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시애틀뿐

시애틀은 흐린 날씨를 보상해주는 수많은 것으로 채워져 있다. 여유롭고 친절한 사람들, 눈을 돌리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공원과 호수는 낯선 여행자를 따뜻하게 끌어안았다. 오직 시애틀에서 보고 누린 시간에 대한 기록.

Shilshole Marina in Ballard, Seattle, WA.

바다와 호수에 둘러싸인 시애틀의 해질녘 풍경.

Pike Place Market, Seattle, WA.

시애틀 여행의 시작과 끝으로 통할 만큼 인기 있는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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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클랜드 호턴 해변에서 여름을 만끽하는 사람들.

예상했던 대로 시애틀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실망했냐고? 시애틀은 흐린 날씨를 보상해주는 수많은 것들로 가득차있다. 사려 깊고 친절한 사람들, 눈을 돌리면 탁 트인 공원과 호수의 풍경이 펼쳐지고 어디를 가나 맛있는 음식과 커피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만 차를 타고 나가면 카야킹, 하이킹, 캠핑을 즐길 수 있고, 여름에도 스키를 탈 수 있는 산이 지척에 있는 도시라니. 이쯤 되니 일년 중 70% 이상이 흐리거나 비가 온다는 사실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밖에. 물론 다른 도시를 여행한다 해도 날씨에 연연하지 않겠느냐 물으면 같은 대답을 내놓을 자신이 없다. 어떠한 계절, 어떠한 날씨에도 변함없이 여행자를 설레게 하는 도시는 흔치 않을 테니 말이다.

다운타운의 낭만
차가 서서히 막히기 시작한다는 건 시애틀 다운타운에 가까워졌다는 의미다. 키 큰 빌딩으로 빼곡한 다운타운이 여느 도시처럼 삭막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서너 블럭 옆에 있는 바다와 거기서부터 불어오는 바다 냄새 때문일 거다. 게다가 빌딩만 빠져나오면 아름다운 산책로가 이어지는 워터프런트가 있고, 소풍을 즐길 수 있는 올림픽 조각 공원이 있는 다운타운이라니. 시애틀 시내는 물론 산 너머, 바다 건너의 풍경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 스페이스 니들, 19세기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된 파이어니어 스퀘어, 도시의 밤을 더 낭만적으로 물들이는 대관람차 그레이트 휠 모두가 여행자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주인공이다. 그러나 다운타운에서 가장 먼저 찾는 곳은 늘 그렇듯, 4번 애비뉴와 메디슨 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유리 건물이다. 1980년 문을 열고, 2004년 건축가 렘쿨하스의 손으로 다시 태어난 이곳은 시애틀 공립도서관(Seattle Public Library)이다. 이곳에 도착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 그러니까 햇살이 가장 많이 내리쬐는 1 0층으로 간다. 널찍한 창가 자리에 앉아 맘에 드는 책 한 권을 꺼내 읽다 보면 매번 깜빡 잠이 드는데 일어나면 어김없이 배가 고프니 신기한 일이다. 그럴 땐 고민할 필요도 없이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으로 간다. 비가 오는 평일 아침인데도 부지런한 관광객들로 시장은 이미 붐비고 있었다. 껍질 그대로 한입 베어 물고 싶은 과일, 팔딱거리는 싱싱한 생선, 형형색색의 화려한 꽃다발, 반짝이는 보석세공품…. 선물 박스를 열어보듯 설레는 마음으로 골목 사이를 걷고 또 걷는다. 100년이 넘도록 시애틀의 중심을 지키는, 연간 천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이곳에는 유난히 더 북적이는 곳이 있다. 스타벅스 1호점, 핸드메이드 치즈 가게 비처스(Beecher’s), 파이크 플레이스 차우더 앞은 늘 긴 줄이 이어진다. 관광객들에게는 덜 알려져 있지만 현지인들이 인정하는 가게는 따로 있다. 수제 요거트 가게 엘레노스 리얼 그리크 요거트(Ellenos Real Greek Yogurt)와 레이첼스 진저 비어(Rachel’s Ginger Beer)다. 상큼한 진저 비어를 마시기 위해 레이첼스를 찾을 계획이라면 초저녁에 방문해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한 잔 들이켤 것을 권한다.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 하나 있다. 메인 거리를 벗어나 뒷골목을 걷다 보면 등장하는 간판도 없는 분홍색 문. 그 문이 보이면 고민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라자냐를 주문해야 한다. 시애틀 최고의 핫 플레이스로 통하는 이탤리언 레스토랑 핑크 도어(Pink Door)는 현지 미식가들만의 공간이라 더 매력적이다. 볼 만큼 보고 먹을 만큼 먹은 후, 마지막 코스는 파이크의 수많은 꽃집 중 하나로 정한다. 제철 꽃으로 가득한 꽃다발을 단돈 10달러에 살 수 있는 유일한 장소. 부른 배를 두드리며 두둑한 꽃다발을 들고 마켓을 걷다 보면 서너 시간을 기다려 스타벅스 1호점의 텀블러를 갖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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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창으로 햇살이 쏟아지는 시애틀 공립도서관.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도서관을 즐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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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종류의 LP를 보유하고 있는 에브리데이 뮤직은 시애틀과 포틀랜드에서만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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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의 미식가들이 모여드는 멜로즈 마켓. 오래된 건물을 재단장해 더욱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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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셰프 맷 딜런이 운영하는 자연주의 레스토랑 싯카 앤 스프러스.

