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시간은 흐른다
광주의 겨울을 걷고 싶어서 남쪽으로 향했다. 무등산 자락도, 20세기 초 광주의 모습이 남아 있는 양림동의 길목도, 모두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했다.
몇 년 전 광주를 찾았을 때, 택시 기사가 물었다. “아가씨, 인구 150만인 도시 중에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이 있는 곳은 세계에서 광주가 유일하다는 거 아세요?” 아저씨의 무등산 사랑은 무등수박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야기를 들으며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무등산의 높이를 검색해봤다. 가장 높다란 천왕봉의 높이가 해발 1187미터. 택시 기사의 말이 맞았다. 정말 그런 도시가 광주뿐인지는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광주는 대도시다. 부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남단을 지탱하는 호남 최대 도시. 그러나 그 명성에 비해서 꽤 조용한 곳이기도 하다. 도심인 충장로를 벗어나면 아파트를 제외한 높은 건물은 도통 찾기 힘들고, 인구도 광역시 중에서 가장 적다. 주상복합 빌딩들의 등장으로 완전히 달라져버린 해운대의 스카이라인, 전주 한옥마을 인근에 무수한 게스트하우스가 생겨난 것 같은 극적인 변화도 없다. 하지만 그 한결같음이 광주를 계속 찾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여전히 1~2만원만 내면 한 상 가득 정식을 차려주는 대도시가 광주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탁 트인 바다는 없지만 대신 도시의 삼면을 감싸는 넉넉한 산이 있고, 대단한 유적은 없지만 그 이름 자체가 우리의 현대사를 상징하는 도시, 광주로 향했다.
무등산 자락에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광주를 부드럽게 안고 있는 것은 무등산이다. 없을 ‘무’에, 비교할 ‘등’. 무등산과 비교할 산은 없다는 뜻이라고도 하고, 불교에서는 ‘모든 게 평등하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광주에 도착하자마자장 먼저 향한 곳도 무등산 국립공원이었다. 여느 유명한 산처럼 입구에는 커다란 식당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김치로 대통령상을 받았다는 김치 장인의 식당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1인분에 1만5천원짜리 정식을 시켰을 뿐인데 갈치, 게장, 돼지고기, 모둠전, 온갖 채소와 나물이 상 위에 가득 차려졌다. 그리고 드디어 등장한 홍어삼합! 광주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무등산은 식당만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산자락에는 의재미술관, 무등현대미술관, 우제길미술관 등 크고 작은 미술관이 늘어서 있다. 공사 중인 우제길미술관을 지나 얼마전 새로 생겼다는 문화예술공간 해와에 들렀다. 10년 된 3층 규모의 일식당을 개조한 이곳은 갤러리와 카페,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심리치료센터로 지난 가을 무등산 기슭에 자리 잡았다. 해와를 찾은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마음을 치유 받는다. 심리극전문가, 미술치료 전문가, 미술상담사부터 정신과 전문의, 철학자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뜻을 모아 만든 공간으로 1층에 마련된 카페에서는 심리치료사가 직접 내려주는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일식당의 룸을 개조해 만든 2층의 게스트하우스 객실은 총 5개. 환자뿐 아니라 일반인도 숙박이 가능하다. 1일 숙박 요금은 5만원이니, 무등산 입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곳에 위치한 깔끔한 숙소치고 괜찮은 가격이다. 1층 갤러리의 전시는 매달 바뀌는데, 방문했을 때는 중국의 현대미술가인 송용홍의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주말에는 인문학 강좌와 무등산 둘레길인 무돌길을 함께 걷는 1박 2일 캠프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니 무등산 기슭에서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이만한 곳도 없을 거다.
