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레드메인의 새로운 도전
루게릭병에 걸린 천재, 어머니를 죽인 아들, 신경쇠약에 걸린 여배우를 사랑한 무명의 사진가. 늘 평범함과 거리가 먼 인물을 연기했던 에디 레드메인은 이번엔 최초의 성전환 수술을 받은 화가 역을 맡았다. <대니쉬 걸>의 에이나르 베게너 또는 릴리 엘베의 이야기다.
우리나라 시각으로 오는 2월 29일 오전 10시,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다. 호사가들의 이목은 바로 남우주연상에 집중되어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이번에 야말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과연 남우주연상을 받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 다. 영화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서 직립 보행을 잊을 만큼 기어 다니 고, 채식주의자이면서도 리얼리티를 위해 동물의 생간은 물론 생선을 산 채로 씹 어먹은 그다. 그런 그에게 오스카는 최초로 미소 지어줄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다른 경쟁자를 물리쳐야만 하는데 그 면면이 만만치 않다. 스티브 잡스를 연기한 마이클 패스벤더, 화성의 남자 맷 데이먼 그리고 여기, <대니쉬 걸>의 에디 레드메인이 버티고 있으니까. 에디 레드메인은 지난해 스티븐 호킹 박사를 연기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 이어 두 번째 수상을 노린다.
<대니쉬 걸>. 덴마크인 여성을 뜻하는 이 영화는 덴마크에서 태어난 한 특별한 여성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다. 후천적으로 여성이 되기를 선택한 인간. 최초의 성전환 수술을 받은 이 사람의 이름은 에이나르 베게너. 여성이 된 후에는 릴리 엘베로 불린 화가다. 코펜하겐에서 활동하는 화가 에이나르 베게너는 같은 화가인 게르다와 결혼한다. 어느 날, 게르다는 초상화 작업을 위해 남편에게 드레스를 입고 모델을 서달라고 부탁한다. 에이나르는 이 경험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릴리’를 발견하고 여성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려 하지만 사회적 반감으로 쉽지 않은 날을 보낸다. 그들은 결국 자유를 찾아 파리로 떠난다.
소설가 데이비드 이버쇼프는 이 놀라운 이야기를 소설로 옮겼다. 소설<대니쉬 걸>은 2000년에 처음 출간되어 람다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로맨틱 코미디와 드라마의 명가로 불리는 제작사 워킹 타이틀이 이 이야기에 흥미를 갖고 제작에 나섰다. 에디 레드메인이 남성 에이나르에서 점차 변화하는 여성 릴리를 연기하고, 차기 ‘본드걸’로 낙점된 떠오르는 스타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게르다 역을 맡았다. 이 흥미로운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에디 레드메인으로부터 들어봤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니쉬 걸>은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죠. 또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한 용기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어요. 정말 아름답고도 도전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영화 제작이 결정되기 전부터 이미 이 배역에 빠져 있었다면서요?
톰 후퍼 감독과는 <엘리자베스 1세>에서 처음 만났어요. 대본을 읽으면서 저를 떠올렸다고 하더군요. <레미제라블>을 작업할 때 제게 읽어보라면서 대본을 줬어요. 처음에 뭔지도 모르고 앉아서 읽었는데 정말 크게
감동했죠. 기꺼이 하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조금씩 준비하고 있었어요.
다른 성을 연기한다는 것.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배역 아닌가요?
망설인 건 사실이에요. 게다가 저는 항상 머뭇거리는 편이에요. 그런데 이 배역을 놓치는 것이 더 두렵게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싶었어요.
릴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실제 트랜스젠더를 만나봤나요?
