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맛 <1>

기억의 영화 창고를 열었다. 무엇보다 생생한 맛으로 눈과 혀끝을 두드린 음식이 떠올랐다. 음식은 접시 위에서 영화 속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되곤 했다. 아름다운 영화 속에 존재한, 가장 선명한 맛은 무엇일까?

1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2014

웨스 앤더슨의 동화적인 세계가 다시 한 번 펼쳐진 영화. 1927년 세계대전 속 가상의 도시에 존재하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이야기다. 이 호텔의 소유주인 마담D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호텔의 지배인이자 연인인 구스타브가 범인으로 몰린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명화 ‘사과를 든 소년’을 그에게 남겼다는 이유다. 구스타브와 충직한 로비보이 제로는 누명을 벗기 위해 나선다.

초콜릿 케이크 물론 주인공은 호텔 지배인 구스타브지만 영화를 보면 안다.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것. 로비보이 제로와 호텔에 디저트를 납품하는 멘델 제과점 제빵사 소녀 아가사의 러브스토리는 시종일관 사랑스럽다. 그들 모두를 이어주는 구심점인 멘델 제과점의 핑크색 박스는 티파니 박스보다 탐스럽고, 그 안의 케이크는 마카롱보다 예쁘다. 세상에 둘도 없는, 그래서 더 완벽한 케이크의 탄생이다. 영화 제작진은 멘델 제과점의 케이크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영상을 남겼다. 유튜브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팬서비스격인 초콜릿 케이크 만드는 법을 공개한 것이다. 유튜브에서 ‘How To Make a Courtesan au Chocolat’을 검색하면 모든 재료부터 만드는 방법까지 차근차근하게 일러주는 친절한 동영상을 만날 수 있다. 물론 그 모든 건 웨스 앤더슨 식으로!

2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 2013

올해 개봉한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 중 하나인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빛바랜 색감과 프랑스식 위트, 수수께끼로 가득한 작품이다. 이름에서 느껴지듯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모티프를 땄다.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읜 폴은 그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채 두 이모와 함께 산다. 이모들은 폴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만들고 싶지만 정작 폴은 번번이 콩쿠르에서 낙방하고, 이모의 미뉴에트 교습소에서 반주를 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 사는 마담 프루스트의 집을 방문한 폴은, 아파트의 비밀 정원에서 그녀가 키운 차와 마들렌을 먹고 조금씩 과거를 떠올린다. 

브랜디에 담근 체리 음식에 관해 일가견이 있는 프랑스 영화답게 영화에 등장하는 허브 차, 마들렌, 정찬 등 음식의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 가장 흥미로운 건 고급스러움에 대한 강박이 있는 듯한 두 이모를 취하게 한 브랜디에 담근 체리다. 두 사람은 커다란 병에 담긴 브랜디 체리를 병째 껴안고 연신 씨를 뱉으며 해변에서 난동을 부린다.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병에 체리를 한가득 넣고 브랜디나 코냑을 채운다. 여기에 설탕이나 꿀을 넣어도 된다. 술을 따라 마시고, 체리도 꺼내 먹는다. 이모들처럼 깔깔대며 먹으면 더 좋다.

3 토스트 | 2010

영국의 셀러브리티 셰프 나이젤 슬레이터. 신은 그에게 요리하는 재능뿐만 아니라 글 쓰는 재능도 함께 주셨다. 그는 칼럼뿐만 아니라 소설도  펴냈는데, <토스트>는 그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를 다룬 동명의 자전 소설을 영화화했다. 포스터만 보면 이 영화를 음식이 어우러진 행복한 영화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영화는 현실의 어두움도 반영한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그가 요리하는 걸 싫어하며, 새어머니는 요리는 수준급이지만, 그 요리로 나이젤을 괴롭힌다. 

버터 바른 토스트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하지만 음식 솜씨가 없어 늘 통조림 아니면 토스트만 먹인다. 늘 음식다운 음식을 갈구하는 나이젤은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처음으로 파스타를 만든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이후 새어머니는 음식을 매우 잘하지만, 사랑하는 법은 모른다. 새어머니가 만든 레몬 머랭 파이를 한입 먹은 나이젤은 충격에 휩싸이고, 그만큼 맛있는 레몬 머랭 파이를 만들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화려한 레몬 머랭 파이와 토스트. 셰프로, 작가로 성공한 나이젤은 구름 낀 소년 시절을 솔직하게 담아낸다. 그가 말하고 싶은 건 단지 뛰어난 맛이 음식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갓 구워서 버터를 쓱쓱 바른 토스트가, 그의 인생에서는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4 터치 오브 스파이스 | 2009

1960년대 이스탄불. 파니스의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향신료 가게를 운영한다. 할아버지는 늘 향신료에 인생을 빗대 주옥같은 어록을  남긴다. 그러나 한일관계만큼 더 복잡한 그리스와 터키의 역사 문제가 이들을 갈라놓는다. 터키 정부가 그리스계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킨 것. 할아버지는 뒤따라 가겠다고 했지만 끝내 오지 않는다. 파니스는 할아버지, 그리고 첫사랑 사이메가 보고 싶을 때마다 터키 요리를 만든다. 이윽고 교수가 된 파니스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십 년 만에 이스탄불로 향한다.

