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송지효
주름을 신경 쓰지 않고 맘껏 웃어 보이고, 자신을 내려 놓는 농담도 쉽게 던진다.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송지효에게는 어렵지 않은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만났다.
사진가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듯 한 번씩 찬사를 하면 송지효는 ‘푸흡’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곁에 있던 스태프들은 사진을 보며 “예쁘다”고 읊조리듯 혼잣말을 했다. 당사자인 송지효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게. 이상했다. 연예인 촬영을 할 때는 모든 스태프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를 향해 탄성과 환호를 지르는데, 송지효의 촬영장은 조용했다. 송지효는 ‘예쁘다’라는 말을 쑥스러워하고, 여배우라는 수식어를 낯설어했다. 송지효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촬영이 끝나고 “10분만 주세요”라고 말하더니 머리를 질끈 묶고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타났다. 그 흔한 뷰티 파우치도 없고, 평소엔 휴지 한 장만 들고 다닌다는, 치장에는 무심해 보이는 이 배우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뷰티 프로그램 <송지효의 뷰티뷰>의 진행을 맡았다. 최선을 다해보고 그에 따르는 결과는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녀는 털털하게 남의 일인 양 말했다. “어쩌겠어요. 용기 내서 일단 던져보는 거죠.” 송지효는 많이 웃었고, 많이 말했다. 그녀의 웃음이 묻어 있는 말은 솔직했다. 그래서 송지효는 더 예뻤다. 아무리 그녀가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ㅡ촬영하면서 좀 놀랐어요. 보통 화보 촬영 현장에서는 모든 스태프들이 배우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는데, 오늘은 굉장히 조용하더라고요.
과한 칭찬을 부담스러워해요. 그냥 현장에서 제 포즈나 표정이 어색하면 스태프들이 그걸 지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죠. 예쁘다는 말은 너무 쑥스럽고 창피하거든요.
ㅡ예쁘다는 말 대신 아름답다는 말은요?
물론 그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죠. 그런데 저를 움직이는 말은“진짜 같다”, “열심히 한다”, “되게 잘한다” 이런 거예요.
ㅡ<송지효의 뷰티뷰> 제작 발표회에서 뷰티 파우치가 없다고 했어요. 지금도 없나요?
네. 필요 없어요. 가방이나 파우치를 들고 다니기보다는 옷 주머니에 다 넣고 다녀요. 지금 들고 온 저 가방에도 현장에서 입을 신발이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스킨색 속옷, 누브라가 있어요. 일 안 할 때는 가방도 없이 더 단출하게 다니죠. 해외 가면서 비행기 탈 때 빼고요. 그 안에는 정전기 방지 스프레이, 마스크, 미스트, 귀마개가 있죠.
ㅡ화장에 관심 없는 당신이 뷰티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네요?
어느 날 제 얼굴을 봤는데 ‘이제는 눈 밑에 뭐라도 발라야겠구나’라는 게 느껴졌죠. 그때부터 선크림을 발랐는데, 피부가 좀 밝아지는 게 느껴졌어요. 비비크림과 씨씨크림을 바를 때쯤 프로그램 MC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화장을 할 나이가 되면서부터 줄곧 전문가가 메이크업을 해줬으니 그저 쉬운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직접 하려고 보니 너무 어렵더라고요. 프로그램 하면서 화장품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 배워가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화장을 못하는 사람도 전문가가 하는 걸 보고 시행착오를 겪을 테니 재미있게 봐주실 거라 생각해서 용기를 냈어요.
ㅡ‘민낯’이 당신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들이 화장하지 않은 제 얼굴을 보고 아프냐고 묻더라고요. 난 괜찮은데…(웃음) ‘다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조금만 더 활짝 웃어볼까?’ 했는데 용기와 자신감만으로는 안 되는 순간이 오더군요. 남들이 다 하니깐 해보는 게 아니라, 스스로 느껴서 시작한 거라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세월이 가는 걸 막을 수는 없으니까 거기에 대응할 만한 걸 해야 하지 않을까요?
