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시윤이 참 바르다는 소문은 진작부터 들었다. 모든 질문에 그 10배는 되는 긴 답을 돌려준 덕에 초등학교 때 읽은 <삼국지> 이야기부터 최근 하는 봉사활동에 관한 이야기까지 수다를 떨었고, 끝에는 꽤 엉뚱한 윤시윤의 얼굴이 보였다. 올해, 스물아홉 살이 되는 윤시윤은 이렇다.

턱시도 재킷, 셔츠, 보타이는 모두 권오수 클래식 (Kwonohsoo Classic). 팬츠는 김서룡 옴므 (Kimseoryong Hom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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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총리와 나> 첫 방송이었죠? 퇴근할 때 보니까 검색어 1위를 차지했더군요. 본방 사수했나요?
혼자 봤어요. 모니터를 할 때면 꼭 수능 모의고사 가채점하는 기분이에요. 신나게 볼 수가 없어요.

어떤 인터뷰에서 이범수의 연기를 ‘격이 다르다’고 표현했던데, 대사를 주고받을 때마다 긴장되겠어요.
이범수 선배는 캐릭터를 창조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아주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어요. 같이 호흡을 맞출 때 깜짝깜짝 놀랄 정도예요. ‘앗, 이거 너무 세게 주시는데?’ 싶다가도, ‘밀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게 되죠. 스릴 있고 재미있어요.

중국에서 촬영한 <해피 누들>이 현지에서 시청률 1위를 차지하고, <이웃집 꽃미남>도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공중파 드라마는 오랜만이에요. 부담을 느끼나요?
공중파이기 때문에 갖는 부담감은 없어요. 어느 나라에서 찍건, 어느 채널에서 방송이 되건 촬영은 똑같거든요. 본인이 케이블보다 공중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제 행보가 다르게 보이겠죠.

극중 강인호는 총리실 수행과장이예요. 그야말로 엘리트인 데다가, 30대 초반의 남자로 설정돼 있더군요. 당신의 실제 나이보다 어른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처음 아닌가요?
이전에 연기했던 캐릭터들은 감정이 얼굴에 바로 드러난다면 강인호는 감정을 한번 더 생각해요. 화났을 때 밝게 웃고, 기분이 좋은데 울 수도 있다는 거죠. 이번엔 그런 역할을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전 솔직한 편이라 감정 표현을 좀 정제하고 싶었거든요.

왜요? 솔직한 게 더 좋지 않아요?
조용히 행복해하고, 화를 부드럽게 삭일 수 있을 때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전에 연기한 캐릭터들이 실제 저와 닮았다면, 강인호는 제가 되고 싶은 모습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체중도 감량한 건가요? 7킬로그램이나 빠졌다면서요!
좀 더 날카로워 보이고 싶었어요. 그런데 멋있어 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해요. 그건 제 영역이 아닌 것 같거든요. 외모는 나이가 들어서 꽃피우고 싶어요.

하하. 벌써부터 꽃중년을 노리는 거예요? 어떻게 나이 들고 싶어요?
안성기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요.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인상이지만 그렇다고 또 약하지는 않고, 무한대의 신뢰감을 주잖아요. 그런 배우의 깊이와 남성성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실제로 뵌 적은 없지만요.

늘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연기를 할 때만 그런가 했는데 <맨발의 친구들>을 보니 예능을 할 때도 마찬가지더군요. 타고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타고나다니, 절대 아니에요. 하지만 데뷔작인 <지붕 뚫고 하이킥>이나 두 번째 작품인 <제빵왕 김탁구>에서 너무 많은 걸 받았잖아요. 그래서 그때의 저를 사람들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어요.

저처럼 <이웃집 꽃미남>의 엔리케 금을 먼저 보고, 준혁 학생이나 탁구를 나중에 알게 된 사람도 많을걸요?
탁구일 때 저는 전력질주하는 마라톤 선수 같았어요. 열심히 뛰는 것처럼 보이긴 했겠지만 페이스 조절에 실패하면 완주는 물 건너가는 거죠. 운동선수들도 ‘힘 빼는 데만 3년 걸린다’고 하잖아요. 이제 힘을 뺀 연기를 하고 싶어요. 빨리 달려야 할 때 제대로 달릴 수 있도록 말이에요.

원래 오늘 인터뷰를 할 때 ‘김탁구’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 이야기가 지겨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지겹진 않아요. 하지만 어떤 갈증이 제 안에도 분명히 존재하긴 하는 것 같아요.

‘갈증’이라고 표현을 하네요.
시청률 50%를 넘긴 작품의 주인공이었다는 건 로또 당첨보다 어려운 거잖아요. 이제는 로또 당첨금으로 잘 살 건지, 당첨금 전부로 다시 로또를 살 것인지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런데 한 사람에게 로또가 두 번 터지는 일은 확률적으로 제로에 가깝잖아요? 계속 욕심 내다 보면 결국 저만 불행해질 것 같아요. 로또에 당첨되는 엄청난 행운을 누렸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욕심을 버리려고 해요. 착하거나 겸손해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생각한 결과예요.

