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역할을 오가는 그는 성실하게 자신의 연기 색을 만들어간다. 톡톡 튀는 색은 아니지만, 다른 모든 색을 흡수할 수 있는 그런 색 말이다. 영화 <동네 사람들>과 드라마 <톱스타 유백이>의 배우 이상엽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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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틀넥 니트는 맨온더분(Man on the Boon), 가죽 재킷은 산드로옴므(Sandro Homme).

영화 <동네 사람들>은 여고생이 사라졌지만 너무나 평온한 어느 시골 마을에서 시작된다. 실종된 여고생의 유일한 친구만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배우 이상엽은 이 고등학교에서 인기 많은 미술 교사 ‘지성’ 역을 맡았다. 영화에서 음산하고 불길한 분위기를 이끄는 핵심 인물로, 눈빛만 보아도 복잡한 서사가 느껴진다. ‘지성’으로 살아간 지난해 가을과 겨울은 그에게 무척 혹독했다. 실제의 그와 정반대의 캐릭터를 맡아 스스로를 완전히 비워내고 다른 누군가를 새로이 담는 작업을 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표현하며 살아왔는데, 한동안 말도 없고 웃음기도 없는 의뭉스러운 인물로 살았다. 작품 캐릭터가 실제 일상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타입이라, 이번 촬영으로 자신의 중심을 잃어가는 느낌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유난히 더 추운 계절이었다.

두 계절이 바뀐 뒤, 그는 또 다른 인물로 살아가고 있다. 이번엔 삼각 관계가 얽힌 로맨틱 코미디물이다. 11월 방영을 앞둔 드라마 <톱스타 유백이>에서는 능글맞은 상남자 캐릭터로 변신을 시도한다. 완도와 대모도를 오가며 매일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준 그에게 이번 드라마는 어떤 색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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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틀넥 니트는 송지오옴므(Songzio Homme), 브릭 코듀로이 팬츠는 비이커(Beaker).

영화 <동네 사람들>의 ‘지성’은 어떤 사람인가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아요. 그래서 표정이 없어요. 표정이 없으면 연기를 하는 게 너무 어렵거든요. 내가 의도하는 바를 관객이 알아줄 거라고 믿으면서 연기해야 하니까요. 처음에는 대본을 보고 ‘아, 나는 할 수 없는 역할이다’라고 생각하고 한 번 도망쳤던 작품이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 욕심이 나더라고요.

촬영을 할 때에는 여전히 어렵게 느껴지던가요?
촬영할 때는 오히려 괜찮았어요. 촬영이 모두 끝난 후 더 힘들었죠. 더 이상 그 캐릭터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 캐릭터가 제게서 빠져나간 후에 공허해지더라고요. 못 헤어나서 막 울기도 했고요.

함께 연기한 배우 마동석, 김새론과의 호흡은 어땠나요?
정말 금방 친해졌어요. 동석이 형은 원래 친분이 있었고, 17살 차이가 나는 새론이는 조금 불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함께 고생하면서 급격히 우정을 쌓았죠. 매 작품마다 슬럼프가 오는 편인데 그럴 때마다 현장에서 상대 배우나 감독님께 많이 의지해요.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어요. 제가 ‘슬로우 스타터’거든요. 캐릭터에 몰입하는 데 시간이 걸려요. 함께 연기에 대해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했죠.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봐줬으면 하는 건 무엇이에요?
이 영화는 모두가 ‘No’라고 하는 상황에서 ‘Yes’를 외치는 한 사람의 외로운 싸움을 다뤄요. 용감히 싸우는 한 학생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을 거예요.

지금까지 맡은 역할을 보면 대부분 선과 악을 바삐 오가더라고요. 대본을 선택하는 스스로의 기준이 있나요?
이미지가 어떤 하나로 고착되는 게 싫어서 극과 극의 캐릭터를 선택하는 편이에요. 굉장히 위험한 일이죠.(웃음) 예전에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연기하는 게 배우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간격을 두어야겠더라고요. 배우가 아닌 진짜 이상엽으로 돌아오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편이라서요.

자신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준 것들이 있나요?
이번 영화가 끝난 후에는 <런닝맨>에 반고정으로 출연하면서 밝고 긍정적인 본래 모습을 많이 되찾았죠. <런닝맨> 멤버들에게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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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틀넥 니트는 비이커(Beaker), 스트라이프 카디건과 머플러는 모두 카모 바이 비이커(Camo by Beaker), 브라운 팬츠는 바레나 베네지아 바이 비이커(Barena Venezia by Beaker).

예능 프로그램 촬영이 끝나고 또다시 촬영 현장으로 돌아갔어요. 지금은 완도에서 촬영 중이라면서요?
완도에서 한 시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대모도에서 즐겁게 촬영하고 있어요. 슈퍼도, 편의점도 없는 곳이죠. 거기 있으면 휴대폰도 보지 않게 돼요.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어서 오히려 좋아요. 제 분량은 아직 1%도 끝내지 못했어요. 오늘 이 인터뷰가 끝나면 다시 완도로 내려가요.

