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에사우이라 해변, 시칠리아의 수산시장, 아라비아반도의 끝. ‘여행이란 종착’이라는 말을 비켜가며 부유하는 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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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사우이라

북아프리카 모로코, 서쪽으로 내려치듯 차를 몰면 에사우이라가 있다. 화가와 영화감독처럼 예술가가 등을 맞대고 사는 항구도시. 어떤 해변은 야자수와 체 친 밀가루처럼 얇은 백사장 때문에 찾아가지만, 에사우이라는 다르다. 세상의 끝을 향해 돌진하듯 차를 몰기 위한 어떤 이정표라서. 어떤 정서를 갖고 있는 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은 내내 요동쳤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차를 두고, 털썩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걸었다. 거침없이 뻗은 해변은 혼자라면 누구든 외로울 만큼 넓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바람, 드문 인적과 몸을 내던지듯 몰아치는 파도. 사막도 물이 잠기면 이렇겠지. 비릿한 냄새를 따라 고개를 휙 꺾으면 오래된 항구가 보인다. 시간에 침식당한 배를 드러낸 거대한 나무배를 두고 작은 고깃배와 어부가 뒤엉킨다. 흰색 가운을 입고 고무장화를 신은 늙은 어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온통 흰옷을 입은 노인은 차라리 경건했고, 진짜 에사우이라를 보기 위한 쉼표 같아서, 숨을 참고 침을 삼켰다. 유명인사의 준비된 인터뷰보다 근사한 얘기가 산처럼 쌓여 있는 표정이었는데, 에사우이라의 가장 아름다운 단면이라 말하고 싶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집이 어딘지 굳이 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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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종, 셔츠, 스웨터, 팬츠는 모두 갤럭시. 마라케시에서 구입한 모로코 전통의상과 마조렐 가든 맞은편 커피숍 직원의 모자, 교토에서 산 슬리퍼는 모두 에디터의 것.

마라케시

에사우이라에서 서너 시간 차를 몰면 아름다움에 반쯤 눈이 머는 도시 마라케시가 나온다. 마라케시는 메디나라고 불리는 미로 같은 구시가지가 여전한데, 어떤 정복자도 길을 헤매다 머물러 살 것처럼 복잡하다. 호텔 문을 나서면 거리는 짐승 같다가도 기도를 알리는 종이 치면 도시는 깊은 바다처럼 숭고해진다. 마라케시는 꽤 오래전부터 음악가나 소설가를 위한 안식처를 자처했는데, 완벽한 분리 때문이다. 벽에 휩싸인 작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집이든 쉽게 고립된다. 거의 완벽한 단절, 고대 도시의 유배지처럼 아늑하다. 마라케시에 머물 때마다 메디나의 북서쪽, 다르다르마 호텔을 찾는다. 야자수가 천장까지 자란 중정을 건너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천장에 창문을 낸 방이 나온다. 갈 때마다 기도실을 개조한 레드 룸은 예약이 꽉 차, 어느덧 그 방이 마라케시를 되돌아보는 이유가 되었다. 이브 생 로랑도 마라케시에 파란색 집을 산 뒤, 전 세계에서 수집한 나무로 정원을 가득 채웠다. 그중엔 멕시코 선인장과 일본 대나무도 있다. 지금은 마조렐 가든이라 불리며 마라케시를 밝게 비추는 방향타가 되었다. 마라케시는 사하라 사막으로 가는 문, 상술로 물든 천 년, 오후 다섯시의 빛이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 적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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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젠토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남쪽 끝 아그리젠토. 북아프리카를 마주하는 해변엔 그 유명한 신들의 협곡이 있다. 언덕 위로 그리스 신전이 줄을 서듯 우뚝한 곳. 헤라클레스 신전은 침몰한 전함 같기도 했고, 또 어떤 건 어제 지은 듯 빛에 반응했다. 숙소는 신전이 보이는 곳으로 정했는데, 농장을 개조한 곳으로 올리브 나무가 촘촘했다. 낯선 손님에게 카푸치노에는 우유가 들어간다고 설명해주는 할아버지가 있는 뜰과 식탁. 아그리젠토는 수상한 들짐승도 편안하게 몸을 뉠 것처럼 안락해서 예정보다 하루 더 지내기로 했다. 아그리젠토에서 남쪽으로 차를 몰아 핸들을 몇 번쯤 꺾다 보면 절벽이 나온다. 시칠리아 섬에서는 이곳을 터키인의 계단이라 부른다. 점토와 석회가 섞인 흙이 만든 계단식 절벽. 온통 새하얀 절벽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 빛의 벌판처럼 보였다. 침착해 보였던 절벽 끝은 험악한 바람이 온몸을 잘게 물어뜯는 듯했다.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여유를 가장해 절벽의 꼭짓점에 다리를 걸치고 앉았다. 모래가 다리와 팔에 옮겨 붙었다. 여기선 지중해의 햇볕을 피부에 담아 가고 싶어 내내 앉아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피부에 그날의 흔적이 남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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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 티셔츠, 팬츠 모두 갤럭시 라이프스타일. 흰색 가운으로 만든 정육점 유니폼은 에디터의 것.