큰 파도가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한 번 보고 나면, 한결같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더 느끼게 될 것 같아요.
‘내 편’이라는 건 항상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존재죠. ‘왜 내가 좋을까?’ 그런 생각도 많이 해요. 저를 성실하다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슈트, 셔츠, 보타이는 모두 권오수 클래식.운동화는 나이키(N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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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할까 말까 고민이 많을 때 지금의 매니저를 만났다면서요? 스무 살밖에 안 됐을 땐데 뭐가 그렇게 고민스러웠어요?
세상에는 서열이라는 게 있잖아요.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데도 모두가 암묵적으로 그 서열을 인식하고 있고요.

수학여행 갈 때 버스 뒷자리는 인기 많은 친구들 차지인 것처럼요?
그럴 수도 있고요. 학교에서도 연기나 노래를 해 소속사에 들어갔거나 인기가 있는 친구들은 학교 가기 싫어서 다른 핑계를 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지지하고 좋아해줬죠. 그런데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특별한 직업을 꿈꾸는 건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넌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데, 왜 그런 특별한 꿈을 꾸려고 하지?’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자신감을 점점 잃을 수밖에 없었겠어요.
처음에는 ‘너희가 날 몰라서 그래, 난 할 수 있어!’ 하고 생각했는데 스무 살 때, 서울에 올라온 후 그 마음이 점점 사라졌어요. 잘생기고 끼 있는 친구들이 넘쳐나고, 소속사에 들어가는 게 너무 힘들고, 이미 인터넷에서 유명해진 친구도 있고, PD 아들도 있고. 그런데 전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계속 연기를 하는 건 고시 준비와 비슷한 것 같아요. 계속 내 스스로를 견디고, 닦아낼 때 결과가 나타나니까요.

오히려 더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고시는 합격이라는 명확한 순간이 있잖아요.
다행히 저도 지금은 ‘가합격’을 했죠. 지금은 고시 2차, 3차를 보는 중이에요.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때까지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으려고요.

꼭 그렇게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할까요? 이제 자신감을 가져도 좋을 것 같은데요.
자신감은 있어요. 그런데 자신감과 무모함은 다르잖아요. ‘난 잘할 수 있어. 난 나를 믿어. 난 나를 사랑하니까!’ 이런 건 프로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거든요. <시크릿> 같은 책을 보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우주의 기운이 너를 도와준다고 하고, 오디션을 볼 때도 다들 ‘잘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에 대해 좀 더 생각해야 되지 않나 싶어요.

당신은 그 ‘어떻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편인가요? 배역을 결정하는 기준이 있어요?
제게 중요한 건 잘할 수 있느냐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제가 사극에 출연한다고 하면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럼 그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걸 고민해보고, 힘들 것 같으면 욕심이 나더라도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 작품을 위해서라도요.

그럼 당신이 잘하는 건 뭐라고 생각해요?
저는 세련된 연기가 썩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진입장벽이 낮은 작품을 하고 싶어요. ‘대충 이렇게 만들면 사람들이 좋아하더라’ 하고 만든 것 말고, 시선이 따뜻한 작품이요.

사람을 금방 판단할 것 같진 않아요. 그런 당신도 ‘이 사람 진짜 싫다, 얄밉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유흥에 깊게 빠진 사람들은 조심하려고 해요.

‘유흥’이라는 단어는 오랜만에 듣네요. 본인은 유흥을 즐기는 편이 아니죠?
술도 마시고, 클럽도 가긴 해요. 그런데 그쪽으로 너무 깊게 빠진 사람은 다른 취미가 아예 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사람이 인공 조미료를 잔뜩 뿌린 음식만 먹다 보면 원래는 맛있는 음식인데도 그 맛을 못 느끼게 되잖아요. 그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만나는 친구들 중에도 그런 친구들이 있어요?
제 친구들은 딱 두 종류예요. 저랑 비슷한 부류, 그리고 노는 걸 되게 좋아하는 친구. 그런데 저는 그렇게 노는 건 일년에 한두 번이면 충분한 것 같더라고요. 맥주 한 잔 놓고 마시면서 대화하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맨 정신으로 들으면서 사람들을 느끼는 게 더 좋아요.

단어나 표현이 예전에 인터뷰한 중견 아나운서 분을 떠오르게 해요. 애늙은이 같다는 말 많이 듣겠어요.
솔직히 좀 듣는 편이에요. 그래서 형님들이 절 예뻐해주세요. 이경영 선배님하고 친한데 정말 재미있는 분이에요. <맨발의 친구들>에서 만난 현중이 형하고도 자주 연락하는 편이에요.

대기실에 있을 때나 잠깐 시간이 날 때마다 대본을 계속 보더군요.
새로 대본을 받았는데 아직 제대로 분석을 못했어요. 작품 시작하면 저는 나름의 매뉴얼을 만들어놓거든요. 캐릭터의 습관, 참고할 만한 캐릭터, 캐릭터의 감성에 맞는 음악 등 도움이 될 만한 데이터를 전부 한 폴더 안에 모아두곤 하죠.

