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패션의 흐름을 바꾼 디자이너들 <1>
한국 패션 신에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 이상만 가득한 전위적인 옷은 현실을 반영하고, 자유로운 정신은 감각적인 무드로 정제되었다. 그 중심에 있는 디자이너들을 만났다.
1 클래식한 요소와 모던함을 조화한 쇼룸. 2 ‘H For Handbag’ 프로젝트의 가방. 3 사진 위에 이어링이라고 쓰여진 귀고리를 장식했다. 4 다재다능한 디자이너 이혜미. 5 지인이 그려준 그림이 인상적이다. 6 이혜미가 가장 좋아하는 레터링 책. 7 ‘D For Darling’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레터링 반지.
1 이혜미
이혜미를 수식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다재다능이다. 13년간 다양한 브랜드에 소속되어 디자이너로 일해오면서 틈틈이 개인작업을 병행해왔고, 독립한 뒤 본격적으로 잉크(Eenk)를 론칭했다. 본래 활자를 이용한 디자인과 언어 유희를 좋아한 터라 활자를 인쇄하는 액체를 뜻하는 ‘Ink’의 I를 자신의 이름에 가장 많이 쓰이는 알파벳 E 두 개로 바꾸어 브랜드명을 정했다. “알파벳은 그 자체가 기하학적이고 그 안에서 다양한 디자인을 이끌어낼 수 있어요. 폰트를 바꾸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죠. 브랜드 로고나 제품에 사용한 폰트는 직접 개발한 잉크체예요. 활자의 아래위에 얇은 바를 넣어 제가 좋아하는 아르데코풍의 느낌을 살렸어요.” 잉크는 이니셜을 중심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그래서 ‘패션’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B For Beanie’ 는 비니를, ‘D For Darling’은 반지를, ‘E For Earring’은 귀고리를 선보이는 식이다. 지금은 G와 H 프로젝트를 준비 중인데, G는 ‘G For Gold’를 주제로 쇼룸을 꾸민다. 그래서 알파벳 형태의 골드 컬러 테이블을 제작했고, 향초를 만들었다. H는 대중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핸드백을 매개체로 삼았다. 다양한 분야의 아이템을 선보이기 때문에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하나의 아이템이 만들어질 때마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제작에 관련한 부분은 전문가의 조언에 귀 기울인다. 결과물이 나오기까지 전체적인 디렉팅을 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다. 마지막 ‘A For All’로 되돌아올 때 그 아카이브가 완성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 강한 자아를 지닌 여자가 잉크의 뮤즈예요.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같은 여자죠. 제 상상 속에 인물을 설정해놓고 사람들과 그 취향을 공유하고 싶어요.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되어서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공방 같은 브랜드가 되었음 해요. 이혜미는 잉크 말고도 레어 마켓의 권다미, 정혜진과 함께 웰던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했다. 디렉팅은 권다미와 정혜진이 맡았고, 실질적인 디자인 작업은 이혜미가 담당했다. 그러나 그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서로가 좋아하는 것, 원하는 바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각자의 생각이 뒤섞이며 더 멋진 옷이 완성되었다. 이혜미는 시간이 지나고 보아도 자기답다고 생각되는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1 독특한 장식의 소매. 2 예술적인 감각의 룩북 작업. 3 디자이너 원지연과 이주호. 4 데님은 알 쉬미스트를 정의하는 중요한 소재이다. 5 영감이 되어주는 노래. 6 일본 목판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에 영감을 받은 2016년 봄/여름 컬렉션. 7 작업 일지와 샘플을 붙여놓은 작업실.
2 원지연, 이주호
알 쉬미스트(R. Shemiste)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2013년 봄/여름 컬렉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쿄와 뉴욕을 거처 서울패션위크까지 거침없이 질주했다. 보다 커머셜한 알 쉬미스트 컨템퍼러리 라인까지 꽤 많은 양의 디자인을 동시에 소화해내고 있다. 스물여섯, 스물네 살 신인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배짱이 아닐 수 없다. 듀오 디자이너인 원지연과 이주호는 동네 친구 사이였다. 원지연은 패션을 전공했고, 이주호는 사진을 찍었다. 원지연이 타성에 빠질 때마다 순수 예술을 공부하는 이주호가 많은 영감을 주곤 했다. 지금도 기술적인 부분은 원 지연이, 창의적인 영감은 이주호가 풀어내곤 한다. 알 쉬미스트의 의상은 클래식과 스트리트적인 요소의 조화를 추구하 며 기대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기에 그 나이에 맞는 스트리트 문화를 담는 것은 자연스럽다. 2013년 첫 컬렉션부터 지금의 컬렉션을 훑어보면 그들이 제대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디테일은 보다 정교해졌고, 소재의 사용은 더욱 다채롭고 능숙해졌다. 올 풀린 자수 장식이나 진주를 단 긴 소매단, 스터드 장식의 모자나 사슬 장식 벨트 등이 이를 말해준다. 알 쉬미스트 하면 떠오르는 또 한 가지는 바로 데님. “데님은 우리의 의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소재예요. 가공 방법이나 시간에 따라 변화의 폭이 크거든요. 친숙하면서도 스타일리시하구요. 이런 면이 알 쉬미스트와 닮은 것 같아 손이 가장 많이 가요.” ‘알 쉬미스트다운’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그들에게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보여주는 것이죠. 평범한 듯하지만 해체와 가공,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조합으로 발견한 미학이 알 쉬미스트만의 색이에요.”
1 담백한 실루엣의 의상. 2 스타일리스트 최경원과 함께 만든 탬버린 백. 3 간결함을 좋아하는 취향이 반영된 사무실. 4 올겨울은 미니멀한 코트가 가장 인기가 좋다. 5 디자이너 이예진. 6 러플 장식 데님 셔츠.
3 이예진
구조적인 아방가르드와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브랜드 철동을 기억하는지. 철동의 멤버였던 이예진은 철동의 철학인 단순함과 여백의 미를 추구하되 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룩을 보여주고자 솔트(Sort)를 론칭했다. “솔트는 철동의 여동생 같은 브랜드예요. 더 어려졌고, 더 접근하기 쉬워졌어요. 완벽한 멋짐보다는 조금 모자란 듯한 것이 좋아요. 그건 철동도 마찬가지였지만 솔트는 더욱 다양한 것을 수용하죠.” 그녀의 취향이기도 한 실용적인 룩은 단순히 편한 옷이 아니라 입었을 때 예쁘고, 움직임에 의해 실루엣이 망가지지 않으며, 몸의 라인과 움직임에 의해 완성되는 옷을 의미한다. 우리는 때때로 모델이 입은 완벽한 실루엣에 반해 옷을 입어보았다가 전혀 다른 결과에 곤혹스러울 때가 있지 않은가. 이예진은 의상의 움직임을 고려하기 위해 직접 입어보고 여러 번의 가봉을 거쳐 길이와 품은 물론 단추나 주머니의 위치 하나까지 고심한다. 가장 집중하는 부분은 소재로, 소재만큼은 아낌없이 투자한다. “옷의 형태와 소재가 정해지면 디자인의 90퍼센트는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 외의 것들은 포장일 뿐이죠.” 이예진은 브랜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시점부터는 가방에도 욕심을 냈다. 스타일리스트 최경원과 함께 디자인한 탬버린 백은 셀러브리티들과 패션 피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SNS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최근 두 번째로 롤링백을 선보이기도 했다. 창의성과 상업성을 적절하게 추구할 줄 아는 재능이 이예진이 가진 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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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남지현
- 포토그래퍼
- 정성원, Courtesy of R.Shemiste, Happening, Jalouse, Recto, SF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