캐피톨 힐의 자유
캐피톨 힐(Capitol Hill)의 첫인상은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그런지 문화가 시작된 곳, 온몸에 타투를 새긴 20대와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엄마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게이 문화가 조성된 덕분에 무지개 깃발이 유난히 자주 보이는 곳 또한 바로 여기, 캐피톨 힐이다. 자유로운 예술가들이 모여든 이곳에 LP 가게와 서점, 커피숍과 작업실이 모여 있는 건 당연하다. 포틀랜드와 시애틀에만 있는 레코드숍 ‘에브리데이 뮤직(Everyday Music)’의 간판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뛰어 들어갔다. 최신 팝, 힙합부터 아이슬란드의 이름 모를 밴드가 발매한 90년대 희귀 LP까지 모두 보유하고 있는 곳인 만큼 부지런히 움직이면 맘에 드는 LP 몇 장쯤 거뜬히 건질 수 있다. 건너편 길가에는 스트리트 사진가가 멋쟁이들을 불러 세우고 있었고, 그 옆으로 재미 있는 가게가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먼저 엘리어트 베이 북 컴퍼니(llEiot Bay Book Company)에 들렀다. 삼나무로 만든 책장에 15만권에 달하는 책이 빼곡히 꽂혀 있는 이곳에 오면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나무와 오래된 책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냄새부터 맡아야 한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서점 안에 자리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시애틀 최초의 북카페이기도 한 이곳은 작가들의 낭독회가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서점 안 카페답게 책을 읽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행여나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 목소리를 낮춰 대화하는 이들의 모습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짧은 독서와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겼다면 편집숍 토토카엘로(Totokaelo)에 들를 차례. 시애틀과 뉴욕, 두 곳에 매장을 두고 있는 토토카엘로는 다양한 디자이너 브랜드를 중심으로 옷과 신발, 리빙 아이템을 판매한다. 흰색, 검정, 회색 등 무채색의 옷을 위주로 판매하는데 세일 날짜에 잘 맞춰가면 아크네 구두, A.P.C. 셔츠도 반값에 가져올 수 있다. 쇼핑하다가 배가 고파지면 오드펠로우스 카페 앤 바(Oddfellows Café & Bar) 또는 스미스(Smith)에서 식사를 하고 아날로그 커피(Analog Coffee) 또는 빅토리아(Victoria)에서 커피를 한잔 마신 후, 몰리 문(Molly Moon)의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고 나오면 캐피톨 힐의 알찬 코스가 완성되는 셈이다.

