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연극, 영화를 넘나드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응당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제대로 받지 못했음에도 그는 어떠한 아쉬움도 미련도 없다. 다만 숨을 고르게 쉴 수 있는 지금이, 앞으로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흔들림이 없는 깊은 여름밤을 닮은 남자, 배수빈을 만났다.

블루종은 구찌(Gucci). 슈트는 김서룡 옴므(Kimseoryung Homme).화이트 셔츠는 로다(Roda).

생각했던 것보다 밤에 핀 유채꽃과 잘 어울리네요.
그런가요? 하하. 비 올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멈췄네요. 유채꽃이 언제 이렇게 다 폈나 싶어요.

얼마 전에도 등산을 했죠? 매니저가 통화가 안 된다고 하더군요.
틈 날 때마다 등산을 해요. 사람들과 시간 맞추기가 힘드니까 혼자 가게 돼요. 쉬는 동안 산도 타고, 공연도 보러 다니고, 최근에는 발레 공연 <라 바야데르>를 봤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혼자 잘 노는 편이에요.

연극 <광해, 왕이 된 남자> 때의 덥수룩한 수염을 깨끗이 잘랐네요. 허전하지는 않아요?
적응될 때쯤 연극이 끝나서 잘랐어요. 그간 정이 들었는지, 왠지 벌거벗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지난 두 달 동안 광해와 하선으로 뛰고 구르며 치열하게 살았어요. 영화로 흥행한 작품이라 선택이 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시나리오 자체가 워낙 좋았어요. 연극이 영화 시나리오와 동시에 기획된거라 완성도도 높았고요. 영화가 잘될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크게 흥행했고, 연극으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 힘이 여전할 거라 생각했어요. 매 공연이 끝나고 나면 탈진할 만큼 열심히 했고, 많이 배웠어요.

그렇게 다 쏟아내고 나면 어떤가요?
신기한 건 몸은 힘든데 정신은 더 맑아진다는 거예요. 힘든 만큼 채워지는 것도 많았어요. 쉽게 얻어지는 게 있나요. 대중들에게 심판도 받고, 저 스스로도 끊임없이 긴장했던 시간이었어요.

연극이 처음은 아니죠. <다리퐁 모단걸>, <이상, 12월 12일>, 그리고 <광해, 왕이 된 남자>까지 꾸준히 무대에 오르는 이유는 뭔가요?
처음 무대에 오를 때는 설레고 떨리고 흥분되고 무섭기도 하고 굉장히 복잡한 생각이 드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완성되어가는 걸 보면서 희열을 느끼죠. 조금씩 보완해나가면서 경험이 쌓이고, 그게 축적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 같아요.

영화 <마이 라띠마>가 6월 6일 개봉이죠? 개봉을 앞두고 단막극 촬영에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다음 주에 촬영을 시작해요. 김규태 감독님, 카라의 강지영 씨와 같이 하기로 했어요. 어리고 귀여운 친구라 밝은 기운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마이 라띠마>는 지독히 추운 겨울에 촬영을 마쳤죠. 영화의 분위기와 겨울이라는 계절의 합이 절묘했어요.
정말 너무 추웠어요. 동해도 가고,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촬영을 마쳤죠. 흥행을 떠나서 많은 사람이 봐주었으면 해요. 제가 찍은 영화라서가 아니라 관객의 입장에서 흥미롭게 봤어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 모두의 삶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요. 추악함과 배신, 사랑,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말이에요.

당신이 맡은 인물인 수영에게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세상에 버려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녀요. 연기를 하는 데 있어 그 수식에서 자유롭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수영에게는 저의 모습도 있었어요. 성장통을 겪었던 경험들 말이에요. 그건 저만의 경험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했어요. 정도가 다를 수는 있지만 그걸 느끼는 과정은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요. 그래서 수영을 더 이해할 수 있었고, 수영으로 살아가는 게 힘들지만은 않았어요.

결국 수영은 아무에게도 버려지지 않았던 거죠.
맞아요. 다만 스스로 버려졌다고 여길 뿐이에요. 자신이 버려졌다는 자기연민 때문에 삶을 극단으로 몰아가고,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상황이 벌어져요. 대학을 졸업했는데 직업이 없다는 건 개인을 넘어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죠.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소외감, 이주 여성과 다문화 가정에 대한 현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요.