카타니아

아그리젠토에서 시칠리아 섬의 중심을 가로질러 동쪽 끝에 가면 항구도시 카타니아가 나온다.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다른 섬보다 윤택해서 차를 모는 시간이 제법 늘어진다. 본격적인 도로 공사로 구글맵이 소용없다가도 이내 차를 몰면 가야 했던 길이 나오기도 하고. 힘껏 들이마시고 싶은 청량한 구름, 부드러운 굴곡, 벌판 끝엔 나무 몇 그루 또렷하다. 다른 지중해 섬과 달리 시칠리아는 겉보다 속이 더 찬란하다. 카타니아를 사이에 두고 휴양 도시 타오르미나와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는 시러큐스가 있다. 어느 쪽으로 갈까 망설이다 카타니아의 오래된 수산시장에서 잠시 차를 뉘었다. 수산시장은 건물 그림자와 햇볕을 오가며 가지런했고, 바로 먹어도 비리지 않은 작은 새우도 가만히 생명을 털어내고 있었다. 수산시장 곁엔 빵집과 과일시장이 있었고, 코너를 돌면 정육점도 몇 개 보였다. 정육점에서 일하는 중년 남자들은 조약돌처럼 단단했고, 머리는 기름을 발라 정갈했다. 정육점 이름을 새긴 흰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그걸 옷장에 걸어두고 싶어 기어코 샀다. 수산시장에 있는 정육점 유니폼으로, 카타니아를 행복하고 기이한 정박지로 기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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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히바

오만이 비밀처럼 간직했던 이름을 꺼내자, 기어코 그곳에 가야 할 이유를 찾았다. 아라비아의 사막 와히바.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서 예멘 쪽으로 차를 서너 시간 몰면 거대한 사막이 시작된다. 여행 전날 고용한 튀니지 출신 드라이버는 사막을 등진, 어쩌면 마지막으로 문명이라 부를 만한 허름한 정비소에 차를 세웠다. 그림자보다 검게 탄 청년은 타이어 바람을 느슨하게 밀어냈다. 길을 되짚어 사막으로 돌진했다. 순간 충격적으로 아름다운 사막이 망막에 부딪혔다. 느닷없이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마주하는 건 불에 덴 듯 고통스러웠다. 와히바의 언덕은 가파르게 높았고, 차는 모래에 미끄러지며 재주를 부리듯 전진했다. 차는 사막에 뱃길처럼 흔적을 남기며 모래를 일으켰는데, 차가 멈추면 거대한 수족관처럼 재빨리 고요해졌다. 모래는 빛의 입자가 부서진 것 같았고, 붉게 빛났다. 와히바 사막의 석양을 기다리며 언덕에 차를 세웠다.사막에서 태어난 베두인도 와히바의 여름을 피해 에어컨을 찾아 헤맨다. 모래는 걸음마다 폭풍처럼 타올라 폐를 가득 채웠다. 문득 사막을 서울에 가져가고 싶었다. 얼음이 담긴 비닐봉지를 비웠다. 가득 찰 때까지 와히바를 퍼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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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카트

아라비아반도의 끝자락, 오만의 항구도시 무스카트. 이 이름은 부르는 것만으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위험한 남자라도 된 것 같았다. 무스카트의 아침은 지구 위 어떤 문명보다 서둘러 시작된다. 한낮엔 도시 전체가 멈춘다. 어떤 그늘이든 비집고 들어가 햇볕을 피해야 하니까. 빙하보다 좀 더 추운 거대한 쇼핑센터도 마찬가지. 무스카트에서 가장 큰 시장에 가서 좁은 골목을 뱅글뱅글 돌았다. 무스카트 상인은 점잖아서 호객 행위는 고사하고, 빵껍질처럼 건조하게 할 말만 딱 잘라 말해서 좋았다. 오만은 줄곧 세상에서 가장 좋은 유향으로 유명했다. 동방박사의 세 가지 선물 중 하나로 한때, 금보다 비싼 물건이었다. 유향나무에 상처를 내 흘린 수액이 굳은 것으로 모양은 으레 제각각. 침향과 비슷하달까. 빛을 받으면 호박색으로 빛나는데, 아라비아에선 귀한 손님이 오기 전 번잡함을 몰아내고 환영의 의미로 방에 연기가 가득 차게 유향을 피운다. 골목마다 유향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가장 싼 것도 모로코 가게에서 본 것보다 몇 배는 좋아 보였다. 등을 곧게 편 할아버지가 있는 가게에 들어가 진열된 것 말고, 이 가게에서 가장 좋은 유향을 보여달라 호기롭게 말했다.