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따라간 여행
“길 위에 삶이 있고, 여행이 있죠.” 사진가 조선희는 모로코와 스페인, 포르투갈로 떠났다. 사하라 사막의 오묘한 달빛과 마라케시의 청명한 빛, 카디즈의 석양과 회색빛의 리스본까지. 빛과 색이 만드는 풍경을 따라갔다.
| M A R R A K E S H |
“마라케시의 메라나 공항에 도착하자, 폭신해 보이는 뭉게구름이 지평선 가까이로 내려앉아 여행자를 반겼다. 습기가 없이 차가운 공기는 깨끗하고 눈부신 빛을 만들었다. 그 빛은 나뭇잎에 어른거렸고, 한참을 처마 끝에 길게 매달렸다.”
| D J E M A A E L F N A S Q U A R E |
“마라케시의 중심은 단연 제마엘프나 광장이다. 여행객과 상인, 주민들이 뒤섞여 밤늦게까지 잠들지 않는다. 복잡한 제마엘프나 광장을 찾다가 결국 길을 잃었다. 해 질 무렵, 도시는 붉은 마젠타를 중심으로 파스텔톤이 적절하게 스며들었다. 녹색이 아닌 민트 그린, 핑크가 아닌 바랜 코럴 핑크가 얹혀진 식이었다. 아프리카 여행이 청명한 하늘색, 붉은색 대지, 그리고 진한 핑크색으로 기억되었다 면, 마라케시의 잔상은 마젠타가 남겼다.”
| M E R Z O U G A |
“사하라 사막에 가기 위해 마라케시에서 메르주가를 거쳐 2박 3일 투어 버스를 탔다. 메르주가는 사막을 꿈꾸는 이들의 전진기지이자 입구다. 달 표면처럼 기이한 모래 산과 흙으로 만든 집을 볼 수 있다. 이곳 역시 마젠타 컬러가 길게 늘어져 있다.”
| S A H A R A D E S E R T |
“사하라 사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머리 위의 별은 곧 쏟아질 것 같았다. 인공적인 불빛이라고는 딱 하나, 화장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뿐이었다. 사하라에서는 그조차도 로맨틱했다. 어떤 단어로 이 멋진 장관을 표현해야 할까? 보통 태양이 지는 궤적이 노을을 만들기 때문에 땅에서부터 붉은빛이 돌다가 위로 올라갈수록 어둠이 섞이는데, 이곳은 정반대였다. 달과 해가 공존하는 경이로운 하늘은 시시각각 색감을 바꿨다. 추운 사막의 밤, 그 생경한 빛의 세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 C H E F C H A O U E N |
“쉐프샤우엔에 들어서면 모두가 파랗게 물든다. 가가호호 온통 블루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데,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함이라 했다. 푸른 도시에 제대로 빠지는 방법은 좁은 골목골목을 헤집어 걸어 다니는 거다. 도시는 작아서 한 시간의 산책이면 충분하다. 이곳의 푸르름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태양을 온몸으로 흡수해 반짝이는 그리스 산토리니와는 또 달랐다. 골목은 빛이 들지 않거나, 있어봐야 한줄기씩 새어나올 뿐. 누군가는 모로코 전통 의상인 질레바를 입고 그늘에서 볕을 피했고 또 누군가는 햇볕을 맘껏 만끽했다. 그렇게 감질나게 보이는 빛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 R O N D A |
“작가 헤밍웨이는 스페인의 론다를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이곳 론다에서 집필했다고 한다. ‘안달루시아의 꽃’이라 불리는 도시 론다를 상징하는 것은 120m의 타호 협곡 위에 세워진 누에보 다리다. 우리의 숙소는 그 절벽 위에 있었다. 론다로 향하는 밤은 굉장히 무서웠다. 길을 비추는 등불이 없어서, 자동차는 꼬불거리는 도로에서 몇 번이나 급정차를 해야 했다. 새벽의 어둠이 걷히자 그제야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첩첩 산중에 구름이 엮인 풍경은 수묵담채화를 보는 듯 우아했다. 눈앞의 어둠을 버려야만 진짜를 얻는다는 걸, 여행을 통해 새삼 얻고야 만다.”
“스페인 남부에서는 길가에 심어진 오렌지나무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땅에 뿌리를 내린 지도 꽤 지난 듯 보였다. 빛은 오렌지와 나뭇가지에 아름답게 엉켜 붙어 싱그러운 조화를 이뤘다.”
| S E V I L L A |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시작된 투우의 진짜 고향이 세비야다. 세비야 한가운데는 세비야 대성당이 자리한다. 12세기에 지어진 이슬람 사원 위에 100여년 동안에 걸쳐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슬람 건축과 고딕,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를 이룬다. 스페인 광장의 화려한 위용은 엄청나다. 두 건축물 모두 섬세하게 조각된 첨탑을 따라 빛은 기하학적인 선을 연주한다. 서로 다른 문화가 어우러진 이국적인 그림자에, 플라멩코의 정열에 또 한번 취하고 만다.”
| C A D I Z |
“카디스는 스페인 남서부의 항구 도시다. 이베리아 반도와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추정하지만, 오래된 도시의 느낌은 많이 퇴색되었다. 카디스는 지중해의 카레타 해변을 끼고 있다. 해변 끝에는 산 세바스티안 성이 우뚝 서 있다. 그 곁에서 사람들은 낚시를 하고, 수영을 하고, 선탠을 하며 저마다의 바다를 즐긴다. 그들 위로 햇살이 바스락 부서져 내리는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한참을 바라봤다. 일행들과 함께 석양의 바다를 바라보며 쉴 새 없이 와인을 마셨다. 해는 짧고, 달이 길어졌다.”
| L I S B O N |
“몸을 실은 야간버스는 새벽 6시의 리스본으로 인도했다. 숙소는 아침 11시나 되어야 문을 연다고 했다. 한시라도 도시를 느끼고픈 여행자는 피곤함도 잊은 채 종종걸음으로 도시를 누볐다. 사람의 발길에 익숙해진 도로는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빛이 도로를 메우기 시작했다. 물탱크를 실은 차가 도로를 적시며 쓸고 갔다. 리스본 전체가 한껏 촉촉해졌다. 해는 중천에 올랐지만, 도시는 자욱한 안개가 낀 회색빛을 끼고 돌았다.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스페인과 모로코와 비교하자니 확연히 도시의 채도가 낮다. 이제껏 여행했던 유럽 도시에 비해 무뚝뚝하지만 정감 있게, 천천히 흐르는 시간이 느껴졌다. 내가 그리던 유럽은 사실, 이런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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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박소현
- 포토그래퍼
- 조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