. 스피커를 켜놓고 PC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헤드셋을 착용하고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다. 보통 소리에 민감한 게임을 하거나 드라마 다시 보기 등을 시청하는 사람들은 헤드셋을 사용한다. 커플끼리게임하고 있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배틀 그라운드는 100명 남짓한 사람들이 한 서버에 모여, 최종 1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플레이어들이 한 외딴 섬의 지도를 보며 원하는 지점에 낙하를 하면 본격적으로 게임은 시작된다. 섬 곳곳에는 폐가, 폐공장 등의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서 생존을 위해 총, 칼, 궁과 같은 무기를 수집한다. 이를 ‘파밍’이라고 한다. 열심히 파밍한 무기로 다른 99명의 경쟁자와 싸우든, 그들을 피해 다니든 생존만 하면 된다.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99명의 경쟁자 외에 점점 좁혀오는 자기장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파란색 자기장의 범위가 줄어 드는데, 그 자기장을 피하지 못하면, 피폭되어 총 한 번 겨누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니까 얼마나 빨리 무장해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느냐에 따라 이 게임의 승패가 결정되는 셈이다.
이런저런 변수에 맞게 유저들이 생존하는 방식은 세 가지다. 하나는 간디 모드다. 잘 싸울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최대한 적을 피해 다니면서 살생을 최소화한다. 둘째는 부동산 모드로, 자기장이 오지 않을 만한 장소를 선점해 건물에 숨어서 끝이 오기를 기다린다. 마지막은 가장 호전적인 방법인 여포 모드인데, 일부러 사람이 많이 가는 곳에 잠복해 있다가 경쟁자를 총으로 쏴 죽인다. 어느 정도 게임에 손이 익으면 얼마나 많은 경쟁자를 죽였느냐가 중요해진다. 잔인하지만 한 번 ‘킬’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 손맛을 잊지 못한다. 자기장이 줄어드는 속도 때문에 게임 한 판은 20분이면 끝이 난다. 그래서 다양한 전투 전략을 적용할 수 있고, 몇 날 며칠을 공들여야 하는 게임에 비해 ‘맺고 끊기’가 아주 쉽다.
그래픽과 사운드가 얼마나 뛰어난지 난 4D영화를 본 듯 총에 맞을 때마다 “윽!”, “악!”을 외쳤다. 고도의 집중력과 예민함이 필요한 게임이라 한판을 하고 나면 어깨가 뻐근할 정도다. 에너지 소모가 컸다. PC방 입구에 진열돼 있던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 음료수 등이 눈에 아른거렸다. 로그인했던 창을 켜보니 ‘메뉴 주문’에 면류, 밥류, 간식류 등이 상세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라면에 달걀, 치즈를 추가할 수도 있다. 계산은 현금, 카드 모두 가능하다. 주문 후, 10분 남짓 시간이 흐르자 점원이 잘 익은 라면 한 그릇과 단무지를 정갈한 쟁반에 담아 자리로 갖다 주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화장실 가는 것 말고는 굳이 일어설 일이 없는 셈이다.
게임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쯤 모니터에 시간이 01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알림 메시지가 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과 달리 이곳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는커녕 4배속으로 흐르는 듯했다. “시간 추가할까? 어떡하지?”라는 남자친구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그에게 4천원을 내밀었다. 우리 주변에서 게임을 하던 사람들은 하나, 둘씩 자리를 떴다. 그들의 절제력에 내심 감탄했다.
다음 날 아침에도 우리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게임에 단단히 매료된 우리는 서둘러 늦은 아침을 먹고 어제 그 PC방을 찾았다. 그때까지 남자친구의 계정으로 번갈아가며 게임을 했는데 그날은 단호한 결심을 했다. 내 생애 최초로 내 돈을 주고 게임 계정을 만든 것. 배틀 그라운드는 솔로로 참가할 수도 있지만, 팀을 이뤄 듀오(2명), 스쿼드(Squad, 4명)로 팀을 이뤄 할 수 있는 게임이다. 남자친구가 그토록 원하던 듀오 플레이를 시작했다. 팀 플레이가 재미있는 이유는 팀원과 함께 이동하기 때문에 적을 만날 확률이 높아 상대적으로 더욱 스릴 있게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것. 게다가 내가 총에 맞으면 혼자 할 때와 달리 즉사하지 않고 기절부터 해서 팀원이 나를 살릴 수도 있다. 그래서 팀 플레이를 하면 조금 더 과감한 플레이를 할 수 있다. 헤드셋을 끼면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총소리를 알려주며, 생존에 필요한 헬멧, 총, 에너지 보충제, 진통제, 구급상자 등의 기본 아이템을 주고받을 수 있다. 또한 외롭지 않다. 솔로 플레이를 하면 그 넓은 섬에 플레이어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적을 만나면 반가울 정도로 자기장을 피해 달리느라 정신이 없다. 게다가 스쿼드로 게임을 하면 잘 하는 팀원 덕에 최종 생존자가 되는 영광(!)도 누리게 된다.
초보자에 불과한 내가 최종 4인이 된 것도 모두 좋은 팀원들을 만난 덕분이다. 최종 생존자가 되면 좌측 상단에 이런 문구가 뜬다“.이 겼닭! 오늘 저녁은 치킨이닭!” 하이퍼 리얼리티를 자랑하던 게임이 뜬금없이 코믹이 되는 순간이다. 배틀 그라운드를 ‘치킨팟’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인 양 혼동할 정도로 영화 같은 게임을 하기에 PC방은 최적의 장소가 된다.
새벽바람을 맞으며 PC방을 나서니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온몸의 모든 세포를 깨우는 재미있는 액션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온 것 같다. 마감 때가 아니면 좀처럼 새벽 귀가를 하지 않는 내가 이깟 게임 때문에 밤을 새웠다는 생각에 허무함이 밀려오긴 하지만, 당분간은 PC방이라는 안온하고, 편리하며 저렴한 공간과 ‘갓 게임’이라 칭송받는 훌륭한 게임의 매력에서 헤어나오기 힘들 것 같다. 그와 나의 데이트에 PC방은 필수 코스가 될 거라는 것도 확실하다. 이제는 게임하느라 연락이 뜸해진 그에게 서운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통화 첫 질문은 조금 달라졌다. “뭐 해?”가 아닌 “전투 중이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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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전소영
- 포토그래퍼
- Kim Myung S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