ㅡ당신은 세월을 억지로 붙잡으려 시술을 하거나 성형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젊다는 건 좋은 일이죠. 하지만 어린 친구들을 만날수록 드는 후회는 ‘난 저때 왜 가진 것의 소중함을 몰랐지?’예요. 똑같은 일을 해도 회복 기간이 빨라서 금세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그 에너지도 부럽죠.
ㅡ털털한 여배우로 손꼽혀요. 때론 그게 스스로의 행동에 굴레가 되지 않나요?
저도 사람인지라 욱할 때는 있어요. 유독 제가 예민하게 느끼고 짜증나는 부분이 있어서 그 감정을 어필해야 하는데 친근한 이미지 때문에 못 한 적이 있어요. 느낀 대로 행동해버리면 “쟤 변했어”라는 말이 나올까봐 못해서 답답했던 적이 있죠.
ㅡ사람들이 여배우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은 것 같아요. 외모는 물론이고 연기, 사생활, 성격 등. 당신도 그런 틀에 얽매이지는 않나요?
저에게 ‘여배우’라는 수식어는 늘 낯선 단어예요. 여배우처럼 행동하고, 여배우처럼 대해주면 손발이 오그라들어요. 배우라는 타이틀이 아직까지는 버겁기만 해요. 저는 연기를 즐기면서 열심히 하는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이지 여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에요. 사람들이 여배우로서만 저를 본다면 안 좋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분들에게 여배우의 모습으로 어필하는 것보다는 배우로서 제 본업에 충실한 걸 보여주고 싶어요.
ㅡ가장 욱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사실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지옥이라고 하잖아요. 현관문 나설 때 부터 마음을 비워요. ‘오늘은 편하겠지’라는 생각을 안 하고, ‘오늘은 어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까?’라는 생각을 하죠. 그런데 사람 관계에서 불편한 걸 못 견뎌요. 갈등이 생기면 참는데 그래서 더 못 견디는 것 같아요.(웃음) 참다 참다 안 되면 그냥 그 사람과 떨어져 있어요. 그러다 안 되면 헤어지죠. 참을 ‘인(忍)’자를 마음속으로 세 번 쓰는 스타일이에요.
ㅡ배우 송지효를 다시 보게 된 건 드라마< 구여친클럽>에서였어요. 시청률이 좋지는 않았지만요.
그때 처음으로 조기 종영을 경험했어요. 어떤 작품이든 끝나는 시간은 있고, 그때까지 많은 분들과 한 마음으로 달려가는 재미가 있거든요. 그런데 한창 전력질주하고 있는데 끝이 바로 앞에 와버리니까 허탈했죠. 속상하기도 했고요.
ㅡ최근 드라마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의 정수연은 많은 여자가 공감했던 캐릭터였어요. 자기 일도 열심히 하고, 가정도 지키려는 여자가 느낄 수 있는 갈등이나 감정이 잘 드러났어요. 캐릭터가 송지효를 잘 만난 걸까요, 송지효가 캐릭터를 잘 만난 걸까요?
이런 얘기를 들으면 뿌듯해요.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하얀색 도화지가 작품의 틀이라면 거기에 그림을 그리는 게 감독의 몫이고, 그 색을 잘 입는 게 배우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 도화지에 있는 한 사람으로 스며들고 싶어요. 작품을 하면서는 늘 나라는 사람을 많이 버리려고 하죠.
ㅡ연기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니까 그대로 순응하느냐, 완전히 지우느냐로 갈등하는 배우도 많더군요.
저는 늘 재정비를 해요. 제 것을 고집하기보다는 ‘그때 내가 왜 그랬지?’ 라면서 곱씹는 스타일이에요.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정말 많이 물어봐요.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다 다르지만 일단 듣다 보면 저만의 것이 나타나요. 어떻게 보면 연기할 때는 줏대가 없어요.(웃음)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에 대한 재정비는 다음 작품에 들어갈 때 할 거예요. 작품 하나하나에 여운이 많이 남기도 하고, 애착이 많아요. 작품만이 아니라 주변의 물건이나 사람들을 쉽게 못 바꾸고 버리지도 못해요.
ㅡ잘 못 버리는 사람들이 정리를 못한다고 하던데요?
정리를 너무 잘해서 못 버리는 것 같아요. 버릴 걸 재배치하거나 새로운 것과 짜깁기를 할 때 재미있어요.