‘라띠마’를 연기한 박지수 씨는 연기도, 영화도, 주연도 처음이었죠?
모든 게 처음이다 보니까 ‘그녀에게서 뭔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자’라는 생각으로 뛰어들었어요. 저도 유지태 감독도 스태프도 마찬가지였어요. 한 장면을 스무 번 이상 찍기도 했어요. 그녀가 가장 힘들었을 거예요. 많은 사람의 인내와 기다림이 있어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아요.

데뷔 후 처음으로 전라 베드신에 도전한 소감은요?
하필 칼바람이 부는 폐건물 안이었죠. 촬영할 때 굉장히 힘들었는데 지나고 나니 좋은 기억이에요. 꼭 필요한 장면이기도 했고요. 노숙자도 되고, 호스트도 되고 이번 영화에서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어요.

카디건과셔츠, 팬츠는 보테가 배네타(Bottega Veneta). 로퍼는 로크코리아(Loake Korea).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유지태 감독과는 친분이 있었나요?
알고 지낸 사이예요. 저는 ‘DMZ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 홍보대사고, 유지태 씨는 이 영화제의 부집행위원장이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그가 시나리오 모니터를 부탁해서 읽어본 거였어요. 시나리오에 반해서 수영을 해보겠다고 제안했죠.

유지태 씨가 반색했겠는데요?
서로가 좋았던 거죠. 언젠가 연기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완성된 시나리오로 본 거니 저도 운이 좋았죠.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지 서로의 생각이 잘맞기도 했고, 그걸 공유하는 게 수월했던 것 같아요.

감독으로서의 유지태는 어땠나요?
예상한 그대로였어요. 섬세하고 헌신적이고, 창작자로서의 생각과 태도도 훌륭했어요. 아마 이제까지 배우로서도 그래왔을 거예요. 감독이 된다고 해서 그가 가진 것들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인간 유지태’가 연출에도 그대로 묻어났다고 생각해요.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되었을 것 같네요.
빨리 촬영장에 가고 싶었어요. 그도 카메라 앞에 선 저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고요. 어려운 제작 여건이었지만 서로 믿고 가는 거였죠.

프랑스 도빌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것도 그렇고, 스토리도 그렇고 영화 <파이란>과 많이 비교가 되요.
비슷한 부분이 꽤 있어요. 하지만 풀어내는 방식은 분명 달라요. 영화 들어가기 전에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들어가는 영화를 많이 봤어요. 순간순간 갈림길에서 선택하게 되는 악한 행동에 따른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거예요.

그렇게 파고드는 역할을 할 때에는 개인적인 시간을 더 갖게 되겠죠?
원래 혼자인 걸 좋아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만남은 자제하는 편이에요. 어려운 자리에 가서 에너지 낭비하는 걸 싫어해요. 대신 좋아하는 사람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하죠. 그 에너지를 쌓아두었다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본인이 가진 것 중에 배우로서 도움이 되고, 또 그렇지 않은 것들에는 어떤 게 있나요?
예전에는 부족함 없이 자란 게 연기를 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그것 또한 저를 만든 거니까 이제는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여유롭게 제가 원하는 작업을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 외에도 더 있을 것 같은데요?
부지런한 편이에요. 늘어질 때는 한없이 늘어져서 문제이긴 하지만요. 하기 싫은 건 안 하고, 한 번 꽂히면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게 탈이에요. 연기에는 도움이 되는데 일상생활에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가 되죠.

본인이 가장 피곤하지 않나요?
들어갈 때는 모른다는 게 문제예요. 나오고 나서야 주변이 보이거든요. 사진도 하고, 음악도 했어요. ‘흉내는 내지만 재능이 없구나’를 확인하게 되었는데, 연기의 경우에는 많은 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깨고 부수는 걸 반복했던 것 같아요.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배우가 제 업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계속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좋아하는 마음이죠. 계속 끌리는 거예요. 연기자는 타고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체적인 부분도 있지만 그보다 감각적인 부분이 더 중요해요. 그게 있어야 다양한 캐릭터에 들어가고 나오고를 반복할 수 있거든요. 제가 가지고 있는 감각적인 부분을 끊임없이 인지하고 끄집어내려고 노력해요. 그러다 정말 지치는 순간이 오면 그냥 놔버려요. 한 발짝 떨어져서 멀리서 보는 거예요. 그러다가 다시 돌아가면 막혔던 부분이 스르르 풀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