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TLE NAVY JACKET
어떤 재킷도 내 몸에 꼭 맞지는 않았다. 대충 맞는 재킷을 사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을 뒤지고, 뒤지다 못해 생애 첫 재킷을 맞추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내 탓인지도 몰랐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쇼퍼홀릭으로 산 지 십수 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마음에 드는 재킷을 갖지 못했다. 범인은 내몸이다. 스커트나 팬츠는 적당히 수선해서 입었고, 코트는 약간 커도 ‘오버핏’이라 우기며 입으면 됐다. 그러나 재킷만은 그럴 수 없었다. 재킷은 몸에 꼭 맞아야 예쁘니까.
파리, 런던, 도쿄, 홍콩 등 쇼핑의 도시에서도, 세계적 편집숍과 패션 하우스에서 몇 백 벌을 입어봤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은 몸에 맞지 않고, 어쩌다 몸에 맞는 재킷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세린느, 끌로에의 재킷은 얼마나 아름답고 또 크던지! 그러다 그때그때 유행에 따라 잔뜩 멋을 부린 재킷을 사기도 했지만, 그래도 딱 기본인, 재킷의 기본형 그 자체인 재킷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생일을 두 달 남겨둔 늦여름날, 다가오는 생일에 내게 재킷을 선물하기로 했다. 맞는 재킷이 없으니 맞춰 입어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재킷 구상하기
내가 찾아간 곳은 논현동의 작은 테일러숍. ‘테일러’에게 나는 이런 재킷을 주문했다. “테이트 모던과 사보이 호텔에서도 모두 어울릴 블랙 재킷일 것. 결혼식과 장례식에도 입을 수 있을 것. 내게 잘 맞으면서 나만의 콤플렉스를 가려줄 것. 스커트에도 팬츠에도, 데님에도 어울릴 것.”
나중에야 깨닫게 된 일이지만, 정말 맞춤옷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머글’이 할 법한 말이었다. 국가별, 부위별 쇠고기가 산적한 스테이크 전문점에서 ‘맛있는 거 주세요’라고 말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테일러는 그런 재킷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돈은 들지만 말이다.
계획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실패한 재킷을 떠올리며 내가 구상한 디자인은 ‘싱글 버튼보다 더블 버튼, ’‘길이는 다소 길게,’ ‘어깨는 실제 사이즈보다 약간 크게’였다. 사실 내게 기성품 재킷이 맞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마르고 뼈대가 가는 체형 때문이었다. 몸에 맞으면 왜소해 보였고, 그 왜소함이 싫어서 약간 큰 것을 고르면 너무 웃겼다. 그래서 어깨는 약간 크게 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경험상 더블버튼이 싱글버튼보다 체형을 보완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또한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긴 체형으로 바지를 입으면 ‘배바지’처럼 보이기 십상인 나는 기성품 재킷을 입으면 어중간한 곳에서 재킷이 끊겨 안정감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길이가 충분히 긴 재킷을 찾아 헤매어왔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하는 나만의 콤플렉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옷은 나를 위한 것! 괜찮게 생각한 재킷 사진, 리얼웨이 룩 사진과 내가 갖고 있는 재킷을 가져가서 직접 입으며 이러이러한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나는 ‘더블 브레스티드 블레이저’를 맞추기로 했다.
재킷 제작하기
눈앞에 둘둘 말린 옷감이 놓였다. 브리오니와 키톤의 체크 패턴 옷감은 너무나도 보드랍고 아름다웠다(또한 비싸 보였다). 그러나 첫 재킷은 무조건 기본형을 맞출 것이기에 눈을 질끈 감고 무늬 없는 검은색 옷감을 뒤적였다. 그 틈에 눈에 들어온 남색 원단은 검은색보다 훨씬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윤기가 돌았다. “새빌로에서 온 140수 울 원단입니다. 특별히 수입한 거예요.” 후에 몇 번씩 벌어지게 될, 선택과 고민의 갈림길의 시작이 여기부터였다. 분명 나는 ‘블랙 재킷’을 맞추려고 한 것인데 네이비 원단이라니. 블랙 재킷과 네이비 재킷의 온도차는 분명 다르다. 블랙은 포멀하고 네이비는 자유롭다. 네이비는 진이든 어디든 더 잘 매치되어 자주 입을 것이지만, 장례식에는 입을 수 없다. 그러나 네이비 블레이저는 블랙만큼이나 ‘클래식’이기도 했다. 이틀을 고민한 끝에 나는 프로젝트명을 ‘리틀 블랙 재킷’에서 ‘리틀 네이비 재킷’으로 변경했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채촌’, 즉 신체 사이즈 측정이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 몸에 맞는 셔츠를 입고 재는 것이 원칙이다. 정말이지 구석구석 사이즈를 잰 테일러는 시중에 맞는 재킷이 없다는 나의 하소연에 동의를 표했다. 그랬다. 내 몸은 특이했다. 목과 어깨, 손목 등 뼈가 두드러지는 모든 부분이 아주 가늘었으며, 그에 비해 상체가 짧고 다리와 팔은 길었다. 내가 모르는 것도 있었는데, 상체와 허리에 비해 또 골반과 엉덩이는 있는 편이라는 거였다. 이런 세밀한 사이즈는 재킷의 허리 라인 등에 영향을 미친다. 처음 결정할 것은 우선 이 정도다.
