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가 최고인 줄 알았던 세상에 신인류가 등장했다. 바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채식을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차츰 육류를 먹는 게 불편해지는 사람도 있다. 채식을 선택한 그들의 이야기.

느슨한 채식주의자

뼛속까지 ‘대충주의자’로 태어난 나는 당연히 매사에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채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나보다 더 느슨한 채식주의자는 없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다. 채식의 여러 단계 중에서 나는 페스코, 즉 고기는 먹지 않지만 생선과 유제품을 다 먹는 가장 낮은 단계다. 그 헐거운 틀마저도 경우에 따라 과감히 깨버리는 ‘리버럴’한 채식주의자라고 할까. 8년 차 채식주의자에게 그간 일어난 몸과 마음의 구체적인 변화는? 눈을 감고, 마음을 모으고, 맑은 정신으로 집중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건 아마도 내가 몹시 어이없는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식이다. 여행 중에 산골 마을에서 만난 현지인이 ‘외국인 손님’인 나를 위해 닭이라도 삶아 오면 기꺼이 먹는다. 그들에게 가장 귀한 고기를 대접하는 이들 앞에서 “전 환경을 위해 채식하는데요”라며 물리칠 배짱이 내겐 없기 때문이다. 고기가 들어간 어떤 요리가 그 나라 음식 문화의 핵심이라면 남들이 먹을 때 딱 한 점, 맛 정도는 본다. 그래서 페루에선 꾸이(햄스터)를, 아르헨티나에선 스테이크를, 쿠바에서는 꿀과 레몬에 절인 닭을 맛봤다. 내친김에 더 털어놓자. 난 만두라면 실연의 슬픔에 울다가도 손을 뻗는 만두 애호가다. 한동안 고기가 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야채 만두를 찾아 삼천리 방방곡곡을 헤맸다. 한 3년쯤 만두 자체를 끊기도 했지만 결국은 나라 안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야채만두에 고기가 들어 있는 비논리적 상황을 수용하는 타협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삼겹살이 들어간 김치찌개의 국물도 기꺼이 떠먹고, 샤브샤브 국물에 익힌 야채도 쏙쏙 집어 먹는다. 그래서 친구들의 놀림을 달고 산다. “안 보이게 싸서 주면 고기를 먹는다”거나 “체액만 빼 먹는 더 독한 애”라고. 게다가 나는 사람들이 채식주의자에게 갖는 기대와 환상 -비비크림조차 필요 없는 맑은 피부, 분노를 모르는 순한 성정, 명주실처럼 가는 몸매-과도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다. 피부야 떠돌아다니는 처지를 탓한다고 쳐도, 지나치게 넉넉한 몸매와 ‘분노조절장애’가 있다는 놀림을 달고 사는 독한 성질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아무튼, 이 헐거운 채식에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채식을 시작할 때 내가 정한 딱 하나의 원칙 때문이다. 안 그래도 매사에 틀이 많고 가리는 것 많은 나에게 채식이 또 하나의 벽이 되게 하지 않겠다는. 그런데도 이런 수준의 채식조차 벽이 되곤 한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으면 그이는 나 때문에 요리 한 가지를 더 준비해야 하고, 여럿이 밥을 먹으러 갈 때면 고깃집 입구에서 내 눈치를 본다. 정말이지 얼마나 많은 저녁을 연기 자욱한 불판 앞에서 냉면발을 빨아올리며 앉아 있었던지. 어쨌든 나는 이토록 엉성한 채식주의의 삶을 살고 있다. 사실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 바다의 상태를 보면 머지않아 생선마저 끊어야 할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치즈나 버터, 해산물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완벽한 채식주의자는 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 느슨한 채식의 삶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채식을 하는 데서 오는 장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

