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개인사 <5>
취향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사느냐의 단순한 기호를 넘어 인생의 방향과 태도를 결정짓는 채집과도 같다. 각자의 색과 무게로 삶을 사랑하는 여섯 여자의 취향과 패션 이야기.
지렁이와 소똥을 찬미하는 생활
김자혜(전직 패션 에디터, 현 하동 민박 소보루 주인장)
땅집에 살게 된 건 28년 만의 일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파트로 이사할 때까지, 작은 단독주택에서 태어나 그 집에서 자랐다. 앞마당이 딸린 2층짜리 양옥집이었다. 1층은 세를 주고 우리 여섯 식구는 2층에 살았는데 그 집에 관한 기억이 신기하게도 생생하다. 작은 발로 걸음을 뗄 때마다 삐걱거리던 마룻바닥, 엄마와 함께 페인트칠했던 초록색 대문, 그리고 할머니가 돌보던 온갖 고운 것들, 집의 오랜 안주인처럼 보이던 커다란 목련나무와 과꽃, 분꽃, 한련화, 나팔꽃, 철쭉 등 계절마다 피어나던 색색의 꽃들. 나의 모든 정서는 그 마당에서 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그 조그마한 마당에서 병아리를 키웠고, 다친 새가 죽어가는 것을 보았고, 종이인형을 오렸고, 꽃송이를 입술에 대고 쭉쭉 빨아먹었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 뒤로 쭉 아파트에 살았다. 그리고 지난해에 이곳, 하동의 작은 집으로 이사한 뒤 비로소 다시 작은 마당을 갖게 되었다. 마당을 정돈하며 내가 몰두한 것은 역시 꽃과 나무 가꾸기였다. 아파트에 살 때에도 식물을 집에 들였지만 화분에 심어진 초록들은 연약하고 제멋대로 죽어버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마당은 다르다. 통풍도 배수도 보습도 자연이 알아서 할 테니 나는 조금 돕기만 하면 된다. 해와 비와 지렁이와 소똥이 힘을 합치면 못할 일도 없다. 튤립, 아이리스 등 지난가을에 심어둔 구근식물의 꽃을 마음껏 즐기고 나니 매화와 산당화, 죽단화가 피어나고, 아기 엉덩이만 한 불두화가 주렁주렁 만발한다. 뒤이어 붉은 작약과 분홍낮달맞이꽃, 오렌지색의 홑왕원추리가 고개를 내민다. 그중에는 내가 사다가 심은 것도 있고 이전 주인들이 심어둔 것도, 어디선가 날아와 자리를 잡은 것도 있다. 꽃들이 제 능력껏 피고 지는 동안 나의 손바닥만 한 뒷마당 텃밭에서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한차례 장맛비가 무시무시하게 쏟아붓고 지나간 뒤, 토마토는 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고 어째 시원찮던 오이는 쑥 자라 있었다. 그뿐인가? 매운 고추와 로메인 상추, 깻잎, 대파, 부추, 고수, 바질이 놀라운 속도로 자라나고 있다.
이 생활이 앞으로도 계속될지 아니면 긴 여행으로 끝날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지금 여기에서 매일 생을 경탄한다. 이 작은 땅집의 안팎에서 살아가는 생명들, 그 작은 것들에게서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선택하여 일부만 취하는 법을, 형편껏 사는 법을, 체념하는 법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오늘도 마당을 둘러보며 내가 좋아하는 문장, 로댕의 말을 떠올린다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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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남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