커클랜드의 여름
커클랜드(Kirkland)의 호턴 비치(Houghton Beach)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워싱턴 주의 진짜 여름이 있었다. 시애틀 다운타운에서 20분만 달리면 도착하지만 수많은 호수와 공원이 모여 있는, 그야말로 도심 속 전원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커클랜드다. 큰 개와 함께 산책하는 노인들, 거침없이 호수로 뛰어드는 소녀들, 잔디에 누워 태닝에 열중인 연인들. 당장이라도 옷을 벗고 함께 뛰어들고 싶을 만큼 부러운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호턴 비치와 웨이벌리 비치(Waverly Beach), 비치 파크를 끼고 있는 이 동네의 고급 빌라에는 은퇴한 노부부는 물론 능력 있는 아이티 업계의 젊은이들이 모여 산다. 거리는 빈틈없이 깨끗했고 사람들의 느긋한 태도에는 기분 좋은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나무 그늘 아래 누워서 맞이하는 여름의 끝. 한숨 눈을 붙이고 커클랜드의 다운타운을 찾았다. 시애틀 다운타운은 물론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소도시 벨뷰의 다운타운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작고 아기자기한 거리. 그래서 더 매력적이고 둘러보고 싶은 거리다. 산책하기 좋은 그 길을 걸으며 조카 커피(Zoka Coffee)와 시레나 젤라토(Sirena Gelato)에 차례로 들렀다. 가구점과 갤러리, 부티크숍을 구경하며 긴 여름의 오후를 만끽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다운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 주아니타(Café Juanita)로 갔다. 녹음이 절정에 달한 나무가 늘어선 창가 자리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잔을 들이켜니 마침 노을이 빨갛게 내려오고 있다. 해변의 뜨거운 낮만큼이나 근사한 여름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멜로즈 마켓의 맛
시애틀을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이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 테이스팅 룸을 방문한다. 특히 한국 관광객들의 스타벅스 사랑은 유난하다.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가게 앞에 단체로 모여 있는 한국인들이 보이니 말이다. 안타까운 건 그곳까지 와서 바로 옆에 위치한, 멜로즈 마켓(Melrose Market)을 그냥 지나친다는 사실이다. 2008년 두 사업가가 만나, 가구점과 자동차 정비소로 쓰이던 낡은 건물을 구입했고 지역에서 생산하는 유기농 먹거리를 다루는 식료품점과 레스토랑을 불러 모은 것이 멜로즈 마켓의 시작이었다. 샌드위치 가게, 와인 바, 커피 전문점, 정육점, 꽃집 등이 하나씩 문을 열었고 이제 멜로즈 마켓은 시애틀의 식문화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매년 유수의 음식 어워드에 이름을 올리는 싯카 앤 스프러스(Sitka & Spruce)는 시애틀에서 가장 예약하기 어려운 레스토랑 중 하나로 통한다. 인근에서 공수한 유기농 재료로 매일 다른 메뉴를 선보이는데 모든 요리는 인위적인 손길을 최소화하고 재료의 특성을 살려 만드는 자연주의 요리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레스토랑의 오너셰프 맷 딜런의 철학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시애틀 하면 오이스터지!’ 하고 나름 유명하다는 워터프런트 파크의 오이스터 바를 찾았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싱싱하지도 않은 굴을 비싸게 판매하는 그야말로 ‘관광객 장사’를 하고 있었던 거다. 그 후 현지인에게 수소문해 진짜 오이스터 전문점을 찾았는데 그 가게 역시 멜로즈 마켓 안에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찾아낸 테일러스 셸피시 팜스(Taylor’s Shellfish Farms)는 시애틀 바닷가에서 직접 양식한 굴, 새우, 게 등 다양한 해산물을 내놓는다. 시애틀에서 어패류 농장을 운영하는 회사가 차린 직영점이니 해산물의 신선함이 보장될 수밖에! 거기다 웃통을 벗고 오버올만 걸친 장발의 서버들, 세련된 수산시장 느낌의 인테리어는 싱싱한 굴 맛을 돋우는 데 든든한 한 몫을 한다. 멜로즈 마켓을 자주 오가며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은 이 안에 있는 모든 가게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싯카 앤 스프러스는 옆에 있는 정육점 레인 섀도 미트에서 만든 소시지, 치즈숍 더 칼프 앤 키드에서
구입한 치즈를 사용해 요리를 만들고 옆집 마리골드 앤 민트의 꽃으로 테이블을 장식한다.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들 역시 식사가 끝난 후에는 자연스럽게 마켓 안을 둘러보며 본격적인 쇼핑에 나선다. 지난해 오픈한찹하우스 로우(Chophouse Row)는 멜로즈 마켓의 오픈멤버들이 의기투합해 새롭게 선보인 공간으로 레스토랑, 바, 리빙 셀렉트숍, 헤어숍, 애견숍까지 모여 있는 새로운 형태의 복합문화공간이다. 좀 더 넓어진 내부, 안쪽으로 야외 공간까지 두고 있어 멜로즈 마켓과는 또 다른 힙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가까운 농장에서 직접 기른 젖소의 우유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커트팜숍(Kurt Farm Shop), 시애틀 최고의 빵집 아만다인 베이크숍(Amandine Bakeshop), 스타 셰프 맷 딜런이 멜로즈 마켓에 이어 두 번째로 오픈한 와인 바, 바 퍼드낸드(Bar Ferd’nand)는 맘껏 기대하고 찾아도 실망할 일이 없는 맛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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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 아트 뮤지엄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설치 작품 해머링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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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체험할 수 있는 장치로 가득한 EMP 박물관.