우선은 고기를 끊은 후 장에 탈이 나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 당연히 동물을 음식의 재료가 아닌 나와 같은 생명으로 존중하는 마음도 생겨났다. 육식주의자로 살던 시절에는 몰랐던 야채와 채소의 깊고 놀라운 맛의 세계를 날마다 탐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야 아직 같은 길을 가는 벗들이 적지만, 바깥에 나가면 채식하는 이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채식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새로운 끈이 되는 셈이다. 지금 채식은 요가나 필라테스보다 더 ‘핫’한 최신 트렌드다. 무엇보다 내 몸에 좋으면서 지구까지 살리는 일이 채식 말고 또 있을까. 세계의 곳곳을 떠돌아 다니는 동안 나는 늘 이 별이 품고 있는 비밀스런 아름다움에 감동하곤 한다. 초록빛을 지닌 우리가 아는 유일한 별. 지구를 아름답게 만드는 건 산과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다. 그 나무를 베어 책을 만들어 밥을 버는 내가 그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 또한 채식이다. 그러니 그냥 이대로 쭉 가자. 아무리 엉성한 채식이라 해도. 이상 느슨한 채식주의자의 변명이었다. – 김남희(여행작가)

인간의 채식은 비약일까?

태어나서부터 그냥 습관적으로 먹다 보니 생각해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읽게 된 사람들이 이번 기회에 이 질문에 대해 한번 ‘철학적’으로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사실 ‘먹는다’는 것의 본질은 생명 유지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죽지 않을 만큼만 먹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식생활은 어떠한가? 그 본질은 잊고 배가 터지도록 먹거나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는 양 극단을 달리고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류 및 동물 그리고 이 지구별 전체의 파멸을 당기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것은 비약일까?

나는 채식주의자다. 사실 채식주의자라는 말은 처음에는 무척 불편한 말이었다. 그냥 채식인이면 됐지 굳이 ‘OO주의자’라고 해야 하는가라는 반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왜 채식주의자로 불려야 하는지 알게 됐다. 나에게 좋은 것, 건강한 것을 먹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채식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다른 생명들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에 대한 반박으로 식물도 생명이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식물은 살려고 파닥거리는 생선처럼 나와 눈을 마주할 수 있는 생명, 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알고, 살려고 애쓰는 생명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내가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다면, 왜 굳이 그토록 ‘살려고 애쓰는’ 생명들을 먹어야 할까? 인간이 더 강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그런 권력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다. 어떤 것을 먹는 것이 그 먹거리에 얽힌 여러 가지 관계를 함축하는 것임을 느끼게 될 때 그리고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될 때 누구나 자연스럽게 채식주의자가 된다. 이것도 비약일까?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생활한 지 어느덧 6년째다. 완전채식을 하게 된 것은 만 3년 정도. 우리 집 주방에서 고기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 가족들도 집에서는 채식을 하고 있는 셈이다. 특별한 저항감이나 거부감은 없었다. 남편은 아주 적극적인 지지자이고 고등학생인 딸은 그토록 좋아하던 우유를 ‘비리다’며 더 이상 먹지 않고, 채식을 즐기게 되었다. 스스로 몸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 고기가 사라진 후 내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부엌에서 나는 냄새가 현저히 줄었다는 거다. 또한 세제를 사용하지 않고 설거지를 할 수 있게 됐고, 싱크대 하수구는 청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깨끗해졌다. 나는,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싱크대 하수구를 보면서 어쩌면 우리 몸의 혈관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역시 비약일까?

몇 년 전 MBC스페셜 <목숨 걸고 편식하다>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제작했기 때문에 우리 회사의 모든 사람은 내가 채식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행복한 경우다. “내가 어디를 갔는데 거기에 정 부장 가면 참 좋겠더라”라고 말해주는 든든한 회사 동료도 많아졌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뿌듯한 점이 있다면 회사에 건의해서 사내 식당에서 현미밥을 먹을 수 있게 한 점이다. 회사의 연말 선물도 백미와 현미 중에 선택이 가능해졌다.