미트볼 아들이 요리를 하는 게 못마땅한 파니스의 부모는 그에게 부엌 출입금지까지 선언하지만 그래도 요리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는 없다. 이국적인 터키의 음식이 펼쳐지고, 그 향기가 스크린 밖으로 나풀나풀 다가오지만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되는 ‘맛’은 파니스가 만드는 요리가 아니다. 어느 날,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이 할아버지의 향신료 가게에 찾아와 미트볼을 만들 재료를 찾는다. 돼지고기와 양파, 향신료를 넣어 둥글게 반죽한 음식이 미트볼인데, 제대로 만들려면 향신료를 꼭 넣어야 한다. “아가, 계피를 넣어라.” “미트볼에 계피를 넣는 사람도 있나요?” 할아버지의 답. “완벽한 것이 늘 옳지는 않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양념을 넣으면 맛은 좋겠지만 기억에는 남지 않지. 하지만 새로운 걸 넣으면 먹는 사람은 만든 사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단다. 그 남자를 사랑한다면 계피를 넣어라.” 흔히 사용하는 커민 대신 계피를 넣으라는 조언. <시네마 천국>의 재림으로 부르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영화다.  

5 하와이언 레시피 | 2009

일본 영화 중에는 음식을 정갈하고 탐스럽게 표현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영화가 많다. 이 영화는 일본을 떠나 하와이로 갔다.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달무지개를 보러 하와이 북쪽, 호노카아 마을에 찾아온 우리의 주인공 레오는 그만 여자친구에게 차인다. 이후 다시 호노카아를 찾은 레오. 이곳에서 다양한 마을 사람들과 가까워진다. 그중 남편을 잃은 비이 할머니는 고양이밥을 몰래 훔쳐 먹은 레오에게 매일 정성스러운 식사를 준비한다. 비이 할머니는 말한다. “사람 밥을 만드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캐비지롤 레오와 비이 할머니는 함께 캐비지롤을 만든다. 영화만 보고 따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세세하다. 다진 고기에 후추, 소금으로 간을 하고 양파와 파슬리, 치즈도 넣어 반죽한다. 데쳐 숨을 죽인 양배추잎에 반죽을 넣고 동글게 돌돌 만다. 밀가루를 솔솔 뿌려 프라이팬에 지지는데, 이건 익히는 과정에서 쉽게 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 그 후 치킨스톡에 크림을 풀어 넣고 한참을 익히면 비이 할머니의 크림 양배추롤이 완성된다. 영화 속에 캐비지롤이 비중 있게 등장한 건 처음이 아니다. <글루미 선데이>에서 캐비지롤은 비극을 잉태한 음식이다. 이 영화 속에서는 토마토 소스로 익힌 캐비지롤이 나왔다.   

6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 1992

라우라 에스키벨의 동명 소설을 그녀의 남편이자 멕시코를 대표하는 감독 알폰소 아라우가 영화화했다. 멕시코의 정치, 문화, 사회적 배경을 음식을 통해 표현하는 이 작품은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가득하다. 멕시코에는 명문 집안의 막내딸은 시집가지 않고 어머니를 모시는 전통이 있는데, 그래서 막내딸 티타는 사랑하는 페드로와 결혼하지 못하고 페드로는 그녀를 지켜보기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티타의 언니와 결혼한다. 부엌에서 태어난 티타는 요리를 좋아하고, 집안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인디언 유모에게서 요리를 배운다. 음식에 자신의 감정을 불어넣는 능력이 있는 티타의 주방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장미꽃잎을 곁들인 메추리 소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은 1년을 상징하는 1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각 장마다 중요하게 등장하는 요리의 레시피를 함께 적고 있다. 그러므로 자세한 레시피가 궁금하다면 책을 확인하길. 영화에는 눈물의 웨딩케이크와 초콜릿 등 다양한 요리가 등장하는데 페드로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욕망을 투영한 3월의 장미꽃잎을 곁들인 메추리 요리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속에서 페드로는 처제가 된 티타에게 장미꽃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그녀는 이 장미꽃으로 소스를 만든다. 요리에는 신선한 장미꽃잎과 메추리가 필요하다. 장미꽃을 올리브유와 설탕, 식초를 넣고 버무리고, 메추리는 다양한 향신료로 양념해 오븐에서 굽는다. 이 음식을 먹은 모든 사람은 사랑과 정염에 휩싸이고 만다. 식사를 마친 또 다른 언니는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 위해 샤워를 한다. 그녀의 몸 내음은 천리 밖을 달려 혁명군 장교에게 다다르고 그녀는 알몸으로 뛰쳐나가 혁명군의 아내가 된다. 이렇듯 마술적인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영화다.  

    에디터
    허윤선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