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소확행’이라는 말이 밀레니얼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말. 하루키는 왜 이 말을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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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청춘이지만 사실 가질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은 이 시대에 이것처럼 달콤한 주문이 어디 있을까. ‘소확행’은 세상은 냉혹하고, 나는 여전히 집이 없고, 월급은 잘 오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는 있다고 전파한다. 이것은 어느새 밀레니얼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을 설명하는 강력한 키워드가 되었다.

그런데 하루키는 이 말을 대체 왜, 어떤 맥락에서 한 걸까? 국내 번역된 하루키의 책을 모두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명확히 떠오르지는 않아서, 나는 오랜만에 책장을 뒤졌다. 소확행…소확행…주문처럼 되뇌며 찾아보니 하루키는 이 말을 제법 여러 번, 조금씩 다르게 반복하고 있다. 소확행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문장은 역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앞에는 더 긴 문장이 생략되어 있다. 하루키는 집 근처 레코드 가게에서 맷 데니서의 오리지널 트렌드판을 34달러에 팔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가격 때문에 선뜻 사지 못하다가 그만 품절되어버린다. 굉장히 실망한 하루키는 3년 후 다른 지역의 중고 레코드 가게에서 같은 레코드를 2.99달러에 파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냉큼 산다. ‘결국 구두쇠가 아니냐는 말을 들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다. 생활 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혼자 눈을 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 이 수필이 실린 책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국내 초판은 1999년. 그러니 훨씬 이전에 쓴 글이다. 여기, 또 다른 버전도 있다.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만 깨끗한 팬티가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은 작기는 하지만 확고한 행복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건 어쩌면 나만의 특수한 사고 체계인지도 모르겠다.’ 또 이렇게도 말한다. ‘러닝셔츠도 상당히 좋아한다. 막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퐁퐁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그 기분이란 역시 소확행의 하나이다’ 어쩐지 이 장면을 내것이라고 상상해보니 행복해진다. 행복은 별거 아니고 사실 우리 일상 속에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마치 ‘힐링’의 다음 주자처럼 마케팅적으로 적극 활용되면서 소확행의 뜻은 다소 바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무조건 가져야 할 행복, 무조건 해야 할 소비처럼 말이다. 소확행이기 때문에 지금 이것을 사라고, 이것을 하라고 부추기는 손들이 너무 많아졌다. 주체인 우리 역시 그 물결 속에 휩쓸리며 나자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마땅하고 당연하게 가져야 할 무엇처럼 여긴다. 하지만 하루키가 말한 ‘소확행’은 그냥 얻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하루키가 가장 구체적으로 말한 ‘소확행’에서 그가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말한 것은 격렬한 운동과 자기 규제다.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다 마시는 맥주가 아닌 운동 후의 맥주다. 레코드판을 적당한 가격에 사기 위해 3년을 보냈다. 하얀 러닝셔츠는 하늘에서 떨어지는가? 그걸 입기 위해서는 그 셔츠를 입은 후 묵히지 말고 바로 세탁해야 하며, 찌든 때는 별도의 세제로 비벼두고, 세탁 후에는 냄새가 나지 않게 잘 말리거나 섬유유연제를 선택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만 팬티 역시 마찬가지. 팬티 접는 사람이 따로 있고, 입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소확행일 리 없다. 노력 없이 얻는 당연한 것들은 금세 매너리즘과 감흥 없는 것이 되곤 한다. 어느 날, 팬티는 아무 감흥 없는 팬티가 되어버릴 뿐이며 매일 마시는 맥주는 그저 트림만 불러일으키겠지.

영화 <색, 계>의 원작자로, 현대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장아이링은 당대의 천재로 불렸다. 그녀는 중학생 시절, 자신이 쓴 글을 투고해 첫 원고료로 5원을 받는다. 그녀는 그 5원으로 립스틱을 샀다. 장아이링의 어머니는 그 돈을 기념으로 보관하지 않은 것을 나무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이 번 돈으로 바란 것은 자신의 립스틱이었고 그것은 먼 훗날 회고록에 적을 정도로 기억에 남을 만한 확실한 행복이 되었다. 오늘 무엇을 가질 것인가? 한정된 자원으로 무엇을 할지, 어떻게 작고도 큰 행복을 추구해야 할지는 항상 선택의 연속이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일상을, 숨은 욕구를 애정어리게 돌보며 기울이는 아주 평범한 노력이야말로 불확실한 행복의 가장 확실한 전제조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