모든 음식은 자연에서 온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은 땅에서 자랐고, 혹은 땅에서 자란 무언가를 먹고 자란 동물들이다. 인스턴트식품도 가장 기본적인 재료는 자연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먹는 것 중에 본질적으로 인공적인 것은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른 생명을 빌려 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유기적인 관계에서 지금은 오직 인간만이 쏙 빠져 있다. 이제는 그 관계 속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않을까?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렇게 가장 자연스럽게 사는 방법은 채식을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여전히 비약일까? – 정성후(MBC PD)

생활의 발견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먹지 않은 지 세 달이 되어간다. 나처럼 붉은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을 세미 베지테리언(Semi-Vegetarian)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내가 반대하는 것은 ‘육식’ 그 자체가 아니라 ‘공장형 축산(Factory Farming)’이다. 소, 돼지, 닭 등 이름만 들어도 친근한 생명체들을 철저히 상품 취급하는 공장형 축산 시스템에서 동물들은 한시라도 빨리 판매 가능한 ‘고기’가 되기 위해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는다. 건강한 삶 대신 숨만 붙어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요구되고, 제대로 죽기도 전에 부위별로 도축된다. 목숨은 자본이 되며, 수많은 동물이 가격표를 달고 죽어간다. 왜? 우리가 고기를 먹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토록 많은 고기’에 대한 의문을 무의식 저편으로 미뤄버린다. 트럭에 짐처럼 실려 어디론가 실려가는 돼지들을 보면서, 닭발과 곱창으로 조각조각 해체되어 팔리는 동물을 보면서, 강원도에서는 수만 마리의 소가 구제역 때문에 생매장당하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점심으로 갈비탕을 먹을 수 있는 것을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얼마 전, 나의 채식 선언을 들은 한 친구는 “난 소 생매장 당하는 동영상 같은 건 아예 안 봐. 보면 고기 못 먹을까봐”라고 말했다. 나 역시 그랬다.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진실을 마주하기 불편했기 때문이다.

본디 육류에 대한 나의 탐식과 호기심은 남다른 수준이었다. 토끼, 꿩, 사슴, 말, 양, 심지어 오리 혀까지 먹을 기회가 생기면 모든 것을 맛봤다. 그러면서도 동물을 좋아한다는 나에게 누군가 그 사실을 지적하려고 하면 “그런 말 하지마. 고기 맛 떨어져”라고 말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폭력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나는 이 불편한 사실을 직시하기로 결심하고 한 권의 책을 펼쳤다. 조너선 서프란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였다. 작가는 농장에 잠입하고, 관계 업자를 인터뷰하며 3년간 미국 축산업의 현장에 대해 세밀히 조사한 후 이 글을 썼다. 책은 실상을 담담하게 전할 뿐이었지만 읽는 내내 나는 몇 번이고 구토가 밀려왔다. 어떤 사람들은 동물을 먹지 않는 사람을 감상 주의자 취급한다. “동물이 불쌍하면, 그럼 식물은 안 불쌍하냐?”는 맥락 없는 질문은 그래서 가능하다. 그 책에서 나로하여금 채식을 결심하게 한 가장 결정적인 문장은 바로 다음 문장이었다. “사람들은 채식주의자를 감상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먹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고기를 먹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감상적이다.” 그랬다. 나는 먹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습관적으로, 필요 이상의 고기를 먹어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몸을 위해서도, 공장형 축산업에 동원되는 동물들을 위해서도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고기를 먹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기를 안 먹어도 살 수있다는 것이 영양학적으로 판명된 이상, 나는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비록 세 달 남짓한 시간이지만, 육식을 줄이면서 내 생활은 한층 복잡해졌다. 단순히 삼겹살과 스테이크를 멀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먹던 모든 음식을 먹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설날에는 우리 가족의 오랜 명절 음식인 한우 샤브샤브를 앞에 두고 버섯만 건져 먹어야 했다. 얼마 전, 상에 오른 떡갈비를 먹지 않는 내게 엄마는 “채식은 좋지만 남이 차려주는 음식조차 고마운 줄 모르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내가 겪는 이런 불편함이 즐겁다. 적어도 습관적으로 음식을 먹던 그때보다 내 삶을 스스로 조절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행동과 실천의 대부분은 어떤 ‘자각’에서 비롯된다. 초콜릿 농장에서 착취당하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현실에 대해 알게 된 후 공정무역 제품을 찾는 일, <북극의 눈물>에서 본 북극곰을 생각하며 텀블러를 사용하는 일, 특정 회사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해 알게 된 후 그 회사의 제품을 사지 않는 일, 좀 더 나아가 특정 정당을 지지하고 집회에 참석하는 일 등. ‘지각의 순간’을 겪은 후, 우리는 행동한다. 나는 고양이 한 마리와 5년째 함께 살고 있고, 부모님 집에는 이제 막 한 살이 된 강아지 두 마리가 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요즘의 나는 그들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 좀 떳떳한 마음이 든다. 그동안 동물의 생명을 ‘식용’과 ‘반려동물용’으로 구분해서 대했던, 내 안의 모순이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채식은 투표에 참여하고, 지지하고 싶은 단체에 기부금을 내는 것처럼 스스로 부채의식을 줄이기 위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옳다고 믿는 일에 전면으로 나서지는 못할지언정 조금이나마 동참하는 것은 내가 ‘나’로 있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초보 채식주의자로서 지낸 지 세 달, 늘어난 삶의 규칙들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일 거다. – 이마루(<얼루어 코리아> 피처 에디터)