그럼 그 음악은 언제 듣나요?
캐릭터에 빠져야 하는데 집중이 안 될 때가 있잖아요. 캐릭터는 화가 나 있는 상황인데 저는 기분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럴 때는 미리 정해둔 ‘인호의 분노’에 해당하는 곡을 계속 틀어둬요. 마치 전환 스위치 같은 거죠.

음. 모든 배우가 그렇게 하지는 않죠?
각자 다른 방법이 있겠죠?

 

턱시도 재킷은 김서룡 옴므. 셔츠, 보타이, 팬츠는 모두 김서룡 옴므

턱시도 재킷은 김서룡 옴므. 셔츠, 보타이, 팬츠는 모두 김서룡 옴므

우리나라 드라마는 대본이 현장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고, 예측하기 힘들 때가 있잖아요. 기껏 구축해놓은 캐릭터가 뒤로 갈수록 달라져서 혼란스러운 경우는 없나요?
그래서 제작진과 대화를 많이 나눠요. 그리고 캐릭터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작가 분들 이야기도 먼저 들어보고요. 제가 또 ‘이거 아니면 안 돼!’ 이런 성격은 아니라서요.

예전 인터뷰를 보니까 ‘연애를 많이 한 적이 없다’고 답을 했더군요.
제가요? 그때 이미지 관리를 했었나 봐요. 왜 그랬지?

그 말은 연애를 많이 해봤다는 뜻인가요?
사랑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생각해서요. 짝사랑도 있고, 친구 같은 관계도 있을 수 있고요.

짝사랑도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사귄다고 관계를 정립한 이후에는 소유욕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진짜 그 사람을 사랑하면 내 것이 아니더라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짝사랑이어도, 친구로 지낼 때도 잘 지내야 연인이 되어도 좋은 관계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첫눈에 반해서 불타오르는 연애는 당신에게는 없을 것 같네요.
연인으로 시작하면 처음에 서로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다가 나중에 ‘변했다’고 하잖아요. 그게 원래 그 사람의 모습인데 말이에요. 그런데 서로 알던 사이라면 ‘얘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날 위해 이렇게 해주는구나’ 하고 새롭게 발견하고 더 고맙게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태어나서 가장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 있다면 뭐예요?
여행을 자주 떠나요. 혼자 갈 때도 있고, 친구들하고 가기도 하죠. 갑자기 ‘돼지국밥 먹고 싶다’ 하고 부산으로 달릴 때도 있어요.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고 떠난 적도 몇 번 있는데 매니저 형이 제발 경기도를 벗어나면 연락 좀 하라고 하더라고요.

자주 찾는 나만의 특별한 장소가 있어요?
<이웃집 꽃미남>을 촬영할 때 이틀 정도 쉴 수 있는 날이 생겨서 바로 부산으로 갔어요. 보수동 책골목을 좋아하거든요. 한 권에 오백원, 천원이니까 트렁크를 가득 채워도 30만원이에요. 객관적으로 훌륭한 책은 아니더라도, 어릴 때 좋아했던 책이라면 전집도 사요. <퇴마록>, <드래곤 라자> 같은 PC 통신 시절의 소설들을 사왔죠.

그곳 사람들이 당신을 알아보기도 하나요?
하도 많이 갔더니 이제 알아보는 것 같아요. 알아보든 말든 그냥 흥정하고, 깎고 다 해요. 헌책방을 가는 건 저에겐 좀 소개팅하는 기분이에요.

어떤 사람이 나올지 모른다는 점에서요?
소개팅할 때 ‘눈 크기는 이만하고, 머리 길이는 귀 밑 몇 센티미터인 사람 소개해줘’라고 하지 않잖아요. 우연히 갔는데, 좋은 사람을 만나면 설레기 시작하죠. 서점은 제가 원하는 책이 있고, 정확히 그 책을 사서 나올 수 있는 곳이라면, 헌책방은 예상하지 못한 인연 같아요.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비유를 참 잘하네요. 글도 잘 쓸 것 같아요.
사실 글 쓰는 게 취미예요. 오히려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조심스러워했는데, 요즘은 조금씩 공개를 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멋 부린 글이 아닌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글이 좋아요. 꾸미지 않았는데 결국 읽었을 때 아름다운 글은 드물잖아요.

당신이 쓴 글은 어떨지 궁금한걸요? 그런데 정말 산수를 그렇게 못해요? <맨발의 청춘>에서 ‘산수구멍’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요.
절대 아니에요! 편집의 힘입니다.

<제빵왕 김탁구> 마지막 회에서도 주식 총액을 못 더해서 결국 구마준(주원)이 알려주던데… .
인정할게요. 숫자에 매우 약해요. 초등학생 때부터 그쪽으로는 뇌가 전혀 발달하지 못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