물론이죠. 제가 만난 한 분, 한 분의 이야기는 모두 특별하고 지극히 개인적이었어요. 자신의 성 정체성과 신체적 성별이 다르다는 걸 깨달은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죠. 원작과 잰 모리스의 자서전에서도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맨 인투 우먼>이라는 릴리의 자서전이 있긴 하지만 여러 손을 거치면서 덧붙여진 요소가 많아요. 어디까지가 실제 릴리가 쓴 것이고, 어느 부분이 수정되었는지 알기 어려워요.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는 과정을 표현하는 건 어땠어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함께 작업한 안무가 알렉스 레이놀즈와 열심히 공부했어요. 몸짓이라는 게 외적인 동시에 또 내적인 표현이에요. 신체적인 것은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제가 배역에 다가갈 때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이에요. 특히 손짓을 가장 고민했어요. 릴리가 에이나르, 즉 남성으로 살 때도 저는 릴리의 면모를 보여주고 싶어서 자는 모습까지 고민했어요.
오, 당신은 남성이 여성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그 안에 여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연기를 했군요.
그것에 대해 감독님과 얘기를 많이 했는데, 감독님은 새로운 정체성이 갑자기 만들어지기보다는 릴리가 에이나르로 살아갈 때부터 생각하길 원했어요. 그래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당신이 릴리로 변한 모습을 사진으로 봤는데, 장밋빛 입술이 정말 잘 어울리더군요. 메이크업을 하는 과정은 어땠어요?
릴리가 되면서 점점 마스카라를 바르고 속눈썹을 붙이기 시작했죠. 저희 스태프들은 사춘기와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지나치게 화려한 메이크업이나 옷을 입으며 자신을 표현하는 거죠.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인 거예요.
이 영화에서 강박적일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했다고 하던데요?
연기는 절대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완벽하게 이뤄내려고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릴리의 이야기를 보여줄 기회를 얻었으니, 제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책임감도 따르고 자랑스러운 일이니까요. 릴리가 그러한 삶을 산 후 1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사람들의 의식은 거의 그대로라는 게 놀라웠어요. 우리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요.
릴리가 처음 정체성을 깨닫게 된 건 처음 여자 옷을 입었을 때인데, 그 장면을 연기할 때 희열을 느꼈나요?
한 줄기 빛이 내린 것이나 다름없죠.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무도회 장면은 흥분 그 자체예요. 특히 여기서 벤 위쇼가 연기하는 헨릭을 만나게 되죠. 성소수자(LGBT)들은 당시에 서로 소통하기 위해 암호를 만드는 등 간접적인 방식이 필요했거든요.
벤 위쇼, 알리시아 비칸데르 등 다른 배우들은 어땠나요?
알리시아와 함께한 오디션은 절대 잊을 수가 없어요. 한 장면을 연기한 후 감독님을 돌아봤더니, 울고 계시더라고요! 알리시아는 발레리나 출신 배우죠. 그래서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자세에 대해 칭찬하지만 그녀는 감정이 뛰어난 배우예요. 벤 위쇼도 정말 열정적이었어요.
톰 후퍼 감독과는 어땠어요?
감독님의 작업 방식에는 기준이 있어요. 모든 가능성을 조사하지만, 선택권을 항상 남겨두죠. 모든 것을 직감에 따르는 편이세요. 저는 자유롭게 몇 번이고 시도와 실패 끝에 최선을 찾아내는 타입이고요. 몇몇 감독님은 싫어하겠지만, 감독님은 제 방식을 존중해주셨어요.
코펜하겐과 파리를 오가면서 촬영했다면서요?
덴마크에서 촬영한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설렜는데, 릴리의 친척을 만나기까지 했죠. 정말 아름답고 조용한 도시예요.
이 영화에 대한 남다른 사명감이 느껴지네요.
제가 릴리로 분장하고 처음 세트장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성소수자에게 보내는 불편한 시선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어요. 저 역시 처음에는 무지해서 성별과 성적 취향이 별개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 모두가 저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의 과정이었어요. 모두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장벽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장벽에 맞서는지, 부수는 지, 아니면 최악의 상황에서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진정한 자신이 되려는 용기는 위대한 것이죠. 그녀의 용기는 제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어요. 이 영화는 저를 완전히 바꿔놓았어요.
- 에디터
- 허윤선
- 포토그래퍼
- UIP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