채식은, 행동하는 사랑이다

3년 전부터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 나는 한동안 고기를 먹지 않으면 삼겹살과 꽃등심이 ‘고프던’ 육식 애호가였다. 그러면서도 채식을 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나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고기를 좋아하는 식습관을 버리는 건 쉽지 않았다. 일이 있어서 지방에 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던 고속도로에서였다. 도살장으로 실려 가는 수십 마리의 소를 만났다. ‘저 착한 눈을 가진 소는 곧 고기가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러자 그들이 맞이할 고통과 죽음이 떠올랐다.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 순간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몹시 힘이 들었다. 왜 그들의 공포가 내 아픔이 되는 것인지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언젠가 ‘나의 문학노트’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한 때 나는 사자였고 여우였고 뱀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사자에게 잡힌 노루였고 토끼였고 다람쥐였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고기 앞에서 식욕과 동시에 구토를 느끼는 건 그때를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흔들리는 트럭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서로가 서로의 몸을 의지하던 그들의 순한 눈망울을 보며 나는 그 순간 육식동물로 살았던 시간의 기억을 접고 초식동물의 시절로 귀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몸이 육식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자 무엇을 먹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인터넷을 뒤졌다. 의외로 나와 같은 베지테리언이 많았고 그런 사람들을 위한 단체나 동호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채식주의자의 어원이 채소(Vegetable)가 아니라 ‘온전한, 완전한, 건강한’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 ‘베게투스(Vegetus)’에서 온 말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후 <육식의 종말>이나<동물의 역습>과 같은 책을 찾아 읽었다. 우리나라의 채식인구는 50만 명 정도이다. 그중 대부분은 네 발 달린 동물이나 조류를 먹지 않되 생선이나 우유, 달걀은 먹는 페스코(Pesco)이다. 육류와 생선을 먹지 않지만 우유와 달걀을 먹는 락토오보(Lacto-ovo)도 많은 수를 차지한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육류는 물론 어패류와 계란, 모든 유제품까지 먹지 않는 순수한 채식인이다. 이들을 비건(Vegan)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가죽옷과 모피, 앙고라 스웨터와 덕다운 점퍼를 반대한다. 동물 실험을 하는 의약품과 생활용품도 찬성하지 않는다. 나는 수천 명에 불과하다는 완전한 채식, 즉 비건을 ‘지향’한다. 지향한다는 말은 수행자가 아닌 생활인으로 살면서 완벽한 비건이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외식을 할 때 먹게 되는 많은 음식에 알게 모르게 들어가는 동물성 조미료와 대부분의 김치에 들어가는 젓갈류 때문이다.