Uplands Vineyard old cabernet sauvignon vine and ripe clusters

탐스럽게 여문 포도송이들. 시애틀이 속해 있는 워싱턴 주는 미국 최대 와인 생산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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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몬트 거리 곳곳에서 위트 넘치는 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공공예술의 흔적
프리몬트 거리를 걸을 땐 바짝 긴장하게 된다. 건물 위에 난데없이 붙어있는 로켓, 7톤짜리 레닌 동상까지 어느 골목에서 어떤 작품을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프리몬트뿐 아니라 시애틀 거리를 걷다 보면 유난히 많은 공공예술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유니버시티 디스트릭트에는 히로시마 폭격으로 살아남은 일본인 소녀를 기리는 조각상이 있는데 그 위로 드리워진 수많은 종이비행기는 그곳을 오가는 이들의 작품이다. 주변 상점가에는 독특한 설치 미술품이, 건물에는 벽화가 넘쳐난다. 도시 곳곳에서 불쑥 나타나는 공공예술은 시애틀 지역 작가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그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이 도시에서 마음껏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거리의 쓰레기통, 맨홀뚜껑, 소화전까지 어쩌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를 이름 없이 존재하는 것들에까지 그들의 손길이 가 닿았다. 거리의 작품을 마주치는 횟수가 쌓여가면서 시애틀의 미술관이 더 궁금해졌다. 그래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무려 2만여 작품이 넘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시애틀 아트 뮤지엄(Seattle Art Museum)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해머링 맨이 서 있어 더 반가운 다운타운의 본관, 발런티어 공원의 아시아 미술관, 워터프런트의 올림픽 조각공원으로 나눠져 있는데 시애틀을 대표하는 미술관인 만큼 건물도, 작품도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한다. 파리의 유명 박물관인 국립 피카소 박물관이 기록적으로 많은 방문객을 유치했던 박물관 소장품 월드투어를 나서며 시애틀 아트 뮤지엄을 미국 최초의 전시관으로 채택했다는 사례를 들면 좀 이해가 될까? ‘뉴욕과 LA를 두고 왜?’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뮤지엄부터 둘러보아야 한다. 좀 더 느긋하고 조용한 관람을 원한다면 헨리 아트 갤러리(Henry Art Gallery)가 정답이다. 1927년에 지어진, 빛이 잘 들어오는 이 작은 건물은 워싱턴 대학교 바로 옆에 위치해 캠퍼스와 함께 둘러보기 좋다. 마침 전시 중인 폴 매카트니의< 화이트 스노>전을 둘러보고 기대했던 스카이 스페이스로 자리를 옮겼다. 천장의 동그란 구멍 사이로 빛이 쏟아져 내리는 공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이 공간에서는 말하는 것도, 사진 찍는 일도 잠시 멈추게 된다. 비오는 날의 흐린 하늘은 또 다른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내니 어떠한 날씨라도 문제 될 것이 없다. 물론 시애틀 예술의 남다른 열기는 시각 예술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부터 너바나, 앨리스 인 체인즈, 펄잼, 사운드가든 등 시애틀에서 활동한 뮤지션들의 흔적을 도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1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시애틀 교향악단은 전통음악은 물론 실험적인 형태의 현대음악 공연을 선보이는 것으로도 유명하고,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Ring Cycle)> 같은 시애틀 오페라단의 대표작을 보려면 수개월 전부터 티켓 구매에 나서야 한다. EMP 박물관은 ‘Experience Music Project’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든 장르의 음악을 귀가 아닌 몸으로 체험하게 하는, 음악 예술의 대표적인 장소다. 너바나가 실제로 사용했던 악기와 공연 의상, 수백 개의 기타로 만든 거대한 설치 작품, 프랑크 오 게리 건축물의 면면까지 둘러보다 보면 서너 시간은 훌쩍 지나 있을 거다.

