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정육점에 시집가라고 했지만, 난 어부의 아내를 꿈꿨다. 생선은 아는 만큼 먹을 수 있으니까.

생선은 꽁치, 고등어, 갈치만 있는 줄 알았다. 아주 가끔 병어나 생태도 먹긴 했다. 바닷가 출신이 아닌 엄마가 식탁에 올리는 생선은 그게 다였다. 입맛만큼 그 가족의 지역적, 문화적 배경을 드러내는 게 있을까? 그렇다 보니 생선보다는 고기를 더 잘 먹었고, 고등학교 때까지는 회는 못 먹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좁은 집과 학교를 떠나 세상에 나와보니, 세상은 넓고 생선은 많았다. 다만 몰라서 못 먹는 거였다.

 

첫 번째 문화 충격은 대포항에서 일어났다. 늘 그렇듯 광어나 우럭에 오징어, 멍게 서비스나 받고 있는 우리와 달리 속초에 본가가 있다는 친구는 고르는 생선부터 달랐다. 아니 우선 대포항 자체를 가지 않았다. “대포항은 외지 사람들이나 가지, 우리 집 단골집은 동명항이나 물치항에 있다고.” 잠자코 따라간 동명항의 ‘고기’는 달랐다. ‘고기’라는 것부터 달랐다.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고기란 소, 돼지를 뜻하는 거였지만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고기’란 ‘물고기’였다. 삼식이, 전복치, 도치, 꼼치 등 못생기긴 엄청 못생겼고, 먹을 것도 별로 없어 보이는 고기들을 척척 골라 담았다. 마트는 물론 백화점에서도 못 본 생선들이었다. “전복치는 양식이 없어서 다 자연산이거든. 속초 사람들이 잡어회로 즐겨 먹는 거야. 도치는 데쳐 먹고, 도치알은 김치랑 탕 끓여 먹고.” 바구니의 고기는 회 뜨는 아주머니 손과 세꼬시 기계를 통해 제각기 해체되어 플라스틱 채반 위에 올라갔다. 그런데 삼식이는 어디 있지? “삼식이 걔는 매운탕 거리로 산 거야.” 아니나 다를까, 삼식이는 회를 뜨고 남은 다른 서더리와 함께 벌건 국물 속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속초에서 만난 신기한 생선은 또 있었다. 흐물흐물한 살이 목구멍으로 훌렁훌렁 넘어가는 곰치라는 녀석이었다. 주로 국을 끓여 먹는데 술병을 고치는 데 특효라고 했다. 과연 마시지도 않은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그 후 서울에서도 종종 곰치국을 찾게 되었다. 또 과메기란 것은 어떤가. 꽁치나 청어 등이 공중에 매달려 겨울 바닷바람에 얼었다 녹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 바닥으로 기름이 똑똑 떨어진다. 이렇게 완성된 과메기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호감. 자발적으로 젓가락 가기가 쉽지 않은 생김새이지만, 김과 물미역, 봄동에 과메기 한 점을 올리고 마늘과 고추를 올린 후 초장을 푹 찍어 입에 넣는 맛은, 가히 입안에서 폭발하는 맛이다.  

 

두 번째 문화 충격은 남해에서는 병어나 삼치를 조림 대신 회로 먹을 수 있다는 거였다. 제주의 갈치회와 고등어회는 신선한 횟감을 바로 썰어 준다는 것에서 광어, 우럭회와 공통점이 있었다. 병어회와 삼치회는 ‘선어회’에 속했다. 여수에서는 병어와 삼치, 민어 등을 선어회로 먹는다. 선어회는 수조에서 노니는 생선을 바로 잡는 게 아니라, 생선을 잡아 피를 빼고 충분히 숙성하고, 경우에 따라서 얼려두기도 했다가 그때그때 썰어 주는 회다. 약간의 숙성을 하더라도 회는 곧 활어회라는 등식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여수 사람들이 선어회 중 으뜸으로 치는 게 바로 삼치였다. 고등어처럼 빨리 죽는 습성 때문에 활어로 먹기는 쉽지 않지만, 선어회로 먹을 때 그 맛이 살아난다고 한다. 좀 먹는다는 사람들도 삼치회 맛을 잊지 못해 여수를 찾을 정도다. 삼치회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는데, 밥이랑 싸 먹으면 또 다른 포근한 맛을 낸다. 씹을 것도 없이 녹는 맛이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이 맛은 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남해에서는 멸치회도 맛볼 수 있었다. 무릇 멸치라는 생선은 바싹 말려서 밥 반찬이 되거나 국물이 되는 운명이 전부인 줄 알았다면 남해에서 만난 멸치는 튀김이 되었다, 회무침이 되었다 활약이 비상했다. 앤초비처럼 비릴 것 같다는 건 편견이었다. 남해에서 만난 멸치회의 맛은 보드라우면서 촉촉하기 그지없었다. 여름에만 맛볼 수 있다는 하모를 데쳐서 양파 위에 얹어 먹기도 했다. 생선이 이렇게 달큼할 수도 있었다. 금풍생이나 볼락처럼, 남쪽에서 다 먹어 치워서 서울에 올라올 것이 없다는 생선도 맛보았다. 포실하면서 쫀득한 맛이 구이의 왕이라 할 만했다. 

 

이쯤 되자 한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먹을 수 있는 게 생선이고, 아는 게 없다면 적어도 새로운 생선을 시도할 용기는 있어야 한다는 것. 소설가 한창훈 선생의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와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는 생선의 맛을 책으로 배우게 했다. 그는 고향인 거문도에서 글을 쓰고 낚시를 하며 지내는 중이다. 그가 길어놓은 바다의 맛은 식탐을 맹렬하게 부추긴다. 그는 홍합도 자연산 홍합만 먹고, <1박2일>에서나 본 거북손을 따먹고, 보리멸처럼 활자로만 들어본 생선이나, 살괭이처럼 듣지도 못한 생선을 먹는다. 그의 책은 바다, 육지를 오가며 먹을거리에 빗대어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죄송스럽게도 내게는 생선에 대한 갈증만 남았다. ‘물고기 박사’로 불리는 황선도 선생의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생선 12종의 이야기가 담겼다. 명태가 사라지고 있는 게 가슴 아프다. 이제 그만 먹어야 하나?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그것이 삼면의 바다에서 제각기 다른 생선이 잡힌다는 의미로 다가오는 요즘, 내게는 새로운 로망이 생겼다. 제주 잡지 <iinn>은 제주의 초밥집인 스시 호시카이와 함께 제주 생선으로 만든 초밥 가이드북 ‘제주 바다 생선’을 부록으로 펴냈다. 옥돔, 금태, 벤자리, 부시리, 뿔돔 등 육지에서 만나기 어려운 생선을 초밥으로 곱게 쥐어 만든 이 작은 책자를 소중히 품고 있다. 올해 맛봐야 할 생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