ㅡ예전에 쓰던 휴대폰도 가지고 있어요?
휴대폰은 물론이고 낡은 속옷도 버리지 못하고 잠옷으로 입어요. 알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청승맞은 것 같아요.(웃음) 이러니까 집에 짐이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서 부모님께 혼나기도 하죠. 제 것에 대한 애착이 많아요. 휴대폰도 한번씩 사진 보러 꺼냈다가 예전에 주고받은 문자를 보면서 ‘내 말투가 이랬고 이 사람한테는 이렇게 대했구나’ 하면서 과거를 추억해요. 과거에 얽매이는 건 아니지만 회상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ㅡ기억력도 좋은 편인가요?
길눈 밝아서 매니저들이 힘들어 해요.(웃음) <런닝맨> 멤버들한테도 방송 하면서 미안했던 일이 갑자기 떠올라서 사과하면 상대는 “응? 너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야?”라며 당황해요. 희한하게 사람들과 있었던 일이나 길은 잘 기억하는데 숫자, 이름, 제목은 잘 기억 못해요. 그것까지 잘 기억했다면 알파고가 됐겠죠.(웃음)
ㅡ당신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엄마라고 들었어요.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걸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해버리면 나쁜 길로 빠질 수도 있고, 방탕한 생활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극은 또 다른 자극으로 잊혀지니까요. 그 중심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부모님 덕인 것 같아요. 여전히 부모님이 무섭지만, 요즘은 그걸 넘어서 그립고 존경스러워요. 부모님이 이 세상에 안 계실 순간을 생각하면 두렵기도 하고요. 소중한 걸 아니까 잃을까봐 두려운 것 같아요. 부모님을 매일 보면서도 애틋한 마음이 들어요.
ㅡ의외예요. 당신은 ‘나만의 공간’에 대한 집착이 있는 독립적인 사람 아닌가요?
가족들과 함께 살아도 제 방은 지켜요. 사실 가족은 저만의 공간을 침범해도 되는 유일한 존재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저만의 공간이 더 필요하다면 차로 가겠죠.(웃음)
ㅡ언제 가장 혼자 있고 싶은가요?
심신이 힘들 때는 저만의 공간이 필요해요. 그런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는 걸 안 좋아해요. 짐을 덜어내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짐을 더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ㅡ독립을 생각한 적은 없어요?
한 번도 없었어요. 20대 초반에는 제가 밖에서 놀다가 늦게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그때 한 번은 부모님이 그럴 거면 차라리 나가서 혼자 살라고 하셨어요. 저는 싫다고 하면서 싸웠죠.(웃음) 가족들 성격이 다 독특해서 함께 있으면 제가 무척 무난하게 느껴질 정도예요 .가족들과 있으면 정말 재미있고 행복해요. 제가 왜 그 복을 차겠어요?
ㅡ인간관계가 좁고 깊은 편인가요?
7년 동안 <런닝맨>을 하면서 여태까지 폐쇄적으로 살았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이 프로그램이 제 삶을 비옥하게 만들어줬죠. 상대와 깊이 친해지려면 코드가 맞아야 하는데 그걸 알아가는 시간이 오래 걸려요. 시간이 오래 걸려도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저한테 주는 선물인 것 같아요.
ㅡ예능이 연기에 도움이 되나요?
엄청나게 도움이 돼요. 전 뭔가를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느려요. <런닝맨>을 안 만났다면 저는 지금 많이 뒤처졌을 거예요. 자는 시간과 집에 가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고 24시간 동안 저를 따라 다니는 카메라와 친해졌고, 매주 월요일, 화요일이면 만나는 제작진과 멤버를 통해 ‘세상이 버겁긴 하지만, 이렇게 유쾌하게 헤쳐나갈 수 있겠구나’라는 걸 알았거든요. <런닝맨>을 안 만났다면 제가 어떻게 살았을까 싶어요.
ㅡ올해도 당신의 연기를 볼 수 있을까요?
작품은 늘 하고 싶어요. 저에게 맞는 옷처럼 딱 들어맞는 기회가 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잖아요. 지금은 그 옷을 찾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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