무등산 국립공원 내에 자리한 의재미술관에 가기 위해 다시 국립공원 입구에 섰다. 우리나라 남종 산수화의 마지막 대가라고 불리는 의재 허백련 선생을 기념하는 곳이다. 미술관은 의재 선생이 생애 마지막을 보냈던 춘설헌이 있던 자리 맞은편에 지어졌다. 국립공원은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만큼, 미술관으로 가려면 걷는 수밖에 없다. 새해 첫 등산을 광주에서 하게 될 줄이야! 그렇게 15분쯤 걸었을까? 하마터면 미술관을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등산로의 경사를 이용해 지은 탓에 아래에서 바라보면 건물 윗 부분만 빼꼼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뒤만 살짝 돌아보면, 길을 향해 커다란 유리창을 내고 나무와 티타늄, 아연을 소재로 사용한 근사한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의재 미술관은 광주에 있는 건축물로서는 유일하게 ‘한국건축대상’을 수상한 곳이기도 하다. 의재 선생의 아버지 허련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였고, 의재 선생의 손자인 허달재는 매화를 그린다. 철저하게 동양화만 소개하는 미술관의 생김새가 이토록 모던하다는 것은 흥미롭다. 무엇보다 의재미술관은 진짜 건축적 경험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미술관 바깥으로 난 문, 철제 난간과 기둥, 유리창 사이사이의 얇은 틈이 빛과 만나 만들어내는 길고 가느다란 그림자들, 그리고 로비의 유리창 가득 들어오는 무등산의 풍경까지. 풍경을 고려한 설계도와 자연이 만들어낸 감응의 순간은,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한층 근사하다. 여름이었다면 지금처럼 앙상한 겨울나무가 아닌, 울창한 나무들이 창밖을 채웠겠지만 대신 겨울의 햇살처럼 흐릿하고 기다란 그림자는 만날 수 없었을 거다. 미술관 골조를 따라 떨어진 그림자들이 하도 반듯해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떠올랐다. ‘시와 서예, 회화는 서로 구분될 수 없는 한 몸이고, 그 진정성은 격조 높은 정신과 올바른 삶으로부터 나온다’, 전시관 입구에 써 있던 문장을 되새기며 미술관 밖으로 나갔다. 새해를 맞이한 무등산의 공기가 맑았다.
시간을 걷는 길, 양림동
무등산에서 내려와 본격적인 건축 기행을 시작하기로 했다. 광주 양림동은 근대 건축물들을 짧은 시간에 돌아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달라진 한옥,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서양식 근대건축물이 한 동네에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군산과 인천 차이나타운의 근대문화유산 거리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양림동에 남아 있는 서양식 건축물들은 종교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110년 역사의 양림교회, 1911년에 세워진 천주교 학교 수피아 여자 중고등학교,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전쟁 고아를 돌보기 위해 만든 선교 사회 복지기관인 충현원 등등. 같은 근대 건축물이라고 해도 항구 도시인 인천에 남아 있는 은행, 사교클럽, 화교들의 주택과는 종류가 다른 셈이다. 그나저나 왜 선교사들은 양림동에 정착을 시작했을까? 양림동은 본디 공동묘지터였다고 한다. 자연히 땅값이 저렴했고, 유교 성향이 강한 양반들이 살기 꺼려해 배척받을 일도 없었다. 낯선 땅을 찾은 선교사들에게는 최고의 터전이었던 거다. 호남 지역 선교의 시작점이었던 양림동에는 지금도 호남신학대학교와 기독간호대학이 들어서 있다.
제대로 지어놓기만 하면 몇백 년은 끄떡없는 건축물은 사람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킨다. 양림동에 남아 있는 많은 근대식 건축물은 기껏해야 2~3층 높이의 자그마한 건물들이 대부분이고, 양식도 화려하지 않다. 시간이 묻은 벽돌과 부식된 기둥과 돌계단에서 느껴지는 100년의 시간 자체도 감탄할 만하지만, 양림동의 건축물이 정말 의미 있는 건 이 공간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증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오웬기념각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다 폐렴으로 사망한 오웬 목사를 기억하기 위해 그의 손자가 보내온 돈으로 세운 곳이다. 간호사였던 부인과 함께 몸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낯선 땅에서 환자를 돌봤던 파란 눈의 외국인을 우리는 ‘오기원’이라고 불렀다. 그의 한국 이름을 따 오기원기념각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던 당시, 대대적인 연설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창문을 통해 내부를 기웃거리고 있자니 외벽을 청소 중이던 관리자 아저씨가 말을 건다. “<각시탈> 알어? 그거 찍은 데가 여기야.” 독립운동 연설을 했던 곳이 한 세기 뒤에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촬영지가 되다니!