육식과 채식의 선택은 기아문제와도 직결되어 있다. 이 부분을 알게 되면서 나는 꽤 많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세계 곡물의 70%가 고기 생산을 위한 가축들에게 소비된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육류 소비를 현격히 줄인다면 3초마다 기아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비롯해 6천만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나는 채식인이 되기 1년 전부터 아프리카의 두 어린이를 후원해오고 있는데 3만원이면 한 달을 살 수 있는 그 아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먹은 고기가 결과적으로 그 아이들의 밥을 빼앗은 게 아니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신하건대 채식주의자는 육식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육식은 자연이 생명에게 주는 생존과 영양섭취의 한 방법이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잉태되고 자유롭게 성장하다가 일부가 식용화되던 자연순환적 방식과 달리 대량 생산을 위해 공장식으로 가축을 사육하고 있다는 데 많은 문제가 있다. 사육과 도축과정에서 발생되는 잔혹성과 그것을 견뎌야 하는 동물들의 고통,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동물들에게 투여되는 항생제와 신경안정제 같은 각종 약물들이 고스란히 식탁에 전달된다는 걸 많은 사람은 의식하지 못한다. 나는 위의 모든 원인을 인지하고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채식인이 된 것은 아니다. 채식주의를 외치며 식욕은 당기는데 애써 참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소수그룹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적은 우리나라에서, “짜장면으로 통일이요”를 외치는 식당 문화에서, 이것 빼주세요 저것 빼주세요 주문해야 하는 채식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성격 한번 까탈스럽네’, ‘잘난 척은!’ 이렇게 지레 편견을 갖는 주변의 시선에 대해 일일이 해명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다. 채식을 하면서 달라진 게 몇 가지 있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화가 나야 할 순간에 화가 올라오지 않는다. 환절기마다 목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생각해보니 지난 세 번의 겨울을 무사히 넘긴 것도 신통한 일이다. 요리하는 걸 귀찮아하던 내가 장을 보고 요리하는 시간을 즐기게 된 것은 가장 큰 변화다. 바람이 있다면 외식이 자유롭도록 채식 식당이 좀 더 많아지고 외국처럼 일반 식당에서도 채식인을 위한 메뉴가 한두 개씩 있다면 좋겠다. 처음엔 채식을 왜 하냐고 물으면 통계와 사례와 도살장의 실태를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그러다 보면 좋아야 할 식사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이제 나는 채식을 전파하려고 입에 거품을 물지는 않는다. 동물의 생명도 귀하고 멀리에서 기아로 죽어가는 어린이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내 옆의 사람들도 그들 못지않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왜 채식하는데?”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약간의 배려를 구하고 싶다. 채식은 나 자신에 대한 좀 더 깊은 사랑이고, 나 아닌 다른 생명을 더 잘 이해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껴안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 김규나(소설가)

채식 크로니클

음식에 관해 열정을 가진, 이른바 ‘미식가’들의 혀는 탐욕스럽다. 어린 시절부터 책에 낯선 음식이 등장하면, 나는 본능적으로 배가 고파졌고 맹렬한 호기심이 들곤 했다. 에디터가 되면서 세상의 산해진미와 더 가까워졌으니, 내가 미식가에 점점 가까워 졌다는 건 분명하다. 미식가의 조건은 세상의 모든 맛을 편견 없이 대하는 것이다. 미식의 세계는 채식과 육식의 구분이 없다. 남들이 코를 싸 쥐는 고수를 팍팍 뿌린 쌀국수를 먹고, 미끌미끌하고 콤콤하고 끈끈한 실이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낫토를 휘젓고, 세계 10대 혐오식품에 들어간다는 산낙지도 참 잘 먹는다. 채식도 맛이요, 육식도 맛이다. 채식주의자인 한 선배는 언젠가 기특함 반, 체념 반이 섞인 목소리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음식 기사만큼은 너한테 맡길 수밖에 없겠다.”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맛에 대한 갈망이 먼저였다. 동물을 음식으로 여기는 문화에 반대하는 유명한 책도 대부분 읽었다. 잔인한 도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도 시청했다.

갑자기 아토피를 앓아서 당분간 고기를 끊은 적도 있고,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을 때 처음으로 고기 냄새가 역하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로 채식주의자가 되는 일은 적어도 내겐 일어나지 않았다. 예전보다 배추와 시금치를 좋아하게 되었고 코스 요리를 먹을 때면 안심 대신 도미를 선택하게 되는 일이 많아진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오히려 내가 의식적으로 채식을 하려고 노력하고 육식을 줄인 ‘채식의식주의자’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일’에서 왔다. 벌써 3년째 <얼루어>의 그린 이슈를 만드는 것. 내내 생명과 환경을 생각하고 글을 쓰면서 숯불에 안창살 한 점을 올리는 건 어쩐지 민망한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자기충족적 예언이라고 했었나. 자꾸 그렇게 글을 쓰다 보니, 내 스스로도 점점 동화된다.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을 구하는 세계의 아티스트와 인터뷰를 하면서 동물의 권리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선재 스님과 인터뷰를 한 후에는 계절이 아닌 채소도 예쁘게 보이지 않는다. 이제 1주일에 한두 번 정도만 육류를 먹고 있다. 고기가 없으면 밥상을 물렸다는 유년 시절 꼬마가 지금의 나를 보면 놀랄 것이다.

