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그런지 스타일
커다란 로고를 드러내고, 긴 카디건에 체크 셔츠와 베이비 돌 드레스를 입는 등 2013년 패션계는 지금 1990년대 그런지 문화에 흠뻑 빠져 있다. 어떤 구구절절한 설명도 필요 없다. 그때의 음악과 패션을 그대로 즐기면 될 뿐.
‘X세대’나 ‘신인류’라는 신조어를 만든 90년대 뉴 키즈들이 돌아왔다. 커다란 로고 프린트로 도배한 힙합 스타일을 입거나,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즐겨 입던 그런지 룩으로 강렬한 패션 스타일을 선보인 뉴 키즈들이 드라마와 영화 속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서태지와 듀스에 열광하며 바닥에 질질 끌리는 바지에 엉덩이까지 오는 길이의 티셔츠, 그리고 ‘스냅 백’ 모자나 니트 비니를 매치한 힙합 소녀와 허리까지 치켜올린 벙벙한 청바지를 입고(밑단은 접어야 한다, )폴로 티셔츠와 리복과 나이키로 대표되는 운동화를 신은 <응답하라, 1994>와 영화 <건축한 개론>의 주인공들처럼 1990년대 열풍은 패션계에서도 진행 중이다. 생 로랑의 에디 슬리만은 체크 셔츠를 아무렇게나 겹쳐 입은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연상되는 그런지 룩을 선보였고, 마크 제이콥스는 한동안 런웨이에서 자취를 감춘 더플 코트를 부활시키며 1990년에 데뷔한 자신의 초창기 스타일을 불러 모았다. 브랜드 탄생 25주년을 맞이한 DKNY 역시 마찬가지다. 올 초 이미 오프닝 세레모니와의 협업을 통해 커다란 로고 티셔츠를 선보이며 90년대 스타일에 빠져 있음을 한 차례 고백한 DKNY의 도나 카란은 스포티한 가죽 보머 재킷과 집업 점퍼를 비롯해 큼직한 라펠의 울 코트와 콤비를 이룬 호피 무늬 니트 원피스 룩으로 펑키한 매력의 그런지 룩을 선보였다. 이런0 9년대 스타일을 영민하게 보여준 디자이너는 겐조의 캐롤 림과 움베르토 레온이다. 겐조는 다양한 패턴의 오버사이즈 봄버 재킷과 미니 랩스커트를 매치한 룩으로 지금 패션계 곳곳에 침투해 있는 1990년대 스타일을 가장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90년대에 매료된 수많은 디자이너의 룩을 살펴본 결과는 한마디로 ‘더 과감하게 더! 어려 보이게!’특히 생 로랑 컬렉션에서 선보인 베이비 돌 드레스에 퍼 코트나 무통 재킷을 매치한 룩처럼 다 소 어려 보이는 소녀 감성의 그런지 룩이 이번 시즌 새롭게 떠오른 신선한 스타일이다. 평소에 입고 다니기엔 너무 과하다는 의문이 든다면,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줄 만큼 근사한 몇 가지 그런지 룩을 살펴볼 차례다. 가죽 재킷에 니트 풀오버와 셔츠, 분홍색 누빔 쇼츠나 슬라우치 팬츠로 다채로운 레이어드 룩을 선보인 3.1 필립 림의 룩은 충분히 현실적이면서도 누구나 탐낼 만큼 세련된 여자를 위한 소녀적인 그런지 룩이다. 그런지 룩조차 섹시하고 쿨하게 연출하고 싶다면 이자벨 마랑컬렉션을 참조하자. 프린트 원피스에 코트를 매치하고 시퀸으로 장식한 얇은 스카프를 둘렀다. 소녀풍 원피스라도 충분히 쿨해 보이고, 그런지 룩이 오히려 섹시한 느낌을 자아낼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그런지 룩의 주요 아이템으로 떠오른 체크 셔츠와 호피 무늬 스커트를 매치한 스타일도 트렌디한 그런지 룩 연출을 위한 좋은 팁이 될 수 있다. 체크 셔츠를 입을 땐 잠옷을 연상시키는 슬립 드레스를 매치하면 긴 실루엣을 만들어 날씬해 보이고, 호피 무늬 스커트에는 같은 호피 무늬의 긴 니트 스웨터를 더하면 트렌디하게 연출할 수 있다. 이때 호피 무늬의 크기와 컬러를 똑같게 맞춰야 훨씬 완성도 있게 스타일을 마무리할 수 있다. 클래식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편이라면 드리스 반 노튼처럼 셔츠와 니트 스웨터, 재킷에 스커트와 팬츠를 겹쳐 입어 치마바지처럼 연출해 단정하면서 클래식한 무드로 풀어내도 좋다.
자칫 지나치게 과한 그런지 룩을 연출하지 않기 위해선 기억해야 할 요소가 있다. 첫째, 심플한 디자인의 의상을 고를 것. 디자이너들이 제안한 그런지 룩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디테일도 배제한 심플한 디자인의 톱이나 재킷, 스커트로 패턴 자체의 과감한 매력만 부각한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액세서리를 자제할 것. 이미 여러 겹의 옷을 겹쳐 입기 때문에 너무 많은 액세서리의 사용은 스타일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주얼리는 심플한 귀고리나 반지 정도면 충분하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검은색 부티나 앵클 부츠처럼 최대한 힘을 뺀 듯 보이지만 세련된 슈즈 취향을 은근 슬쩍 드러내는 것이 좋다.
이렇게 90년대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단순히 ‘응답하라 시리즈’가 상징하는 ‘핫젝갓알지(‘H.O.T.’, ‘젝스키스’ , ‘god’ , ‘NRG’ 를 총칭하는)’ 시대의 뜨겁고 순수했던 열정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90년대는 거리에서 패션을 꽃피웠던 시절이다. 이건 20년이 지나 그 어느 때보다 스트리트 패션을 활짝 꽃피우고 있는 지금과 맞닿아 있다. 그것이 당신이 바로 오늘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90년대 스타일 사용설명서를 습득해야 하는 이유고, 누가 뭐래도 꽤 오랫동안 1990년대 패션 열풍은 계속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말 그대로 응답하라, 1990년대여!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김미주
- 포토그래퍼
- KIM WESTON ARNOLD, 김현우, 박병진
- 기타
- 어시스턴트 / 정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