오웬기념각에서 ‘민속길’이라고 적혀 있는 간판을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이장우 가옥과 최승효 가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학교와 교회가 있던 5분 전 풍경이 무색하게 좁은 골목이다. 두 곳 모두 현재 사람이 살고 있으니, 약속을 미리 잡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허탕을 쳤기 때문에 이번에는 단단히 약속을 잡고 이장우 가옥 앞에 섰다. 고택은 바깥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광주시에서 지정한 제 1호 민속지정 자료이기도 한 이장우 가옥은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가 배치된 전형적인 조선시대 상류층 가옥 형태다. 관리인 가족이 사는 곳은 행랑채로, 사랑채로 보이는 곳에는 현재 윤회매 작가인 김창덕 작가가 거주하고 있다. 밀랍으로 매화꽃을 만드는 윤회매는 조선 시대의 실학자인 이덕무가 고안한 것으로, 매화에서 얻은 벌의 꿀로 밀랍을 만들고, 그 밀랍으로 매화를 만드는 것이 ‘윤회’에 가깝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방에 들어가볼 수는 없었지만 미닫이문 틈새로 언뜻 LP판과 책들이 시간이 멈춘 듯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구한말에 지은 이장우 가옥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한옥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그중에 하나가 일본식 정원인데, 겨울이라 제대로 된 정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대신 담벼락에 핀 새빨간 남천을 계속 바라봤다.
양림동은 과거의 유산이지만, 가장 활발하게 문화가 형성되는 동네이기도 하다. 재작년에는 양림동 태생인 시인 김현승의 호에서 이름을 빌려온 ‘다형다방’이 양림동 골목에 등장했다. 무인 다방이라 준비된 커피와 차를 마시고, 양심껏 5백원을 넣고 가면 된다. 이 작은 다방에는 양림동의 역사와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제자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작곡가 정추, 중국의 아리랑이라 불리는 ‘옌안송’을 작곡한 정율성 등 양림동이 배출한 인물들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다.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힘썼던 윌슨(그는 우월순이라고 불렸다!) 선교사 사택, 오웬기념각의 실내에서 공연을 펼친 <양림의 소리를 듣다>, 양림미술관에서 열린 인문학 축제 <굿모닝 양림>, 그리고 크리스마스 축제까지. 오래된 광주의 풍경은, 이렇게 광주의 현재와 접점을 찾아가고 있다.
그리고 다시, 지금으로
물론 광주에도 재빠르게 변하는 곳이 있다. 바로 불로동이다. 광주 최고의 번화가인 충장로에 속해 있는 불로동 카페거리는 광주의 트렌드세터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크지 않은 골목이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옷가게로 가득하다. 놀라운 건 디스플레이가 정말 세련됐다는 것! 부티크처럼 꾸며놓은 옷가게는 당장 들어가서 가격표를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게 하고, 인테리어가 근사하다는 이유만으로 뻔한 파스타의 맛이 궁금해지는 레스토랑도 꽤 많다. 2~3층 규모의 커다란 레스토랑 겸 카페 사이사이에 자그마한 옷가게와 카페들이 공존하는데, 마치 서울 가로수길과 그 뒷골목을 압축해놓은 것만 같다. 모로코 문양이 그려진 외관에 이끌려 들어간 카페 일루이는 지난 8월 문을 연 불로동의 핫 플레이스다. 1층은 카페 겸 레스토랑, 2층은 옷가게로 운영하고 3층 옥상은 예약한 사람만 사용 가능한데 루이보스 티가 5천5백원, 파스타는 1만원 초반대에 맛볼 수 있다. 훌륭한 분위기에서 서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뭔가를 누릴 수 있다는 건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이다. 더 깜짝 놀란 건 30년이 넘은 광주 최고의 육전집 대광식당을 찾았을 때다. 기아 타이거즈 출신인 이종범 코치가 선수 시절 단골이었다던 이 오래된 식당이, 카페처럼 리모델링을 해버린 거다. 하얀색 벽, 하얀 타일, 하얀 식탁보가 깔린 육전집을 본 적 있나? 심지어 정장을 차려입은 아주머니가 아롱사태 한 점, 한 점을 찹쌀가루와 달걀에 묻혀 직접 구워주기까지 한다.
그동안 조용했던 광주에, 올해는 꽤 많은 변화가 생길 것 같다. 구 전남도청 앞에 들어설 아시아문화전당은 막바지 공사에 접어들었고, 어느덧 20주년을 맞이한 2014년 광주 비엔날레는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열릴 예정이다. 무엇보다 임시로 운영됐던 5.18 광주트라우마 센터가 법인 기관으로 설립된다. 5.18 민주화 항쟁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진압에 투입됐던 군인들까지도 치료의 대상자다. 늦은 화해지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광주는 이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이마루
- 포토그래퍼
- 안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