즐겁기보다 치열한 촬영 현장이 되지 않을까요? ‘삼각관계’가 등장하니까요.
맞아요. 배우 전소민과 김지석이 함께 출연하는데, 두 남자 중 누구의 사랑이 이루어질지가 드라마의 중요 포인트예요. 제가 맡은 ‘최마돌’은 평생 한 여자만을 위해 살아온 남자예요. 그녀를 위해 유능한 선장이 되어 본래 살던 섬으로 돌아오죠. 그동안 한 번도 맡아보지 않은 능글맞은 상남자 캐릭터라, 시청자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정말 궁금해요.

‘최마돌’로 살기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나요?
전라도 사투리요. 사투리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소민이와 공부를 했어요.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다양한 애드리브도 준비했어요. 소민이와는 워낙 친하고 지석이 형은 워낙 배려심이 많아서 촬영 현장이 정말 화기애애하거든요.

실제 성격과 캐릭터를 비교해보자면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직진하는 성격은 비슷해요. 하지만 저는 ‘상남자’는 아니에요. 최마돌은 부지런하지만 저는 게으르고요.

스케줄이 없을 때는 주로 뭘 하나요? 게으른 하루를 보내는 편인가요?
집에서 할 일이 많아요. 책과 영화도 봐야 하고 비디오 게임도 해야 해요. 그러다 누워서 팩을 하면 하루가 다 가죠.

하지만 SNS를 보니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정말 많던걸요?
친한 동갑내기 술모임이 있어요. 배우 김동욱, 임주환, 최성준, 그리고 장성규 아나운서와 자주 만나요. 성규는 <아는 형님>으로 친해졌어요. 비슷한 일을 하다보니 말도 잘 통하고 고민도 털어놓게 돼요. 누군가와 대화할 때 정말 많은 위로를 받는 편이거든요. 아, 모임 멤버 중에 뮤지컬 배우 김호영도 있어요!

요즘은 그들과 어떤 고민을 나눠요?
장가를 가고 싶어요.(웃음) 그런데 예전만큼 설레는 감정이 점점 없어지고 있어요. 어떤 감정이 훅 들어와서 내 혼을 쏙 빼놓는 그런 거요. 그게 연애든 아니든 노력해보려고 했는데, 그러면 상대방에게 어느 순간 내 조바심을 들켜버리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나를 보여주지 못하게 되고요. 요즘은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요. 언젠가는 오겠지 하고요. 물론 드라마 촬영을 시작했으니 연기에 대한 고민도 합니다. 전라도 사투리가 정말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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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지 롱 코트는 노앙(Nohant), 터틀넥, 데님 재킷과 데님 팬츠는 모두 캘빈 클라인 진(Calvin Klein Jeans), 스니커즈는 이자벨 마랑 옴므(Isabel Marant Homme).

연기를 하기 위해 영감을 얻는 곳이 있나요?
이병헌 선배를 정말 좋아해요. 예전 인터뷰에서 영화 <달콤한 인생>을 스무 번 정도 봤다고 얘기했었는데, 이제는 서른 번이 넘었을 거예요. 이 영화는 도무지 빈틈을 찾을 수 없어요. 서 있기만 해도 존재감이 느껴지는 이병헌 선배의 연기나 김지운 감독님의 연출, 그리고 미장센까지. 몇십 번 반복해서 봐도 늘 새로워요.

친한 배우 중에 꼽자면요?
배우 이선균과 보아요. 의외의 조합이죠? 드라마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에서 만났어요. 배우 이선균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세상 어딘가에 정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꼭 배우로서가 아니라도 삶의 태도나 자신감도 닮고 싶어요. 보아 역시 마찬가지예요. 술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죠.

주변의 긍정적인 면을 흡수해 결국에는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요?
모두가 기억하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자 배우가 되는 게 제 목표예요. 정말 어려운 일이겠죠? 누군가가 저를 기억할 때 ‘그래. 상엽이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노력하는 사람이었지’ 하고 회상하게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남은 올해, 세워둔 계획이 있나요?
‘몸짱’이 되고 싶어요.(웃음) 짜여진 식단을 지키면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거든요. 다이어트 때문에 시작하기는 했는데, 몸의 변화가 느껴지니까 욕심이 생겼어요. 올해가 가기 전에 ‘상의 탈의’에도 도전하고 싶고요. 또 다른 제 모습을 보게 되어서 좋아요.

아직 배우로서 보여주지 못한 이상엽의 새로운 모습이 많을까요?
아니요. 제가 보여줄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자신 있게 ‘이런 모습은 이때 보여줘야지’ 하고 시기에 맞춰 하나씩 꺼내고 싶어질 텐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늘 불안하고 걱정이 많아요. 그래서 연기를 할 때 몇 배는 더 고민하고 생각하게 돼요. 그동안 나를 너무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하고요. 그래서 오늘 화보 촬영의 기회가 주어진 게 정말 좋았어요. 내가 이런 표정이 있었구나, 이런 얼굴도 있구나 느꼈거든요. 앞으로도 제 배우 생활은 제 스스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 될 거예요. 그러니 함께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