자연 가까이
한여름의 설산을 보고 싶어 레이니어 산 국립공원(Mt. Rainier National Park)으로 향했다. 여름에도 만년설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활화산 레이니어는 워싱턴 주 현지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산으로 통한다. 2 6개에 이르는 빙하가 있지만 산허리에는 침엽수림이 무성하고 한쪽에서는 초원이 펼쳐지는가 하면 자연스레 걸음을 멈추게 하는 폭포와 호수도 여럿이다. 철저하게 보존된 이 공원 안에 들어서면 생애 처음으로 흰바위산양, 검은꼬리사슴과 대적하는 운이 따를 수 있으니 눈을 크게 뜨고 걷는 편이 좋다. 아무래도, 산보다는 바다지! 라고 생각한다면 산후안 아일랜드(San Juan Islands)로 가면 된다. 후안테 푸카 해협이 감싸고 있는 산후안 아일랜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프라이데이 하버와 시애틀 다운타운 피어 69를 연결하는 쾌속 페리를 타고 2시간 30분 정도 들어가거나 수상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이다. 산후안 아일랜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단연 범고래 관찰 투어다.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이 오직 범고래를 관찰하기 위해 산후안을 찾는다. 범고래는 물론 대머리독수리, 돌고래, 바다사자, 물개까지 아주 가까이에서 원 없이 만날 수 있다고 하니 관심 있다면 7월과 8월 사이를 공략해야 한다.
대신 운전해줄 동행자만 있다면 시애틀의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기에 와이너리만큼 훌륭한 곳은 없을 것 같다. 워싱턴 서부에 위치한 시애틀이 강우량이 많고 습한 기후인 데 반해 동부지역은 건조한 기후에 온화한 기온, 뛰어난 일조량으로 포도 재배에 이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시애틀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의 우딘빌에는 컬럼비아 와이너리(Columbia Winery), 샤토 생 미셸(Chateau Ste. Michelle), 로렌 애시턴(Lauren Ashton) 등 워싱턴 주의 대표 와이너리가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오랜 전통과 훌륭한 리슬링 와인으로 이름 높은 샤토 생 미셸을 찾았다. 너무 화려하지도 투박하지도 않은 단정한 건물은 그들이 만드는 와인과 닮아 있었다. 와이너리 투어를 돌며 시음하며 골라둔 와인을 들고 나와 넓은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한쪽에서 큰소리가 난다 했더니 마침 와이너리에서 준비한 클래식 콘서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마침 비가 시원하게 쏟아졌지만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한 잔은 두 잔이 되고 두 잔은 세 잔이 되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 예상치 못한 일을 경험하는 것만큼 유쾌한 일이 또 있을까. 게다가 여기는 어떠한 계절, 어떠한 날씨에도 변함없이 여행자를 설레게 만드는 도시 시애틀이니 더할 나위 없었다.

현지인처럼 시애틀을 즐기는 방법, 페스티벌!
TASTE WASHINGTON 매년 봄, 200개가 넘는 워싱턴 주의 와이너리가 참가하는 것도 모자라 50여 개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을 내놓는다. 특히 뛰어난 풍미를 자랑하는 워싱턴 주 동부 태생의 메를로, 카르베네 쇼비뇽 와인이 대거 출동한다. 한자리에서 워싱턴 주 와인을 섭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www.tastewashington.org
GROUPON BITE OF SEATTLE 50개가 넘는 레스토랑에서 대표 음식을 가져오고 지역 와인과 수제 맥주를 맘껏 즐길 수 있다. 시애틀 유명 셰프들이 선보이는 라이브 요리 무대는 물론 요리 경연 등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져 잠시도 쉴 틈이 없다. www.biteofseattle.com
SEAFAIR 시애틀에서 열리는 가장 큰 축제 중 하나. 6월부터 8월까지 약 두 달 동안 시애틀 전역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행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항공국 비행시범단인 블루앤젤스의 에어쇼와 거리에서 공연을 펼치는 ‘Seafair Torchlight Parade’가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www.seafair.com
SEATTLE INTERNATIONAL BEER FEST 워싱턴 주의 대표 브루어리는 물론 세계의 유명 브루어리 220여 개가 모인다. 약 3일간의 축제 기간 동안, 시간대별로 다양한 음악 공연이 펼쳐지니 맥주와 함께하는 뮤직 페스티벌이라 생각해도 좋다. 시애틀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현지인들과 어울리고 싶은 이들은 일찌감치 티케팅에 나서야 할 거다. www.seattlebeerfest.com

    에디터
    조소영(프리랜스 에디터)
    포토그래퍼
    Jo So Young, Visit Se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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