육류의 소비를 줄이는 대신 해산물을 훨씬 많이 먹게 되었는데, 육식에 비해 덜 학대적으로 보이는 해산물의 소비에도 찜찜한 구석은 있다. 남획과 포획으로 바닷속 생물도 멸종 위기에 처해 있고, 인간의 양식을 위해 인공적으로 양식되며, 항생제와 화학성분에 노출되어 있는 것도 같다. 환경 의식이 우리나라 보다 더 발달했다는 유럽도 예외는 아니다. 작년 유럽에서는 항생제 투약이 알려지면서 ‘노르웨이 연어 파동’으로 부를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유럽의 식탁에서 연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우리나라의 고등어나 조기에 비할 수 있으므로, 특히 연어 소비가 많은 프랑스에서 난리가 났고 레스토랑의 노르웨이산 연어의 대 부분이 스코틀랜드산 연어로 대체되었다. 미국 오가닉 푸드의 진앙지인 샌프란 시스코에서는 ‘시푸드 워칭(Seafood Watching)’ 캠페인을 만날 수 있었다.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으로도 출시된 시푸드 워칭은 해양 친화적인 재료를 알려주는 비영리 단체다. 한마디로 우리가 먹어도 되는 해산물과 먹지 말아야 할 해산물을 구분해준다. 자국의 해안에서 나는 재료가 우선이고(Best Choice), 세계적으로 풍부한 재료가 그 다음(Good Alternatives). 칠레산 송어나 캐비아, 블루핀 참치, 상어 등 멸종 위기종은 우리가 당장 소비를 줄여야 할 재료다. 바닷속에도 ‘지속가능한 음식’이 있다. 그 후로 오묘하고 촉촉하며 부위별로 달라지는 신묘한 맛 때문에 좋아하던 참치도 잘 못 먹게 되었다.

우리가 생태계에 존재하는 포식자라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는 세상에 놓인 많은 딜레마 속에서 각자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야만 한다. 이 세상에는 채식주의자가 있고, 육식주의자가 있고, 육식주의자이면서 채식을 의식하는 사람이 있다. 인간의 생존이 다른 생명의 희생임을 모른 척하는 대신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것을 택하며 자기 손으로 도축한 고기만 먹는 페이스북의 창시자, 주커버그와 <내 농장은 28번가에 있다>를 쓴 노벨라처럼 도시에서 돼지를 기르는 사람도 있다. 내 기준에서 추구할 수 있는 이상향은 기르던 가축을 잡아먹는 과거의 농경사회다. 매일 여물을 주던 소를 잡는 날,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떤 부속물도 버려지지 않도록 모든 걸 다 먹었다. 몇 년 전, 여주에 사는 외할머니는 달걀을 얻기 위해 닭을 기르기 시작했다. 두 마리였던 닭이 이제 열댓 마리가 넘는다. 외갓집에 가는 날이면 아버지가 목을 비튼다. 외삼촌은 그런 물건이 이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던 닭 털 뽑는 기계를 샀다. 나는 날개 쪽에 남아 있는 털을 뽑고, 뱃속에서 줄줄이 달걀이 되려고 준비 중인 어떤 것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그리고 생명의 어떤 순환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곡물껍질과 국물을 낸 멸치를 먹고 자란 외할머니 농장의 닭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것과 맛도 식감도 다르다. 나는 여전히 육식을 하고 생선을 먹는다. 머리와 가슴과 식욕. 맛있는 음식을 원하는 혀끝의 탐욕은 내 안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채식을 하는 당신과 육식을 조금 줄인 내가 사이좋게 살아간다. – 허윤선(<얼루어 코리아> 피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