가봉, 그리고 또 가봉
다시 방문한 테일러숍에서 첫 가봉을 위해 만난 내 재킷은, 재킷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의 그저 시침질로 가득한 원단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분명 재킷이기는 해서 팔을 꿰어 입어볼 수 있었다. 이 단계에서는 전체적인 실루엣과 길이를 본다. 그 후 세부적인 디자인을 다시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의미는 바로 수십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하는 디자인’만 있었지, ‘구체적인 디자인’은 없었던 나는 세밀한 질문들 앞에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단추를 보자. 어떤 단추를 달 것인가? 단추를 몇 개 달 것인가? 좀 더 위에 달 것인가, 밑에 달것인가. 앞쪽으로 달 것인가, 뒤쪽으로 달 것인가. 스티치는? 크기는? 스티치에 포인트 컬러를 넣는 것은? 이러한 과정은 가슴 쪽의 스몰 포켓, 라펠, 허리 쪽의 포켓, 안감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테일에 적용된다. 그렇게 해서 나는 맞춤을 뜻하는 ‘비스포크(Bespoke)’의 참뜻을 깨닫게 되었다. 스포크(Spoke), 즉 내가 결정하지 않으면 재킷은 완성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대답했지만, 있는 줄도 몰랐던 디테일에 대해 일일이 답하는 건 너무 어려웠다.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알아서! 예쁘게!’를 외치고 녹초가 된 나는 일단 후퇴했다.
두 번째 가봉 날, 허수아비옷 같았던 내 재킷은 포켓도 생기고, 라펠의 형태까지 대략 갖추었지만 여전히 시침질투성이였다. 다행스럽게도 포켓이 생기니 좀 더 재킷 같아 보였다. 이번 가봉에서는 세밀한 디자인을 수정하고, 몇 가지를 최종 결정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나는 약간 당황했는데, ‘엉덩이를 전부 가리는 길이’는 지나치게 길어 보였고, ‘어깨가 빈약해 보이지 않게 얇은 패드를 넣어달라’고 주문한 어깨는 너무 힘이 들어가 보였다. 고심 끝에 패드는 다시 제거하기로 했고, 길이는 3cm가량 줄였다. 이제 재킷은 ‘엉덩이를 대부분 가리는 길이’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어깨도 0.5mm 줄어들었고, 겨드랑이 밑으로도 라인을 수정하며 여기에 맞게 라펠 크기도 조정해야만 했다. 테일러가 내게 꼭 맞게 만든 소매는 짧게 느껴져 2cm를 늘리기로 결정했다. 그런 식으로 자잘한 수정에 들어갔는데, 1cm, 1cm가 고민되는 과정이다. 여기저기 시침핀이 꽂힌, 아직 ‘미생’인 재킷을 조심스럽게 벗어놓고 단추와 안감을 골랐다. 네이비 재킷에는 버건디나 붉은색 안감이 어울린다고 했지만 나는 핑크색을 골랐다. 내 마음이니까.
완성! 첫 맞춤 재킷
두 번의 가봉을 거쳐 나온 재킷은, ‘미생’에서 ‘완생’이 되어 있었다! 재킷을 맞추면서 어딘가 위축된 것도 사실이다. 어지간한 패션 마니아가 아니라면, 옷을 맞춘다는 것, 특히 복잡한 과정으로 완성되는 재킷을 맞추는 건 너무 많은 질문 속에서 허우적대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맞춤의 세계에는 ‘반맞춤’, ‘수미주라’라는 것이 있다. 브랜드에서 출시한 기성품 디자인을 골라서 자신의 체형에 맞게 맞추는 것으로 이 경우는 디자인이 완성되어 있기에 사이즈를 재고 간단한 주문 사항만 전하면 된다. 맞춤 경험이 전무한 ‘머글’이었던 나는 용감하게 ‘맞춤’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생각보다 많은 수고와 시간이 들었고, 수많은 스트레스와 휑해진 통장 잔고 끝에 나만의 재킷은 완성 되었다. 마지막으로 상단의 단추 위치를 살짝 조정했다. 비스포크 재킷은 입을수록 바느질이 부드러워지며, 내 몸에 더 잘 맞아들어간다고 한다. 재킷 안쪽 라벨에 이름과 생일이 필기체로 쓰여 있는 이 블레이저는 내게 잘 맞는다. 내가 원한 바로 그 재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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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허윤선
- 포토그래퍼
- Lee Jeong H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