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가 달라졌어요
영화 포스터는 그 영화의 자기소개서나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 개봉하면서 달라도 너무 달라진 영화의 자기 소개서를 모았다.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그래비티(Gravity)>
우주 조난을 소재로 삼고 있긴 하지만 <그래비티>는 그 이야기를 매우 차분하고, 서정적으로 풀어간다. 재난 그 자체보다는 관계와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는 말이다. 하지만 ‘Don’ t Let Go(놓지 말아요)’라는 원래의 문구 대신 ‘이것이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진짜 재난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스페이스 오딧세이>, <아마겟돈> 같은 SF 재난 영화처럼 보이게 됐다.
<작전명 발키리(Valkyrie)>
오리지널 포스터를 사용했더라면 적어도 같은 해 개봉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rious Bastards)>과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세련된 영화라는 느낌이라도 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톰 크루즈의 얼굴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게 사용하고, 키스하는 연인을 합성한 국내 개봉 포스터는 지나치게 전형적이었다. 영화는 당시 톰 크루즈의 내한과 설 연휴 특수에도 불구하고, 개봉 첫 주 479개 스크린에서 31만 249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
영화는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여행을 따라간다. 그 여정에 사랑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연애를 자아를 찾는 과정보다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국내 개봉 포스터는 <러브 액츄얼리>의 성공 이후 끊임없이 반복되어온 ‘포스터 가로로 등분하기’ 기술을 펼쳐 보였다. 내면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로맨틱 코미디처럼 보이는 이유다. 20년 전의 줄리아 로버츠였다면 그렇게 보이는 게 더 영리한 선택일 수도 있었겠지만.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The Butler)>
포스터에 쓰인대로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는 미국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3주 연속 거머쥐었다, 지난해 <노예 12년(12 Years a Slave)>과 함께 흑인 인권을 다룬 영화로 화제를 불러 일으킨 작품이지만 국내 관객수는 57만 명에 그쳤다. 물론 국내 포스터도 나쁘지 않다. 다만,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2013연 최고의 포스터로 꼽았던 원래의 포스터가 좀 더 기억에 남는다.
<로드 오브 워(Lord of War) >
전설적인 무기 거래상의 이야기를 다룬 <로드 오브 워>는 충분히 흥미로운 영화다. 미국의 무기 밀거래에 대해 전 세계인의 관심이 높았던 이라크 전쟁 직후에 나온 영화이니만큼 미사일과 탄피로 인물을 형상화해 간접적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한 원래의 포스터를 살렸더라면 좀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을 거다. 국내 개봉 포스터는 정작 무기는 잘 보이지 않는 데다가, ‘Lord’라는 상대적으로 생소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전쟁의 제왕(Lord of War)’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데도 실패했다.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이 신경 쓰여서였을까?
<브라더스(Brothers) >
토비 맥과이어, 나탈리 포트만, 제이크 질렌할. 쟁쟁한 세 명의 배우가 등장한 이 영화가 국내에서 잊혀진 데에는 포스터 탓이 크다고 믿는다. 관계의 단절과 엇갈림, 고통과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원래의 포스터 대신 국내 개봉판 포스터는 어정쩡한 표정을 한 주연 배우 세 명의 얼굴이 겹쳐져 있을 뿐이다. 심지어 합성도 엉망이다.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
<브이 포 벤데타>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미국판은 물론이고, 프랑스 개봉 당시의 포스터에 회화적인 요소를 적용한 것도 그 때문일 거다. 국내 포스터는 회화적 요소 대신, 1990년대에나 사용했을 법한 그러데이션 그래픽으로 배경을 표현했다. 국내 인지도가 높은 배우인 나탈리 포트만을 포스터에 등장시키지 않은 것도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개봉 당시 그녀가 영화를 위해 삭발까지 하며 열연을 펼친 것이 꽤 화제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Only Lovers Left Alive) >
짐 자무시 연출에 틸다 스윈튼과 톰 히들스턴이 연인으로 등장한 이 영화는 끝내주게 스타일리시한 뱀파이어 커플의 이야기다. 모로코 탕헤르를 배경으로 삼고, 남자 주인공의 직업을 뮤지션으로 설정한 것만 봐도 얼마나 잔뜩 멋을 부렸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국내 포스터는 이 커플의 오묘한 느낌을 전혀 전달하지 못한다. 독일에서도 해당 장면을 사용한 포스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여러 버전 중 하나였을 뿐이다. 게다가 영화에서 이 컷은 크게 중요하지도, 인상적이지도 않다. 다른 아름다운 장면들에 비하면 더더욱!
<일대종사(The Grandmaster) >
<일대종사>는 놀랍도록 웅장한 영화다. 포스터에 쓰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무협 액션’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이 영화에서 쿵후는 예술 그 자체다. 하지만 국내판 포스터 속 장쯔이의 의상은 기괴하기 그지없다. 영화를 보고 나면 중요한 격투 신에서 입은 모피코트라는 것을 알 수 있긴 하지만, 영화 포스터의 기능은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불행히도 <일대종사>가 개봉한 대부분의 국가가 비슷한 장면을 포스터에 사용했다. 미국에서 뒤늦게 공개한 이 흑백 포스터는 간결하고 우아하며, 무엇보다도 왕가위의 영화처럼 보인다.
<세크리터리(Secretery)>
S&M이라는 은밀한 취향을 다루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영화, <세크리터리>. 상상의 여지가 풍부한 원래 포스터 대신, 여비서에 대한 판타지가 증폭되는 장면을 포스터에 등장시켰다. 유행어를 사용하면 시간이 지났을 때 놀랍도록 촌스러워 보인다는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차칸’이라니!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
개봉 당시 13살이던 야기라 유야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인상적인 그의 옆 얼굴을 전면에 사용한 일본 개봉 포스터와 달리, 국내 포스터는 4남매가 함께 있는 장면을 담았다. 오리지널 포스터의 서늘한 느낌 대신, 따뜻한 느낌을 살렸기에 비극적인 영화의 결말이 더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Hot! <님포매니악 볼륨 1(Nymphomaniac:Vol 1)>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또 다른 문제작. ‘색정광’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단 이 영화는 그야말로 섹스 중독자인 여주인공 조(샤를로트 갱스부르)가 자신의 지난 정사를 고백하는 이야기다. 다채로운 등장인물이 그녀의 회상에 등장하는 가운데, 오르가슴을 느끼는 인물들의 모습을 담은 포스터가 결국 우리나라에서 ‘블러’ 처리 되어 개봉된다. 배우들의 얼굴이 등장하는 다른 포스터들이 모두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는 바람에 외부에 홍보 이미지로 쓰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는 것이 관계자의 말. ‘채워줘!’라는 본래의 포스터 문구도 ‘보여줄 수 없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카피로 대체됐다. 재치 있는 대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슬프다. 한편 일부 영화계 관계자들은 <님포매니악>의 오마주 포스터를 직접 촬영했다. 이 포스터는 <맥스무비 매거진>에 게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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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처 에디터 / 이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